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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4 16:50
조선 천주교인들의 순교영성(1)[히10: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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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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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교회는 그것이 유대교가 되었던지, 기독교가 되었던지 언제나 물리적인 총칼의 박해와 이단의 거짓진리에 맞서야 했다. 그래서 성경 66권에는 물리적인 박해와 거짓진리로 인해서 성도들이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권면하는 내용과, 바른 신앙을 변호하는 내용이 참으로 많다. 또 성경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발전하는데 필수적인 예배와 교육, 조직과 치리를 위한 내용도 많다. 특히 신약성경은 이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가 유대당국과 로마당국으로부터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했던 이단자들의 도전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선교 역사 200년이 넘는 천주교가 되었든지, 선교 역사 100년밖에 안 되는 개신교가 되었든지,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도 여러 차례 총칼의 박해와 거짓진리에 맞서야 했다. 따라서 가혹한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조선 기독교인들의 순교역사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에 정신적 또는 문화적인 면에서 세속의 온갖 유혹들을 받고 사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고 이웃에게 사랑과 복음을 증거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신앙을 탄압하는 박해세력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남의 나라에 국가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에 다른 신을 섬기는 점령국이 박해세력이 되는 경우가 있고, 둘째는 국가의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박해세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는 알렉산더가 세운 헬라제국 시대에 셀류키드(seleucid) 왕조가 유대교를 가혹하게 탄압한 적이 있다. 자신을 신이라고 불렀던 안디옥쿠스 4세는 예루살렘성전을 약탈한 후 제우스에게 제사를 바치게 하였고, 유대교의 모든 종교의식을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이 박해 때에 유대인들의 정치 또는 종교집단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등이 생겨났고, 이들이 유다 마카비의 지도아래 게릴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만 삼 년만에 예루살렘성전을 탈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자국의 왕인 아합과 그의 부인 페니키아 사람 이세벨로부터 바알신 숭배를 강요당하며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때에 설상가상으로 삼 년 육 개월간 가뭄이 지속되어 광야 굴에 숨어서 바알신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끝까지 야훼신앙을 지켰던 칠 천명의 신앙인들과 엘리야는 가장 참기 어렵다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겪어야 했다.
신약시대에는 국적을 초월해서 기독교인들이 대제국 로마로부터 대략 300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서 큰 박해를 받았다. 이 때에 기독교인들은 황제와 로마신들을 섬기도록 강요당하였고, 이를 피하여 지하무덤 카타콤에 숨어 살았고, 더러는 체포되어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에도 박해세력은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났다. 첫째는 일본이 황제와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이를 반대했던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다. 이 때에는 주로 개신교 교인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는 조선왕조가 103년 동안 천주교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오랜 박해는 정권을 쥔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받아드린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때로부터 천주교는 몹쓸 종교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순교역사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다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때로부터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03년에 이르는 이 기간에 천주교인 1만 여명이 순교하였다. 둘째는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되기까지 40년간 받았던 일제의 탄압과 해방이후 공산군의 남침 기간을 말한다. 이 기간에 개신교에 속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였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과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던 1938년 이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참혹한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1919년 10월 장로교 총회에 보고된 장로교회의 3·1만세 사건의 피해상황하나만 보더라도, 체포된 사람이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가 134명, 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서 수감된 사람이 202명, 사살된 사람이 41명, 보고된 날짜에 수감 중인 사람이 1,642명, 매 맞고 죽은 사람이 6명, 그리고 소실된 교회가 12개였다. 또 감리교회의 경우 만세 시위가 막바지에 이른 1919년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군경 한 때를 인솔하여 현재 삼일운동순국유적비가 세워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나타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인 주민들을 그 곳 감리교 예배당에 다 모이게 한 뒤, 군경들로 하여금 집중사격을 가하게 했다. 그들은 또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만행으로 교회 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교회 밖으로 뛰쳐나와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그들은 어린아이까지도 칼로 찔러 죽었다. 그들은 이와 비슷한 만행을 현재 삼일운동순국기념비가 세워진 인근 수촌리 부근의 기독교인들이 사는 동네 열 다섯 군데에서도 저질렀다.
그런데 1919년에 있었던 교회와 교인들의 피해는 신앙보다는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앙으로 인한 박해는 독립만세사건이 있고 난 뒤, 더욱 강화된 신사참배에서 비롯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평양신학교가 폐쇄 당했고, 2백여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 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당한 박해는 2천년 전 초대교회가 황제숭배로 인해서 로마제국에 당한 박해와 같은 것이다.
