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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33
예수의 눈물[히 4:14-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122  
예수의 성품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다. 아버지와 같은 모습에서는 자기 자식을 괴롭히는 나쁜 녀석들을 혼내주는 든든하고 정의로운 후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머니와 같은 모습에서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눈물을 뿌리며 마음 아파하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자애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처럼 정의로운 모습은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내쫓으시며 폭풍을 진압하시며 귀신을 내쫓으시는 모습에서 발견되고 있고,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모습은 병든 자를 어루만져 고쳐주시며, 가난한 민중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천국복음을 들려주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정의로운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알렉산더와 같은 무적장수의 모습이 발견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에서는 아이들을 감싸안으시며 비탄에 빠져 목자 없이 방황하는 민중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부드러운 모습이 발견된다.
그런데 예수가 강한 분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민중을 괴롭히는 악한 세력에 대한 것들이고, 부드러운 분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가련한 민중에 대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민중을 괴롭히는 마귀나 귀신 또는 정치인이나 종교인들과 관련된 경우 예수는 그들의 권위를 꺾고 권세를 멸하시는 강한 분으로 나타난다. 그런 경우들은 복음서에서 병든 자를 고치시며, 폭풍을 잔잔케 하시며, 귀신을 몰아내시며,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말씀의 권위로 꺾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또 예수는 고난과 시련을 겪는 민중과 관련된 경우 그들과 함께 하는 부드러운 분으로 나타난다. 그런 경우들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입장에서 편을 들어주시며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눈물을 흘리시며 그들처럼 매를 맞으시며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갇힌 데서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는 민중을 괴롭히는 세력들에게는 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 대항하셨고, 괴롭힘을 당하는 약한 민중들에게는 더 부드럽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감싸안으셨던 것이다.
예수의 이런 두 가지 성품은 모두가 억압과 번뇌와 고통 중에 사는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정의롭고 능력 많고 강한 성품은 우리 인간을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예수의 자애롭고 부드러운 성품은 우리 인간을 죄와 질병과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정의롭고 능력 많고 권세 있는 성품은 그분의 신성에서 나온 것이고, 예수의 자애롭고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성품은 그분의 인성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신성이 있었고, 또한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인성이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과 부성을 성품으로 받았고, 마리아로부터는 인성과 모성을 성품으로 받으셨다.
예수는 신성을 가졌기 때문에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 인간을 해방시킬 수가 있었고, 또 인성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희로애락을 체험하실 수 있었다. 지금도 예수는 신성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인성으로 우리를 감싸안으신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예수의 성품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데 있다. 비록 우리가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의 성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아는 거울이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종려주일이나 부활주일이 갖는 의미는 화려하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화려한 행렬과 환영인파를 볼 수 있는 날이고, 부활주일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를 축하하는 제자들의 큰 기쁨을 볼 수 있는 날이다. 그러나 종려주일과 부활주일을 앞둔 주간에는 예수의 눈물과 고난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의 눈물이 있고 난 후에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이 있었고, 매맞음과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이 있고 난 후에 화려한 부활이 있었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신 일을 세 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우신 일이 모두 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근처에서 일어났다. 첫 번째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서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우셨고,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고, 세 번째는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 중에 기도하며 우셨다.
예수의 이 세 번의 눈물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바로 죽음이다. 예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고 우셨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우셨다.
눈물과 죽음! 사람이 죽으면 사랑했던 사람들이 비통해하며 엉엉 소리내어 운다. 그만큼 죽음은 비통한 것이고, 고통스런 것이고, 무서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갈라놓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다. 그 죽음이 육체적인 죽음이든지, 영적인 죽음이든지, 영원한 죽음이든지 간에 죽음만큼 큰 고통과 슬픔이 없다. 그래서 예수도 이 죽음 앞에서 우셨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가족들의 슬픔에 함께 동참하셨다. 마리아와 조객들이 슬픔으로 통곡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의 마음이 괴로움으로 격해지셨다. 성경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요 11:33)고 하였다. 그러나 희망 없는 자들같이 통곡하지 않으시고, 다만 소리 없이 눈물만 떨구셨다.
