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작성일 : 02-09-14 17:02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마3:1-12]
|
|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436
|
성경은 예수를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 부르는데, 예수는 이름이고, 메시아나 그리스도는 직책을 말한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이 직책은 매우 독특하고 특이한 것으로서 이 직책을 가진 자는 왕과 대제사장과 예언자의 직책을 모두 수행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사이에 서서 신의 뜻을 받아 인간에게 전달하며, 신의 뜻을 따라 인간을 다스리며, 신과 인간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한다. 성경은 예수가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작은 메시아 또는 작은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일컬어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였다. 이런 성서적 입장에서 우리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인' 또는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 또는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예언자와 왕과의 다른 점을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왕이 한 나라의 통치자로써 평화롭고 정의로운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헌신할 때에 예언자는 왕의 독재와 횡포를 견제하는데 헌신한다. 사무엘하 11-12장을 보면, 다윗이 왕의 권력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더불어 부정한 행위를 하였고, 아이까지 배게 하였다. 그러자 다윗은 꾀를 내어 전선에 나가 싸우고 있는 우리아를 불러 휴가를 주어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우리아는 끝내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윗에게 설명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임금님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삼하 11:11)." 그러자 다윗은 이 충성스런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장세워나가게 한 다음 군사를 후퇴시켜 전사하게 하였다. 이 때 예언자 나단은 주저 없이 다윗을 찾아가 그의 야비한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그러나 왕은 강한 권력을 가진 반면, 예언자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는 점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가운데는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를 대변하고 권력자의 횡포를 견제하기보다는 강자의 편에 서서 강자를 대변하고 약자를 억압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예언자와 제사장의 다른 점을 간단하게 살펴보겠다. 제사장이 평화에 종사할 때에 예언자는 정의에 종사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얻어야 할 것은 평화나 정의 어느 한쪽이 아니다. 평화도 얻고, 정의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평화 하고자 하면 정의가 희생되고, 정의하고자 하면 평화가 희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장은 평화에 비중을 두게 되고, 예언자는 정의에 비중을 두게 된다. 그런데 정의는 선과 악 사이에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선이면 선, 악이면 악이지 선악사이에 중립지대란 없다. 예언자란 다름 아닌 선에 서서 악을 저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제사장은 사랑으로 죄를 감싸안는다. 허물을 탓하기보다는 허물을 용서한다.
부모로서의 그리스도인 또는 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때로는 예언자처럼 때로는 제사장처럼 정의롭고 평화롭게 교육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자녀들에게 예언자로서의 부모상을 너무 깊게 심으면 비판적이 돼서 포용력이 떨어진다. 그 반대로 자녀들에게 제사장으로서의 부모상을 너무 깊게 심으면 비판의식이 떨어지게 돼서 정의로운 시민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측은지심과 사양지심과 아울러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을 가르쳤던 것이다. 측은지심과 사양지심은 제사장적 삶의 패턴이고, 수오지심과 시비지심은 예언자적 삶의 패턴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를 보자. 예수는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먹을 것을 주셨으며,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러나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담대하게 지적하셨고, 비판하셨다.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갈아준 지 오래된 어항의 물처럼 썩게 된다. 물이 썩게되면 산소가 부족해져서 고기가 살 수 없다. 그 반대로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오염된 강물을 걸러 소독한 수돗물처럼 불신이 커진다. 수돗물은 소독된 물이지만 아무도 수돗물을 신뢰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이와 꼭 같다.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불신이 커지고,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으면 썩어 냄새를 뿜기게된다.
셋째,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살펴보겠다. 온건파 가운데는 이념을 악이라 말하고, 그 반대로 이념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는 중립을 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건파를 일컬어 회색분자 또는 비들기파라고 한다. 한편 비들기파는 흑백논리나 정의론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매파라고 한다.
공동생활을 꽤 오래한 사람들을 보면 정의에 약하고 평화에 강한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공동생활의 계급적인 역학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져서 불편을 겪기보다는 불의라 할지라도 차라리 눈감아 줌으로써 평화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또 공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단체경기에는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신념이 강한 반면, 개인적으로는 이기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기고 불편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져주고 말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공동생활에서는 튀어도 안되고 못나도 안 된다는 역학 때문에 획일적이고 유니폼적인 인격형성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게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공동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승부욕이 매우 약하다. 공부를 잘하거나 선생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게되면 반대급부로 동료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구나 농구시합은 이기지 않을 수 없는데 비해서 탁구나 개인이 하는 게임은 이기는 것이 왠지 불편하다.