6·25때, 공산군의 만행으로 인한 기독교의 피해는 초기 천주교인들이 당한 박해와 성격이 같은 것이었다. 조선당국이 기독교 자체를 이단시하여 박멸하려고 했던 것인 만큼,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종교를 마약으로 간주했던 공산군들이 유물론 사상에 입각하여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사살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우리 민족의 기독교 순교역사를 보면, 대제국 로마로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앙 때문에 받았던 그 무서운 박해에 못잖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경이 그 시대의 고난 당하는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 이상 먼저 복음의 씨를 뿌렸다.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 1885년인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교회를 시작한 것이 1784년이다. 하나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승훈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1592-98) 때에 일본에 끌러간 조선인들 가운데 천주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후 일본을 지배한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기독교를 탄압할 때에 순교자의 명단에 이름을 남긴 조선인 신도가 21명이나 되고,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던 조선인이 25명에 이른다.
이 땅에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개신교가 태동한 17년 후인 1534년에 스페인에서는 이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예수회를 조직하여 세계로 선교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가 1549년 7월에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하여 일본의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기독교를 전하였고,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침공하기에 앞서 오오사까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말하기를, "명나라와 조선을 정복한 후,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믿게 하겠다"고 장담할 정도로 선교에 성공을 거두었고, 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그 일행이 중국 광동성에 도착하여 검정색의 신부 옷을 벗고, 삭발을 하고, 회색의 승려복으로 갈아입고 부두에 내린 것이 1583년 9월이었다. 중국에 내린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중국 경전의 연구였다. 중국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묻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함이었다. 교리가 한 나라의 전통사상에 위배되지 않아야 하고 또 그들의 논리에 부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진보적이었던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럽의 과학적 학문까지 중국에 전달하였는데, 중국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었던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중국을 통해서 서학과 천주교를 받아드린 것은 매우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로부터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100년이 넘게 받았던 탄압은 기독교 역사상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에 자랑할만한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조선 땅에 천주교 복음을 들여오고 교회를 세운 것이 선교사가 아닌 조선선비들이었다는 점이다.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조선 땅에 개신교 복음을 들여오고 교회를 세운 것이 선교사가 아닌 선비출신의 조선인 보따리 장수들이었다. 둘째는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선혈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셋째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래가 드문 빠른 성장을 하였다는 점이다. 넷째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신앙영성이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의 뛰어난 신앙영성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첫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다. 경북 상주시 청리면 삼괴2리에 있는 재실 마을에 1890년 중반에 세워진 신앙고백비가 있다. 이 신앙고백비는 높이 1.27미터, 폭 39센티미터, 두께 22센티미터의 크기로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신앙고백비의 특징은 조선사람의 모습인 모자, 얼굴, 그리고 몸통의 세 부분으로 구별된 데 있다. 얼굴 부분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었고, 그 위에 조선인의 갓을 씌웠다. 김삼록이란 신앙인이 세운 이 신앙고백비는 얼굴 부분인 십자가 중앙에 '천주'(天主)라고 크게 쓰고, 몸통 부분 상단에 '천주성교회 성호십자가'라 쓰고, 그 아래에 첫째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들어 모시고, 둘째, 셋째, 넷째는 성직자들을 직위별로 차례로 위하고, 마지막 다섯째는 교우를 위한다고 적고 있다. 오직 하나님과 교회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이다.
둘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교인들은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황일광이란 백정출신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보냈다. 그런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교인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대우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농담조로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다. 또 윤권명이란 사람은 예수를 믿고, 종들을 모두 풀어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셋째, 조선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팔, 다리, 머리를 잘라 전국 각지에 보내는 육시형을 1801년에 당한 전주 지방의 순교자 유항검의 처 신희는 배교하고 목숨을 건지라는 관리에게 "기독교는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남편이 그로 인하여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 있으면서 섬기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빨리 죽기를 원할 뿐이다."라고 했고,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의 처 이육희는 "국법이 비록 엄하지만 기독교도 소중하다. 살기를 꾀하여 배교하기보다 순교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유항검의 조카 유중성 역시 "죽기를 원할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과 이순이 부부도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이순이는 유중철과 결혼하였으나 4년간을 부부생활 없이 정결하게 지내다가 참수형을 받았다. 그녀는 망나니 앞에서 매우 침착한 자세로 웃옷을 벗었고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머리를 도끼 밑에 놓았다고 한다.
1866년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를 당했던 프랑스 신부 다블뤼 주교의 증언에 의하면, 젖먹이가 딸린 여인들이며 노인과 처녀들이 말씀을 듣고 성례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그만 선물을 손에 들고 다블뤼 주교가 거주했던 충남 합덕에서 가까운 신리교회로 3일, 6일 또는 8일씩 걸어서 찾아갔다. 그들은 잡히면 죽게될 죽음을 무릅쓰고, 머나 먼 산길을 발이 붓고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는 것과 혹심한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찾아갔다. 가서는 밤이 맞도록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결코 그만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기독교는 사교로 단정되었고, 국가정책은 사교를 말살하고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 때문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믿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했던 믿음의 조상들은 단 한번의 예배를 위해서 멀고 험한 산길을 남몰래 숨어서 걸었던 것이다. 그들이 당한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나 시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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