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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9-14 17:01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인[벧전2:9]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354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사람들이다. 또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한 선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존재로 인정하신다면 이보다 더 유쾌하고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혹시 자기자신을 왕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정말 왕처럼 행동하는 사람이다. 생각만 왕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도 왕처럼 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왕이 아니겠는가? 진짜 왕으로써 왕처럼 살지 않는 사람 있겠는가? 모든 왕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왕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왕 노릇할 줄 아는 사람만이 정말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 죄를 지음으로 사망이 자기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자기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롬 5:17, 21). 또 계시록에 보면, 부활에 참여하여 복을 받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계 20:4-6).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가운데 필자를 포함해서 과연 왕 노릇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반성과 함께 어떻게 사는 것이 왕 노릇 하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왕 노릇을 못하는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왕은 참으로 자유 하지만 홀로서야 한다. 외로울 때가 참으로 많다. 98년에 큰 인기를 얻었던 KBS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잘 반영되었지만, 참으로 자유한 자와 참으로 권력을 손에 쥔 자는 외롭다. 따라서 왕이 갖추어야할 덕목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옳은 일에 홀로 설줄 알고 홀로될 줄 아는 것이다.
예수를 만 왕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빌라도가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말이 옳다."(막 15:18)고 하셨다. 그리고는 철저하게 홀로 서셨다. 삼 년간이나 따랐던 제자들도 버리고 떠나갔다. 그렇게 귀찮게 쫓아다니던 민중도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는 인류를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홀로 죽음의 길을 걸었다.
구상이 1974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글 가운데 '그분이 홀로서 가듯'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 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또 왕은 참으로 자유 하지만, 옳은 결단을 내려야 하며, 대의를 위해서 살아야 하며, 옳게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다스림의 기본은 자기자신이다. 그 다음이 가정이다. 그 다음이 국가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오르내릴 때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거울이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거울을 들어다 본다. 필자도 매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거울을 들어다 본다. 거울을 보면서 때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저기 거울 안에 있는 사람 누구야? 거 대개 못생겼네!" 물론 나 자신을 보고하는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 만은 아닌지 때때로 거울에 가래침이 묻어 있는 것을 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침을 배트며 저주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순간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거울을 보면서 쓱 한번 웃으면서 왼손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쭉 뽑아 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어. 잘될 거야." 혹은 "하나님은 정말 멋진 분이야."
이 두 가지 생각과 행동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왕 노릇 하는 자세라 생각하는가?
어느 날 공자가 하급관리로 있는 조카 공멸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 자리에서 일하면서 얻는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인가?" 공멸은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은 것은 세 가지입니다. 일이 많아서 공부를 못했고, 보수가 적어서 친척 대접을 못했으며, 공무가 다급해서 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 후 공자는 공멸과 같은 벼슬을 하고 있는 제자 자천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자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배운 것을 실행해보니 배운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고, 보수를 아껴 친척을 대접하니 더욱 친숙해졌고, 공무의 여가를 친구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이 두 가지 생각과 행동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왕 노릇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날 10개 나라의 대표들이 배를 타고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섬을 향해서 떠나게 되었다. 배는 항구를 벗어나 먼 바다에 이르자 물이 스며들고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 물이 스며든 이유는 선장이 정원을 무시하고 세 명을 더 태운 때문이었다. 그들이 탄 배의 수용 인원은 7명뿐이었다. 이대로 라면 얼마가지 못해서 모두가 물귀신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세 명만 배에서 내린다면 나머지 일곱 명은 살 수 있다.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누가 양보해 줄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여러분 저는 대영제국의 국민입니다. 제가 신사도를 발휘해서 배에서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맨 먼저 다이빙을 해서 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다음 타자로 누군가가 나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미국에서 왔습니다. 세계 최대 강국의 국민인 제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 사람도 물 속에 뛰어 들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그리고 나서 갑자기 옆에 있던 일본 사람을 "이 놈의 쪽바리새끼."하면서 물 속에 밀어 넣었다.
이것이 작금에 우리 나라에서 일고 있는 직장에서의 구조조정의 형태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진정으로 왕 노릇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은 비겁하지 않아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기를, "비겁한 자는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고 했다. 예수도 마가복음 8장 35절에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했다.
