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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27
바울의 '~로 말미암아' 신앙[롬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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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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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흑암이 있는 곳에 빛을, 무질서한 곳에 질서를,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있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도 살림의 일을 하셨습니다. 맹인을 고쳐 빛을 보게 하셨고, 죽은 자를 살려 생명을 얻게 하셨고, 병들어 죽어가던 자를 고쳐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교회를 위해서 바울을 불러 일군으로 세우셨는데, 바울도 살림의 일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살펴보려고 하는 바울의 '~로 말미암아' 신앙은 바로 이 살림의 일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13개의 서신에서 '감사'라는 말을 46번이나 하고 있고, 감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 5:18)이라고 말할 정도로 감사생활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바울의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로 말미암아' 신앙입니다. 여기서 '~로 말미암아'는 잘못되어진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말이 아니라, 잘되어진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가 쓴 13개 서신에서 "~로 말미암아"란 단어를 우리말 개역성경을 근거로 94번, "~로 인하여"를 72번, "~의 이름으로"를 8번 사용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를 1번, "성령으로 말미암아"를 4번, "예수로 말미암아"를 1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17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를 13번, "그로 말미암아"를 5번,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를 1번, "주 예수의 이름으로"를 5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로마서 5장 1-11절 안에서만 바울은 "~로 말미암아"란 단어를 6번이나 사용하였는데, '예수로 말미암아'가 5번, "성령으로 말미암아"가 1번 쓰였고, 또 "~로 인하여"란 말을 2번 사용하였습니다.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절: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입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으며,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소망이 부끄럼 당하지 아니하고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로 말미암아' 신앙은 인간이 누리는 복의 근원을 성 삼위 하나님께 두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복을 받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 다름 아닌 감사생활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 또는 "사단의 사자"라고 명명된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이 병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파수꾼이라고 했습니다. 거기다가 시력도 좋지 않았고, 복음과 선교를 위해 선택된 예수의 노예라는 강박관념이 있었으며, 키도 크지 않았고, 이마가 벗어졌으며, 매부리코에 양미간이 맞붙은 모습에 다리까지 휘었다고 {바울행전}에 나와 있고, 언변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으로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뽑히게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감사하는 생활태도 즉 잘된 일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된 일은 내 탓으로 돌리는 감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모든 서신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갈 4:7)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고(롬 5:5),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고전 12:8)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여진다(엡 3:16)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고(롬 5: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롬 5: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고(롬 5:17),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롬 5:2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얻고(고전 15:57),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살전 5: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딛 3:6)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가 받은바 모든 은혜와 복의 근원을 성 삼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런 신앙생활 때문에 바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었고,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울의 '~로 말미암아' 신앙이 신본위의 감사신앙이란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리는 모든 복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선물로 이해하였고, 인간의 착한 행실이나 불굴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고 신앙고백하였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인간의 착한 행실이나 불굴의 노력이 복을 받는데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착한 행실이나 불굴의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복일 가능성이 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철저하게 복의 근원을 인간에다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두는 신본위의 감사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복을 받게된 원인을 인간의 잘난 탓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 탓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의 신앙은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꼭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울이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만 하고 인간들의 착한 행실이나 불굴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나 동역자들에게도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서신들에 보면, 성도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상당히 많습니다. '너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성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롬 1:8)고 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 1:4)고 하였으며,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한다"고 여러 번 말하였습니다(살전 1:2; 살후 1:3, 2:13). 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골 1:3)고 하였습니다. 동역자들이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도 직접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롬 16:4). 이렇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물론 사람에게도 항상 감사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 감사생활이 바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개인적으로 성공을 거두게된 가장 큰 이유라고 확신합니다.
한 가지 더 꼭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울의 감사가 말로만 하는 감사가 아니라, 몸으로 헌신하는 감사였고, 하나님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중의 십의 일 이상을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희생적이었고 얼마나 헌신적인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은 창조신앙입니다. 이 신앙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 네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천국으로 부르시면, 갖고 있던 것 다 그대로 놓고 떠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에 대한 이런 신앙을 갖지 못한 채,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을 주시고, 하나를 되돌려 받기를 원하신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면, 복을 누린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부모가 되었든지, 스승이 되었든지, 기업주가 되었든지, 국가사회가 되었든지, 열을 받고 하나를 되돌려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말은 그만큼 되돌려 주지 못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한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간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인데, 십분의 일이면, 2시간 24분입니다. 일주일이면 16시간 48분이 되고, 한 달이면 72시간 또는 3일간이 되고, 일년이면 876시간 또는 36일간하고도 12시간이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업수완이 좋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만일에 유대인들이 지난 수천 년간 남의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외에도 열을 벌어서 그 가운데 하나를 회당이었든지, 유대공동체였든지, 또는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와 국가였든지 되돌리는 감사의 생활을 했다면, 어떤 결과를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재물 가운데 십분의 일만이라도 사회에 환원시켰다면, 그들은 그 행위 한 가지만으로도 복을 받고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인간생활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열 번 받고 한번만 되돌려 주는 감사생활을 해도 인간관계는 잘 유지되고 돌아갑니다.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성공을 의미합니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잘 돌아가고, 스승과 제자사이도 잘 돌아가고, 기업주와 고용인의 사이도 잘 돌아가고, 기업체와 사회와도 잘 돌아갑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십일조 생활하면 복 받는다는 성경말씀이 하나님을 믿었던 유대인들의 경험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믿습니다. 관계가 잘 돌아가는데 일이 잘되지 않을 리 없고, 복 받지 않을 리 없습니다. 감사생활은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감사하면 한 만큼 혹은 더 크게 되돌아서 내게로 오기 때문입니다. 감사에 투자하는 것은 크게 이윤이 남는 장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97년 6월 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글을 보면, 청소년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짜증나!", "안녕", "으∼악 미치겠다", "졸려…", "자자", "아 죽겠네", "힘들다", "배고프다", "나 어떡해", "몰라"와 같은 단어라고 합니다.
97년 11월 25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글을 보면, 청소년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절반 이상이 폭력, 음주, 약물복용,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충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97년 2월 14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을 보면, 청소년 5명 가운데 1명은 환각제 작용을 일으키는 신경안정제를 비롯해 부탄가스 본드 등의 향정신성 약물을 남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들이 약물을 남용하는 동기로는 호기심이나 친구의 권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평화나 힘, 쾌락 등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97년 8월 22일자 한국일보에 보면, 청소년들이 폭력, 음주, 약물복용,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은 하는 것은 자긍심의 부족 때문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사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감사생활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선생님께 감사하고,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이웃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될 때에 세상이 보다 밝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 주는데서 또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때문에 자신감을 얻게되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뜻과 소명감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이 믿어지지 않는 불신앙으로, 성경은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지 않는 막힌 귀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한없는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마냥 울적해 하고 불평 불만이나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 때문에 추호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같이 항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범사에 잘되고 복을 받게 되었음을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그분에게 돌리며, 또 '부모님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으로 말미암아,' '친구로 말미암아,' '이웃들로 말미암아,' 범사에 잘되고 복 받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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