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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3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요6:38-4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273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느 누구도 아무 목적 없이 우연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마치 007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가 자국의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고 적국에 침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당신께서 계획하신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를 특별히 택하시고 뽑아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자신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가를 모른 채, 또는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진로를 정하고, 직업을 택하고 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또 자신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모른 채, 우연에다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고, 막연한 행운을 기다리면서 뚜렷한 목적 없이 살아간다. "잘되면 좋고, 안돼도 할 수 없고, 산다는 게 다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알고자 했다. 예수는 비록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태어나 남들처럼 학교에 나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를 도와 목수의 일을 배우면서 부서진 집과 문을 고치고, 집안에 필요한 가구들을 만들면서 생각하셨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 부서진 집과 문틀은 목수인 내가 고치면 되지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방황'(마 9:36; 막 6:34)하는 민중의 부서진 몸과 영혼은 누가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왜, 부모님들은 내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셨을까? '예수'란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뜻이 아닌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목수의 일처럼, 병든 사람을 고치고, 좌절한 사람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을 배우셨다. 예수는 회당에서 배웠던 이사야 61장 1-3절,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고 한 말씀이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예수는 자신의 할 일을 알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집을 고치는 '목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을 고치는 '메시아의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과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는 후에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하셨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다."(눅 9:22)고 하셨는데, 결국 반란죄로 십자가형에 처형당하셨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었는데, 당대의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민중'을 위하기보다는 로마제국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는 매국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불쌍한 민중을 돌보고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예수를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반란자로 몰아 십자가에 처형했던 것이다.
예수는 이 모든 시련이 자기에게 닥칠 것을 예상하고 계셨지만,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연령인 나이 30세가 되자, 목수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이 전파하는 복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었다.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께서 얼마나 확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계셨는가를 살필 수 있다.
누가복음 4장 16-30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곳 나사렛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이 부서진 집을 고치는 목수의 일이 아니라, 심령이 부서진 인간을 고치는 메시아의 일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인물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예수를 비웃고, 나사렛 동네가 세워진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려고까지 하였다.
또 누가복음 7장 19-22를 보면,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도 자신의 일이 부서진 집을 고치는 목수의 일이 아니라, 소경을 보게 하며,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뿐 아니라, 예수는 복음서 여기 저기에서 자주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들 말씀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6장 38-40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2장 17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4장 43절: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누가복음 19장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가 위대한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대로 행하시데 죽기까지 하신 분이시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 대해서 말하기를,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거미와 같이 올가미를 놓아 남을 등쳐먹고 사는 유형, 둘째는 개미와 같이 자기만을 위하여 준비하는 이기적인 유형, 셋째는 남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꿀벌과 같은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은 그분이 남을 해쳤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오로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셨기 때문이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어떻게 살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얼마나 부자로 살았는가보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수는 비록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민중'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고, 병을 고쳐 주셨으며, 먹을 것을 주셨고, 그들을 위해서 끝내는 목숨까지 바치셨다.
97년에 세계를 슬픔에 잠기게 했던 두 여인의 죽음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 빈과 테레사 수녀이다. 당시 온 세계는 두 '세계적' 여인의 연이은 죽음 때문에 큰 충격과 함께 무성한 화제에 휩싸였다. 더 없는 축복과 선망 속에서도 끝내 불행했던 한 여인과, 온갖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베풀며 행복했던 한 성녀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남겼다.
다이애나는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하여 찰스 황태자와 결혼하여 궁전에서 살았으며, 호화찬란한 생활을 했지만, 가정 불화로 인해서 다섯 번 자살을 시도했고, 대식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는가하면, 국적을 초월해서 수많은 남자들과 연애 행각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교통사고로 애인과 함께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다이애나와 함께 죽은 도디 알 파예드는 엄청난 플레이보이로써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인 브룩실즈, 위노나 라이더, 줄리아 로버츠와 교제했었고, 다이애나 또한 찰스 황태자와 별거하기 직전부터 자신의 경호원인 제임스 길베이, 럭비 선수 윌 칼링, 미술 거래상 올리버 호어, 아시아의 재벌 글루 라바니, 부동산 재벌 크리스토퍼 횃리, 파키스탄 심장전문의 하스나트 킨,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영국의 은행가 필립 댄, 유명 가수 스팅, 배우 톰 행크스, 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맨, 신흥 종교 교주 앤터니 로빈스, 심지어는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윌리엄 밴 스트로 벤지까지도 자신의 연애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와 같은 삶은 전적으로 그녀의 바람기 탓만은 아니며, 한편, 왕세자 빈으로써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결코 존경받을만한 삶이 아니었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나 이미 12살 때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그 후 6년간 테레사는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많은 기도를 드렸다. 그 결과 자신의 사명은 가난한 빈민들을 돌보는 것임을 깨달았고, 18세 때에 부모 친척과 고국을 떠나 인도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주로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였다. 1948년 어느 날 기차 여행 중에 기도하다가 수녀원을 떠나 가난한 사람들과 기거하며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그 때 테레사는 예수께서 극빈자, 버려진 사람, 집 없는 사람들 가운데 계실 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께 헌신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할 새로운 임무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게 되었다. 그로부터 테레사는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사랑의 선교회'를 조직하였고, 이년 후에는 이 선교회를 정식 수녀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테레사는 이 수녀원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에게 고침을 주고, 집 없는 자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였다.
테레사는 캘커타에서만 3만 6천명의 부랑자들을 돌보았으며, 어린이집을 세워 버려진 고아들과 미혼모들, 그리고 불구아들과 정신박약아들을 돌보았으며, 나환자촌을 세워 150명의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사랑의 선교회'는 1948년 설립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캘커타를 중심으로 인도 전역에 분원이 설치되었고, 남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세계 각처에 67개소에 이르는 분원이 설치되었다. 이 일로 테레사는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자신이 해온 버린 자들에 대한 구호 사업은 자신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어떻게 살았는가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학교를 다녔고, 얼마나 부자로 살았는가보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어떤 집안에서 출생했는가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살았는가가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예수는 비록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는 민중'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고, 병을 고쳐 주셨으며, 먹을 것을 주셨고, 그들을 위해서 끝내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테레사는 나약한 여성에 불과했지만, 일찍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난과 병으로 버려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병을 고쳐 주었으며, 온몸으로 봉사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얼마나 확고하고 뚜렷한 것이었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테레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테레사의 삶은 테레사 자신이 말했듯이 테레사를 통해서 나타난 예수의 삶 그 자체였다. 예수가 위대하고 테레사가 위대했던 것은 바로 그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다는데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 목숨 바쳐 봉사했다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