공동생활에 있어서 온건과 중용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반드시 이겨야할 게임을 포기하거나 불의를 보고도 피해가려 한다면 문제가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의 앞에서는 중립이 허용되지 않는다. 선이면 선, 악이면 악이지 선악사이에 중립지대란 없다. 그래서 예언자는 평화를 지키려하기보다는 차라리 정의를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의 삶은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잘못을 지적 당하고 달갑게 생각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좋다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예언자의 삶은 험난할 수밖에 없다. 예언자였던 예수의 삶을 보자. 그분의 삶은 떠돌이의 삶이었고, 빈털터리의 삶이었고, 배신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삶이었다. 예수는 예언자로서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유대 종교인들과 정치인들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대항하였다.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귀중한 도구였던 율법과 전통에 도전하였고, 성전과 안식일 예배에 도전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가진 자들을 편드는 것이었고, 그들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지키기 힘겨운 멍에였다. 그러나 예수는 예언자로서 힘있는 자들을 대변하는 중심부의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힘없는 민중을 대변하는 주변부의 자리에 섰다. 그 대가가 바로 정처 없는 떠돌이의 삶이요, 빈털터리의 삶이요,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세례 요한을 보자. 세례 요한은 집도 절도 없이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유대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예언자였다. 중국의 여숙간이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것은 타락한 선비도 다 할 수 있지만, 때의 되어 감을 아는 것은 뚫린 선비가 아니고서는 못한다. 또 때를 아는 것은 누구나 보기만 하면 할 수 있지만, 되어 가는 것을 아는 것은 앞을 내다보지 않고는 못한다."고 하였다. 예수나 세례 요한이 위대한 예언자였던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옳고 그름을 알고, 때의 되어 감을 알고, 되어 가는 것을 안 선견지명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나 세례 요한은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새로운 세계의 삶을 선포하였고, 새롭고 정의로운 시대를 여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타락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것이며, 심지어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의 불륜까지 지적하였다. 예수도 헤롯 안디바를 '여우'라 일컬으며 말하기를,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눅 13:32)고 하였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예수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세례 요한은 사해 동쪽 마캐루스성에 갇혔다가 목이 잘리는 극형을 받았다.
정의를 외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죽기를 각오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이요, 배고픔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이요, 비난을 각오하지 아니하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불의를 보고도 나서지 못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요, 직장 상사의 부정을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배고픔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해보면, 정의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불의의 편을 들면서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은 살아남기 위한 자신들의 비겁한 몸부림을 감추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용기가 없이는 정의에 편에 설 수가 없다. 정의의 편에 선 자들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결정이 느리고 결집력이 약한 반면, 불의의 편에 선 자들은 항상 더티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결정이 빠르고 결집력도 강하다. 그래서 사필귀정이라든지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든지 하는 결론에까지 도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되고, 그 동안 정의의 편에 선 자들은 상당한 고통을 겪게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정의에 편에 선 성도들에게 인내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역사를 읽을 줄 알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았다는 강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비로소 정의의 편에 설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힘든 상황에서 견뎌 낼 수가 없다.
성서시대의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은, 첫째, 삶의 해석자들이었다(히 13:8). 그들의 삶은 고백적이었다. 그들은 삶 속에서 마찰되고 발생되고 파생되는 모든 사고 사건들을 우연이나 숙명으로 보지 않고, 재수나 운수로 해석치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고 풀이하였다. 주변의 생활 속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섭리와 사역으로 보고 또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사건으로 보았다.
둘째, 그들은 성경의 해석자들이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출애굽 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시내산 계약과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해석함으로서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을 촉구하였다.
셋째, 그들은 시대의 해석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구원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절망 중에서 동터오는 여명을 보았으며, 미래에 관한 환상을 보았다. 이사야는 잘려버린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돋는 환상을 보았으며(사 6:13;11:1,10), 에스겔은 골짜기에 쌓인 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환상을 보았다(겔 37:1-10).
예언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자신의 삶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시대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만이 거짓 예언자가 되지 아니하고 참 예언자가 될 수 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