예수의 이 소리 없는 눈물은 복합적인 눈물이다. 첫째, 예수의 이 눈물은 인간이 겪는 죽음에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에서 나온 눈물이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이 죽음의 고통이 인간들에게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시 한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둘째, 예수의 이 눈물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다. 예수는 자기 자신도 몇 일 뒤에는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서 이 죽음의 고통과 맞부딪치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셋째, 예수의 이 눈물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흘리는 감격의 눈물이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가련한 인간들을 영원히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눈물은 그 자신의 눈물이자 민중의 눈물이며 민중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다보시고 우셨다(눅 19:41). 이 때의 울음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흘린 조용한 눈물이 아니라, 소리내어 우신 눈물이다. 민중들은 대제국 로마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신다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흔들며 겉옷을 벗어 길에 깔면서 예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환호하고 있었지만, 예수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소리내어 우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왜 소리내어 우셨을까? 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우셨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foundation of peace)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또 그곳에 사는 성민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앞날에는 평화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루살렘 성의 패망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소리내어 우신 것은, 나사로 한 사람의 죽음보다 더 큰 재앙이 예루살렘 성과 또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많은 불쌍한 민중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 앞에 닥칠 운명을 모른 채, 메시아를 외쳤고, 그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었지만,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 가져다 줄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호산나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한 사람의 희생이 있고서야 찾아오는 법이다. 아무도 죽고자 아니할 때, 아무도 살 수 없고, 아무도 희생하고자 아니할 때, 아무도 얻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 오직 예수만이 그것을 아셨다. 자신이 죽어질 때,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고, 자신이 희생할 때,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고, 자신이 징계를 받을 때,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고, 자신이 매를 맞을 때,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는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예수는 소리내어 우셨다. 눈물이 있고 난 후에 기쁨이 있고, 죽음이 있고 난 후에 부활이 있을 것이지만, 한치 앞을 못 보는 목자 없는 민중이 가련하여 우셨고,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하려하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도 우셨고,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이 엄청난 죽음 때문에도 우셨다. 그분도 인간이었는데, 어찌 소리내어 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마지막으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우셨다. 예수는 체포되기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당신의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고민이 극심하여 죽을 지경이었고, 몹시 슬퍼하셨다고 적고있다. 이곳에서의 예수의 슬픔은 친구의 죽음도 아니고, 민족의 패망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죽음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분도 인간이었는데, 어찌 소리내어 우는 정도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의 예수의 형편을 성경은 죽을 지경에 이르는 고뇌와 슬픔으로 기도하였는데,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 같았다고 적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예수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아버지의 원대로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의 눈물이 갖는 의미를 살펴보겠다.
첫째,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거울이요,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며 하나님은 이 예수의 눈물을 통해서 인간의 고통을 인정하셨고, 인간의 고통을 분담하셨으며,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었다. 하나님은 예수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을 친히 체험하셨고, 그 큰사랑을 나타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눈물은 인간의 고통을 체험한데서 나온 하나님의 눈물이며, 인간의 고통을 분담한데서 나온 하나님의 눈물이다.
둘째, 예수의 눈물은 인간의 눈물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예수의 눈물은 민중의 고통에서 나온 눈물이다.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감지하고 인정한데서 나온 눈물이다. 이 눈물이 없었으면 예수의 죽음도 결코 위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에 테레사 수녀가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과 죽음은 결단코 위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그 눈에서 눈물을 흘렸을 때, 그녀의 삶과 죽음은 위대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도 그분이 흘린 세 번의 눈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는 이 눈물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병정의 고문과 십자가에 못 박힘을 견디고 참을 수 있었고, 인간의 아픔과 죽음을 대신할 수 있었다. 이런 체험 때문인지 예수는, 계시록을 보면, 가장 먼저 인간의 눈물과 배고픔과 목마름부터 챙기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도 아주 좋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