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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22
신앙관이 변해야 산다[빌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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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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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충전배터리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수명이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주 충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충전배터리라고 무한정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충전배터리도 수명이 있어서 수명이 다된 배터리는 아무리 오랜 시간 충전기에 꽂아놓아도 축전(蓄電)이 안됩니다. 모든 건전지가 다 그렇듯이 축전지도 사용하면 전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그 때마다 다시 충전을 해줘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측면에서 볼 때, 영적인 힘(靈力)이 전력에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력을 충전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만일에 한번 충전으로 한 달을 쓴다든지, 일년을 쓸 수 있는 배터리가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요? 저는 비록 목사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우리 기독교는 예배를 이렇게 자주 드려야 하나? 일반인들이 제사지내듯이 일년에 몇 차례 드리고 말지, 설교준비도 힘들고, 일주일에 몇 번씩 드리는 예배도 귀찮고. 그런데 심사숙고해보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더군요. 한번 충전으로 오래가는 배터리가 없듯이 기독교인도 한번 예배로 지탱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자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밖에 세워둔 자동차를 보세요. 세차 후에 밖에 세워두면 깨끗한 채로 있어야 하는데, 2~3일만 지나면 저절로 더러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만 앉아 있어도 하루 밤 자고 나면 세수해야하고 샤워해야 합니다. 방에만 있었다고 닦지 않고 그냥 있어보세요, 얼마나 견디기 힘든가.
자연상태에서는 내버려두면 망가집니다. 자연상태에서 내버려두면 망가지는 것이 물질만은 아닙니다. 사람의 육체도 망가지고, 마음도 망가지고, 정신도 망가지고, 영혼도 망가집니다. 한번 예배로 그 영적인 힘이 한 달도 가고 일년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번 닦고 나면 한 달이고 일년이고 다시 닦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바램일 뿐이지,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충전배터리와 같고, 예배시간은 충전시간과 같다고 했는데, 그러면 배터리 충전은 왜 합니까? 충전을 해야 전력이 축전 돼서 손전등을 켤 수 있고, 카세트도 들을 수 있고, 휴대폰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크고 작은 제품들 가운데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은 제품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시계, 컴퓨터, 계산기, 전자수첩, 전화기, 면도기, 무선호출기 등 곳곳에 배터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배터리는 자기를 희생시켜서 불을 밝히기도 하고, 크고 작은 기계들을 작동시킵니다. 그리고 배터리의 수명이 다되면, 불도 꺼지고, 기계도 멈추고 맙니다. 그만큼 배터리의 중요성은 큽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고 또 그분에게 예배를 드립니까? 복 받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복이란 무엇입니까? 돈 잘 벌어 잘먹고 잘사는 게 복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변에 돈이 많아 가지고 매일 먹고 노는 부자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다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복은 돈이 많거나 먹고 노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복은 오히려 노동에 있습니다. 노동은 신성할 뿐 아니라,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노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행한 일인지 아십니까? 할 일없이 마냥 먹고 놀아보세요.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노는 것만큼 지겹고, 짜증나고, 쉽게 질리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노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큰 자극을 찾아 나서게 되고,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마음과 육체를 망치고 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은 일하고 봉사하는 데 있습니다. 일하고 봉사하다보면, 성취감도 생기고 보람도 느낍니다. 여기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살게되면 만족은 더욱 커집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세상에서 해볼 것 다 해보다가, "아, 이게 아니구나"싶어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사람들의 신앙생활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무엇이 있습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는 목적이 배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배터리를 충전하는 목적이 배터리를 배불리고, 배터리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배터리에 아무리 많은 전력이 저장되어 있다할지라도, 불을 밝히고, 기계를 돌리는데 쓰이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주일 예배당에 모여 함께 찬양하고 경배와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도 영적인 힘을 얻어서 세상에 나가 어둠을 밝히고, 땀흘려 노동하며 봉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배터리가 축전을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쓰이기 위해서 존재하듯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내 배불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앙관을 '복 받는다'의 개념에서 '봉사한다'의 개념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의 기독교가 살고, 우리 자신도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금년(99) 1월 17일자 한국일보 [표주박]난에 광주에서 할인점을 운영하는 49세의 이모 여인이 "악귀와 재앙을 쫓아준다는 말을 믿고 7년간 2억6,600만 원어치의 부적을 샀으나, 결혼한 딸이 가정 불화로 가출하고, 10억여원의 빚까지 졌다."며 66세의 역술인 이모 여인을 사기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는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부적은 악령이나 악귀 또는 여러 가지 불행을 막고, 행운이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집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미신적인 도구입니다. 부적으로 쓰이는 재료는 다양하지만, 보통 우리가 '부적'하면, 대개 한지에 붉은 색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쓴 손바닥만한 쪽지를 말합니다. 붉은 색을 쓰는 이유는 붉은 색이 태양의 상징으로 악귀를 쫓는 주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이 쪽지가 과연 불행을 막아주고 행운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귀신이 그까짓 종이 쪽지에 무서워 떨기라도 한다면, 불행을 겪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까짓 종이 쪽지 몇 장 얻자고 2억 6,600만원을 날렸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입니까? 또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까? 그 돈 가지고 좋은 일을 했으면, 좋은 일해서 기쁘고, 자녀는 좋은 일하며 살아가는 가정에서 자랐으니,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가치관을 배우게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며, 돈도 있겠다, 가정이 그렇게까지 파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녀가 불행하게된 이유는 돈이 없어서도 아니었고, 사업이 안돼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불행하게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의 잘못된 신앙관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겪었던 불행은 필설(筆舌)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줘서일까요? 