요즘 또 갑자기 학원에서는 이지매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매맞는 학생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자주 발생되고 있다. 98년 6월 1일에 강원도 태백에서 십대 5명과 이십대 1명이 말을 듣지 않는다며 10살 짜리 초등학생의 몸에 문신을 새기고 담뱃불로 지지는가하면 땅을 파고 매장했다가 꺼내 준 사실이 경찰에 적발됐다. 또 울산 화봉중학교에서는 같은 반 학생의 이지매를 견디지 못해서 이재선(14) 학생이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군을 죽게 한 학생은 이군의 목, 얼굴, 머리를 몽둥이로 때리고 수돗가에서 물고문을 했고, 책과 체육복 등 모든 준비물을 이군에게 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장실에서 허리띠로 마구 때렸으며, 사탕을 사오라고 해놓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15분 안에 봉지 채 다 먹으라고 시켰으며, 22차례에 걸쳐 153만원을 뜯어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힘있다고 남을 해치는 일은 결코 왕 노릇이 아니다. 자신을 망치고 남을 망치는 끔찍한 범죄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비겁한 사람들이다. 남을 해치려드는 사람만큼 비겁한 사람은 없다.
유교에서는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수치, 더러움, 욕심을 억제하고 남을 불쌍하고 가련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정의의 마음, 사양할 줄 아는 겸손의 마음,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진리의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왕 노릇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본능이나 욕망을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왕 노릇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말씀처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생활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왕 노릇할 줄 아는 사람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왕비병 엄마가 키우는 공주병, 왕자병 아이들'이다. 이런 병리현상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첫째, 귀족형이다. 서울에 있는 어떤 유치원은 자연실습 시간에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주고 화단에 꽃씨를 뿌리게 했다가 몇몇 부모들에게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 우리 애가 피아노하는 거 아시죠? 그래서 저는 아이 손에 찬물도 묻히지 않아요. 아무거나 만지다가 손이라도 다치면 어떡해요. 선생님 다음부터 우리 아이는 그런 거 좀 빼주세요."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선생님 알기를 자기 집 가정부쯤으로 안다는 것이다. "선생님, 물 좀 주세요. 선생님, 저 점심 안 먹을래요. 피자 시켜주세요." 그런데 이런 귀족형 아이들에게는 집밖에서 받는 대우가 집안에서 받는 대우와 다를 때 느끼는 상실감이 커서 자칫 정신과적인 치료를 필요로 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둘째, 네로 황제형이다. 과거 교사였던 주부가 동네 목욕탕에서 버릇없이 구는 여섯 살 남짓한 아이를 나무랐다가 오히려 그 아이에게 뺨을 얻어맞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40대 초반의 이 버릇없는 아이의 엄마는 전혀 이 일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목욕에만 열중하더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여인은 40이 다 돼 얻은 아들이라 귀하게 키운다며 어떤 일에도 매를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네로황제형의 아이들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폭군이라고 한다. 행여 엄마나 주위사람들이 체벌을 가하면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서 자지러진다고 한다.
셋째, 이멜다형이다. 필리핀의 이멜다는 사치로 악명 높은 여성이다. 이멜다처럼 사치품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부모들은 여자아이의 경우 귀를 서너 군데 뚫어 반짝이는 14금 귀걸이를 서너 개씩 걸어주거나, 사시사철 드레스 복장으로 동화 속의 공주처럼 키우며, 남자아이의 경우 머리는 무스로 빗어 올리고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까지 세트로 입혀 아이를 광고 모델처럼 키운다. 그런데 문제는 활발한 신체놀이를 통해서 표현력을 키워가야 할 시기의 아이들이 입은 옷 때문에 마음대로 뛰어 놀지를 못해서 점차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또 부모가 모든 것을 선택해 주는 경우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표현력이나 적응력이 뒤떨어지게 된다.
넷째, 찰스 황태자형이다. 특권층의 부모나 또 특권층을 동경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특수계층에 어울리는 여가활동을 시키거나 무조건 일류를 고집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도 취미활동보다는 골프나 승마, 외국 여행 등 값비싸고 호사스러운 활동이 주를 이루게 된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 상대적인 열등감에 빠질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이 받고 있는 교육과 자신의 환경 사이에서 오는 간격 때문에 혼란을 겪게 되고, 또 최고만을 고집하다 보니 최고가 되지 못했을 때 겪는 열등감이 클 수밖에 없고, 현실보다는 이상에 젖어 살다보니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를 낳게 된다.
다섯째, 마마보이형이다. 아이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엄마가 해 주어야 직성이 풀리고 아이도 엄마의 그런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스스로 자신의 일을 처리할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의 아이는 의존적인데다가 도전의식이나 창조성이 결여되어 또래 아이들보다 발달도 늦고 뒤쳐진다는 것이 유아교육학자들의 지적이다.
왜곡된 자녀 교육의 예를 들어보았지만 왕 노릇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자녀를 바로 키우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중요한 지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곡된 왕 노릇의 교육은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자녀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왕비병에 걸린 엄마처럼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왕자처럼 혹은 공주처럼 대우하신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외면한 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혹시라도 잘못된 귀족이나 황제, 혹은 왕비나 황태자처럼 또는 마마보이처럼 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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