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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31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1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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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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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예식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이 침례와 성만찬입니다.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 사람에게는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천국잔치의 규모나 음식의 종류나 참여자들의 즐거움이 어느 정도가 될지를 어림잡아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기쁨과 즐거움의 잔치가 매일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 즐거운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고 경험하며, 이 잔치에 초대받은 자로써, 약속 받은 자로써, 인침과 보증 받은 자로써 그 신분을 거듭 확인하는 자리가 지상의 교회에서 갖는 성만찬 예식입니다. 이 성만찬이 갖는 신학적인 의미는 대단히 다양합니다. 그 일부를 두 차례에 나누어 간략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만찬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침례와 성만찬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침례와 성만찬과의 관계는 결혼식과 피로연의 관계입니다. 요즈음은 피로연이 변질되고 말았지만 대부분 모든 민족들은 결혼식 후에 나름대로 거창한 피로연을 베풀어 신랑과 신부와 축하객들이 함께 참여하는 즐거움의 시간을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침례식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혼인식에 해당되고 성만찬은 피로연에 해당됩니다. 다만 지상에서의 이러한 예식들은 장차 있을 거대한 혼인식과 피로연에 대한 약속의 확인과 맛보기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식들이 중요한 것은 우리의 희망이 주의 재림의 때에 있을 거대한 혼인식과 천국잔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배에서의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예배에서의 설교와 성만찬은 상호 보완의 관계입니다. 설교는 영적이고, 성만찬은 육적입니다. 따라서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조화, 곧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비의 조화입니다. 설교와 성만찬의 관계는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되는 관계, 곧 약속과 성취의 관계입니다. 설교가 말로써 이루어진다면, 성만찬은 행동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설교가 청각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면, 성만찬은 미각과 시각과 후각과 촉각을 통해서 인간의 심성에 호소합니다. 설교가 세상을 준비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면, 성만찬은 교회를 준비시켜 세상에 봉사하게 합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스라엘 민중이 가졌던 두 가지 형태의 예배, 곧 회당의 말씀의 예배와 성전의 제사예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예배는 예수의 전 생애, 즉 가장 위대한 예배의 삶이었던 갈릴리 사역과 예루살렘 사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말씀의 예전으로 표현되고,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이 성만찬 예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은 갈릴리 사역이 선행될 때에 비로소 의미가 살아나며, 갈릴리 사역은 예루살렘 사역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의미가 예수의 생애를 통해서 어떻게 연출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기독교 예배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로 성만찬의 시작과 빈번도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성만찬의 빈번도에 관해서는 역사적인 변천의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시간관계상 사도들과 속사도들의 전통에 국한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성만찬 예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출발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신 말씀에서 성만찬 예배는 출발됩니다.
주후 30년 예루살렘교회는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누가는 초대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전하고 있고, 46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성만찬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떡을 떼기 위해서"(행 20:7) 또는 "먹기 위해서"(고전 11:33) 교회에 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의 행각과 각 가정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회당예배와 성전예배에 익숙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말씀 중심의 예배와 성전의 제사 중심의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추방당한 후 독자적으로 예배 예전을 뿌리 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당예배에서 말씀의 예전이 뿌리를 내렸고, 성전예배와 최후의 만찬에서 다락방 예전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 예전이 통합되기 전까지는 초대 교인들이 주로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서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물론 이 때의 성만찬은 아직 공동식사와 성만찬 예배가 확실하게 분리되기 이전의 애찬 형태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가 언제나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를 함께 드렸다는 점입니다.
주후 56년경 고린도교회는 자주 성만찬을 먹기 위해 모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주의 만찬을 질서 있고 성별 되게 행할 것에 대해서 33절에서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의 만찬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 데, 이 모임은 언제나 "안식 후 첫 날"(행 20:7) 혹은 "주의 날"(계 1:10)에 있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후 57년에 드로아교회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안식후 첫날에" 떡을 떼는 모임을 가졌습니다(행 20:6-12). 주님 부활하신 날을 주님의 날로 믿었던 이방인 교회가 '안식후 첫날' 즉 일요일에 모여 성만찬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입니다.