그렇다면 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잘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일까요? 아니면, 불행한 일 안 당하고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이 복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잘먹고 잘 지내든, 못 먹고 못살든, 불행한 일을 겪든, 유쾌한 일만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일까요? 잘먹고 잘사는 것만이 진정한 복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야겠지요? '안되면 되게 하라'든지, '통하게 하라'든지 하는 군사문화에 익숙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면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 더 많은 저주를 받은 민족일 것입니다. 또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많은 신앙인들은,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이란 책을 쓴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 교수의 말처럼, 어리석은 바보들이 아니었으면, 적어도 국가의 반역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과 달랐던 점이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민족보다 잘먹고 잘 살기 때문입니까? 미국처럼 강대국을 이루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자손손 대물림시킨 위대한 야훼신앙 때문입니다. 모습도 없고, 신화도 없고, 여신도 없고, 오로지 한 분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그 신앙에서 올바른 인생관이 정립되고, 가치관이 정립되고, 세계관이 정립되고, 신앙관이 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신앙과 정신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닥치는 불행을 극복하게 하였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고, 세계인의 주목과 부러움을 사는 민족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서구 유럽사회가 문명을 이룬 것이 지하자원이 많아서 입니까? 서구인들이 우리보다 머리가 좋아서입니까? 아니면, 우리보다 체구가 좋아서입니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보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머리가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난 2천년 동안 대물림시킨 위대한 기독교 신앙과 정신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세계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 않게 인구비율로 보아서 기독교인도 많고 타 종교인도 많습니다. 종교를 갖지 아니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나라가 우리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씨가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란 책을 보면, 한국을 "염치없는 나라," "무법천지 아, 대한민국"이라고 했습니다. 또 마모루씨는 "교통법규 지키시오, 아멘"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토록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가 왜 나 같은 외국인한테서 '무법천지'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진실로 납득할 수 없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설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많은 교회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쪽 빰을 맞으면 왼쪽 빰을 내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파하고 있다면 한국 사회가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잘먹고 잘 사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을 거둬들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이 참으로 복 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작년(98) 4월 2일 한국종교협의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서울대 정진홍 교수는 [난국 극복을 위한 신앙개혁]이란 주제강연에서 "이 땅의 종교인들은 위선을 벗고 고뇌하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의 모든 종교는 "종교인이 되면, 지금 여기서, 고통받지 않고, 춥고 배고프지 않으며, 사회에서 꽤 힘을 쓰며, 남보다 못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해답을 제시하는데, 이는 사람을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공간에 가둬 개인적인 복을 빌면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감사만 넘치게 하는 기복신앙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관이 변해야 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변해야 우리 나라가 삽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일렀습니다. 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진정으로 복을 누리는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도 달게 받는 것이지,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물질의 풍요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6장 1절에서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일렀습니다. 또 7~12절에서는 땅이 비를 빨아 들여서,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줘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아서 불에 타고 마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믿음과 인내로 열성을 다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시는 일을 할 때, 거기서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할 것은 물질의 복 그 이상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로 돈이 없다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돈이 없으면 많은 불편을 겪습니다. 불편을 겪는다고 결코 불행하다 할 수 없는 것이 작년(98) 말에 발표된 통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영국의 한 교수가 작년에 54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했는데, 방글라데시가 1위를 차지하는 등 가난한 나라들이 상위권을 휩쓸었습니다. 반면에 미국(46위)과 일본(44위) 같은 선진국들은 하위권으로 처졌습니다. 우리 나라는 중간쯤인 23위로 나타났습니다. 이 조사결과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잘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 중에 의외로 불행한 사람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자들은 돈의 노예이지 주인은 아닙니다. 돈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항상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부리는 한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은 현명한 사람에게만 행복을 가져다주지, 돈이 바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동안 우리 나라는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그 결과 가난을 벗기는 했지만, 잃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팽배한 물질만능사상, 모든 게 돈으로 통하는 한심한 사회, 삭막한 인간관계, 황폐해진 환경, 등등 너무나 잃은 게 많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고 고난도 달게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복을 받게 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올바른 신앙으로 진정한 복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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