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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5 23:07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욥23:1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770  
성서 66권은 고난과 승리, 다시 말하면, 노예와 해방, 포로와 자유, 또는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주제로 엮어져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수치와 죽임을 당함과 같은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뵙고 승리한 삶의 이야기들로 엮어져 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말을 전 현대 그룹 회장 정주영씨가 했는데 이 한마디 말이 바로 기록된 성서 66권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시련과 승리,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운명이다.
이름 있는 목회자들 대다수가 예수 믿으면 마치 고난은 없고 축복만 있는 것처럼 설교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누구 나가 반드시 겪게 되는 시련이 죄악시되고 있고, 물질적인 부가 축복의 대명사로 둔갑을 했다. 물질 만능화의 풍토가 신앙세계를 잠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서양의 물질문명이 동양의 정신문명을 잠식하는 현상이기도하다. 일찍이 우리민족은 물질적인 부유보다 청빈에 가치를 두고 살아왔다. 이러한 미덕이 서구의 물질문화로 인해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고, 고상했던 우리 동양인의 이성이나 정신세계는 점차 본능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다.
성서가 물질축복을 절대로 미화시키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만일 성서가 축복을 말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자들이 시련 후에 얻게될 축복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축복만을 말하지 아니하고 고난과 함께 축복을 말한다. 성서의 주제가 고난과 승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서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롬 8:17)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고, 수치와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있다.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절망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영원한 실패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승리하기로 약속되어 있고 반드시 승리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로서 승리하셨다. 마찬가지로 그 분을 따르는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반드시 이기게 된다. '최후의 승리,'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서적인 가르침을 설사 알고 있다할지라도 또 신앙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막상 심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게 되면 견디기 어려운 갈등을 겪게 된다. "하나님, 너무해요, 왜 내게만 이러한 시련을 주시나요? 하나님, 억울해요"라고 투정할 수밖에 없다. 믿음생활을 충실히 행한 사람일 수록 이러한 갈등이 더 심하고 원망도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욥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성실하게 살아 왔는데 축복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참담한 일을 당한다면 이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오,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교훈은 무엇인가? 크나 큰 시련을 겪었던 바울이나 욥의 고백은 무엇이었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바 소망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통해서 단련하신다고 말했고, 욥은 순금을 뽑기 위해서 광석을 뜨거운 용광로에 녹이고 단련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갈 길을 미리 아시고 시련을 통해서 자신을 단련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엄청난 고생과 역경을 이기고 체력과 기술을 단련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여 메달을 얻는 것과 같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의 말씀에서, 메달을 다투는 선수가 모든 일에 절제하는 것같이 자신도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련과 훈련은 메달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서정주의 시 가운데 [국화 옆에서]가 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꽃피기까지 봄에는 소쩍새가 울고, 여름에는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가을에는 된서리가 내리듯이, 우리의 꿈이 꽃피우고 우리의 희망이 결실하기까지 잠 못 이루는 10대 때에 소쩍새의 눈물과, 장래가 불확실한 20대 때의 천둥과 먹구름 같은 고생과, 불안정한 30대 때의 된서리 같은 역경이 있고서야 비로소 불혹의 40대 때에 온갖 풍상과 역경을 딛고 넉넉하고 안정된 누님과 같은 완숙함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이 시는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 반드시 신앙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 시련을 통해서 오는 갈등과 고민은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시련을 통해서 성숙하기 때문이다. 약이 입에 쓰지만 몸에 이로운 것처럼, 현실적으로 십자가는 무겁고 힘든 것이면서도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류의 죄사함의 복음이 나왔고, 온 인류의 소망인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고난은 성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박해와 시련 속에서 언제나 더 크게 성장해왔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곤 했다. 그러므로, 고난을 아픔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난을 성숙을 위한 도약판으로 이용해야 한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고난에도 많은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이 죄의 삯이라는 점에서 고난은 죄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픔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픔을 통해서 옳고 그릇된 것을 배우며,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손을 데고 나서야 불의 무서움을 배우게 되고, 바늘에 찔리고 나서야 그 아픔을 알게 된다. 모든 병이나 사고가 반드시 당사자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으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고난이 죄에서 기인된다는 것이 성서적인 가르침이며, 인간의 타락이 없었던들 생로병사의 인생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고난이 왔다는 가르침은 범죄를 억제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과음과 과속운전은 윤리적으로나 교통법규상 죄에 해당된다. 과음은 피로와 두통을 가져오며, 금전의 낭비는 물론이요, 가족에 소홀히 함으로서 기인된 애정결핍과 같은 많은 고통을 유발하며, 과속운전은 재산피해는 물론 살인 및 자살행위까지 초래하여 많은 고통을 유발케 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말하기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러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다(약 1:14-15). 근본적으로 인간은 누구 나가 범죄의 가능성과 쾌락의 유혹 속에서 살아가지만, 뒤따르는 고통과 시련이 있다는 경험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와 쾌락의 유혹을 뿌리치며 살게 된다.
둘째, 고난은 축복을 기약하는 연단이며, 그 정도나 시간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이 무한정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감당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막힘의 위기 속에는 반드시 트임의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였고,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다."(고후 4:17)고 하셨다. 욥이 시련 후에 전보다 두 배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고난은 축복에 대한 시샘과 같은 것이며, 햇살이 있기 위해서 한바탕의 비바람과 천둥이 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소나기를 맞은 식물은 더욱 푸르게 자란다.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고난은 소나기처럼 지나가기 때문이다. 소나기 몇 번 맞고 나면 모든 것이 싱싱해진다. 계시록이 고난의 기간을 매우 짧은 기간인 삼 년 반으로 표시하고 있는 반면, 축복의 기간을 무려 천년으로 표시하고 있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셋째, 고난은 영적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은 잠시 살다가는 장막이요, 영원한 처소가 예비 되어있다는 소망을 저버리지 않게 되며, 고난을 통해서 또한 이웃의 고마움을 알게 되며, 서로 돕고 의존하는 이웃사랑의 필요성을 깨우치게 된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되고, 사랑을 몰랐던 사람들이 사랑을 알게되고, 강퍅한 사람이 회개하여 주께 돌아오며,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남을 인식하는 새 삶을 찾게 되기도 한다. 특별히,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식어 가던 사람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그 분의 한없는 축복을 체험하게 된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갈릴리 호수에서의 풍랑진압 설화는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초대교회의 위태로움과 세상의 박해를 묘사한 이야기이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는 교회를 상징하는 노 젓는 아주 작은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어느 때라도 덮치기 위해서 풍랑과 바람을 동반한다. 이 배 안에는 능력의 주님, 풍랑과 바람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동승하고 계신다. 배는 언제나 호수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게 되든지, 저 편에서 이 편으로 건너게 된다. 이는 요단강 건너 가나안 복지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게 된다. 그러나 가야할 길이 있다. 이 때 제자들은 주님을 깨워 도움을 청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해야 할 일이 바로 주님을 불러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풍랑이 없고 바람이 잔잔할 때에는 주님을 잊기 쉽다. 인간의 관심밖에 계신 주님은 낮잠이나 주무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잊혀져 가는 주님을 찾게 만들어준다. 그 분의 존재를 인식할 기회를 준다. 그 분에 대한 새로운 헌신과 신앙의 결단을 갖게 해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구원에 이르는 고통'이란 제목의 회람서신에서 "고통 속에는 신비한 치료의 능력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이 신비의 치료능력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고난을 승리로 바꾸는 신앙인이 되어야한다. 고난을 당하여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자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시련을 딛고 자기 성숙을 꾀하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련은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 시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련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