매주일 성만찬은 교부들의 증언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14장 1절은 "먼저 여러분의 과실을 회개함으로써 여러분의 봉헌물을 정결케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 자신의 날에는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감사하십시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예배 때마다 성만찬을 거행했다는 사실은 순교자 저스틴(Justin)의 글 속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저스틴은 그가 쓴 {첫 번째 변증서} 65-67장에서 2세기 중반의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성서를 봉독하고, 집례자로부터 설교를 듣고, 모두 일어서서 기도한 후에, 집례자에 의해서 빵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를 행하였다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 4세기까지 신자들이 참여하는 매주일 성만찬을 엄숙하게 거행하였습니다.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논문 "기도에 관해서"(On Prayer) 19장에서 말하기를, 금식 중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만찬을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동방교회의 교회법(Canon) 28조에 의하면, 성만찬을 "삼 주간을 거른 자는 파문 당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341년에 열린 안디옥 공의회에서는 "교회에 출석해서 봉독된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와 성만찬에 참여치 않는 자들은 그들의 회개가 공개적으로 입증될 때까지 교회로부터 파문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400년에 열린 제 1차 토로우제 공의회(Council of Tholouse)에서도 "설교를 들은 후에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발견되면 경고해 줄 것이요, 만일 경고를 받고도 그래도 받지 않으면 그들은 출교되어질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성만찬의 유익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만찬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삶의 방식,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을 터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서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정신을 성만찬을 통해서 배우게 되고, 인간의 행복한 삶과 인간답게 사는 길과 참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됩니다. 또 인간 구원의 문제는 관계성의 회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인간끼리의 관계회복, 자연과의 관계회복은 오직 십자가의 자기부정과 희생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침례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단회(單回)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거듭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둘째, 성만찬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조건인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이 연대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사람과 사람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성육신 하심으로서 자기를 포기하셨고, 인간들과 동일화 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시대에 소외당하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과 세리 또는 창녀들과도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시며, 가난한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셨고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본을 보여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그 정신을 본받도록 성만찬을 행하여 지킬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침례를 수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연대하는 결속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 또는 하나님과 화목(연대)하는 일회적 의식으로 본다면, 성만찬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 즉 화해와 나눔과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인간끼리의 공동체의식을 넓혀 가며, 자연과도 연대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성만찬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이는 성찬을 받지 못합니다. 성만찬은 침례를 받고 구원에 동참한 자가 복음의 진수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을 믿고 있는지를 저울질할 수 있는 시험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성만찬은 신앙의 신비를 선포합니다.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성찬을 받는 자의 신앙의 힘이 함께 작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넷째, 성만찬은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고, 성(聖)과 속(俗) 곧 교회와 세상을 구별합니다. 이 엄격한 구별이 교회를 구성하게 하는 것이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이 세상을 준비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성만찬은 교회를 준비시켜 세상에 봉사하게 합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봉사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것을 결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화목제물이 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부여받았음을 상기합니다.
다섯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요 6: 51)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에 교회가 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은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부탁하신 성례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침례를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침례를 받음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응하여 살아가도록 권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침례와 성만찬의 관계를 칭의와 성화에 대비해 볼 수 있습니다. 칭의는 순간적인 구원, 성화는 점진적인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설교와 성만찬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예배는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선취적인 기능을 갖습니다. 설교의 현재성과 성만찬의 미래성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현재종말과 미래종말의 긴장관계와 같습니다. 이 때문에 설교가 없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누구도 끌어내릴 수 없는 영광의 보좌 속에 이미 앉아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게 하고," 설교만 있고, "성만찬 없는 예배는 교회로 하여금 아직 주님의 기도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교회는 아직도 어둠 속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을 쉽게 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체험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출범된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이런 중요성을 인식하여 교회는 신자들에게 자주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어야 합니다. 순복음 교회가 한 달에 한 번씩 성만찬을 시행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의 교회도 자주 성만찬을 시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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