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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35
예수의 절규[막 15:3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582  
예수는 AD 30년 유대력으로 니산월 15일(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6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있었다. 이 여섯 시간동안에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에 남아 있는 말씀은 일곱 개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한 개가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 세 개, 요한복음에 세 개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실린 세 개의 말씀은 모두가 기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 .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눅 23:34-46)고 하셨다. 요한복음에 실린 세 개의 말씀은 모두가 예수의 육신에 관련된 말씀들이다. 예를 들면,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 자, 이분이 네 어머니 시다. . . 목마르다. . . 다 이루었다!"(요 19:26-30)고 하셨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마지막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 라는 말을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활동과 말씀을 수집하여 기록하면서 몇 가지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몇 가지 주제들은 '배척', '성령', '기도', 그리고 '여행'이다. 누가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정치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시고,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민중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시는 예수를 그렸고, 그런 중에서도 성령 충만하신 가운데 끊임없이 기도하시며 가야할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해서 죽음을 무릅쓰면서 다가가시는 예수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누가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상태에서까지 배신자와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시고, 우편 강도를 축복하시고, 자신의 영혼까지 하나님께 의탁하는 참으로 감동적인 기도 장면을 소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유일하게 소개하는 예수의 절망적인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소개하지 않았다. 예수의 이 절규는 아마 누가 당시의 신앙인들이 박해상황에서 울부짖었을 절규와 비슷한 것이었을 텐데, 누가가 생략하고 기록하지 아니한 이유는 짐작하건대, 배신자와 박해자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올리시고, 강도까지 축복하시고, 자신의 영혼까지 하나님께 의탁하는 예수에게 이런 절망적인 절규는 적당하지 않을뿐더러 신앙인들에게 모범적인 기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요한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다 소개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가 처음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소개하였고,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하나님의 신성을 가진 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표적들과 권위 있는 말씀들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는 육체의 고통을 모르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을 가진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효성스런 사람의 아들 예수였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마태와 마가가 유일하게 소개하는 예수의 절망적인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를 소개하지 않고, 그 대신에 "여자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 자, 이분이 네 어머니 시다. . . 목마르다. . . 다 이루었다!"(요 19:26-30)는 말씀만을 기록에 남겼다. 요한이 예수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생략하고 기록하지 아니한 이유는 짐작하건대, 사랑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맡기시고, 갈증을 호소하시며 자신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예수에게 이런 절망적인 절규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오로지 예수의 이 절규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신 말씀이 적어도 일곱 번은 넘을텐데, 단 한번의 절규만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또 예수께서는 왜 이런 절망적인 기도를 했을까? 또한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면, 그것은 끝장인데, 정말 예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까? 아니면, 십자가의 고통이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혹은 영적으로 너무 견디기 어려워서 몸부림치며 울부짖어 본 소리일까?
아무튼 예수의 이 절규 속에는 인간만이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좌절과 절망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들도 고통과 절망과 좌절에 빠질 때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하게된다. 예를 들면, 하는 일마다 실패했을 때, 고칠 수 없는 중병에 걸렸을 때, 정의가 불의에 졌을 때, 나쁜 사람이 잘 살고, 착한 사람이 가난하게 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게된다.
독일 사람, 카프카(Frahz Kafka)의 작품 중에 {변신}이란 것이 있다. 주인공 그레골은 외판원 생활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젊은 가장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의 몸이 보기에도 징그러운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몸을 가지고는 밖에도 나갈 수 없고 직장에도 물론 나가지 못한다. 그의 모습을 본 식구들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어머니는 졸도를 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를 방안에 가두고 방문을 잠가 버린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했던 그레골은 어느 날 갑자기 온 식구들의 경멸과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 때부터 그레골은 그 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고 허무감과 고독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의 생활이란 감금당한 채 방안에 넣어 주는 식사를 받아먹는 것이 전부이다. 그레골은 날이 갈수록 자신을 저주하며 고독과 열등감의 수렁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는 그레골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들은 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랜만에 맞는 해방감을 만끽하듯 가족 산책을 즐긴다. 이렇듯 인간의 고독과 좌절과 절망과 배신감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예수는 정말 고통과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절규했을까?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이미 그와 같은 고통을 각오하고 있었고, 제자들에게도 여러 차례나 예고한바 있다. 가난한 민중을 편들며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정치권의 안정을 위협했을 때,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었을 때,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의 권위에 도전하며 그들을 저주받을 놈들이라고 말했을 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며 유대전통에 반기를 들었을 때,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예루살렘의 가진 자들에게 대항하였을 때, 또 사십 육 년 이상 걸려서 지어진 성전을 헐면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며 예루살렘의 성전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을 때, 예수는 이미 자신이 사형에 처해질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민중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외쳤던 예언자들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예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정말 고통과 절망과 좌절에 빠져서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절규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예수를 버린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율법사와 바리새인과 같은 지배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면, 예수에게 병고침을 받고, 예수에게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던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까지도 예수를 버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만해도 유대인의 왕이라 생각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고 외쳤던 자들이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빌라도 법정에서는 "없이하소서. . .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쳐됐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힘있어 보일 때, 먹을 것을 주었을 때, 병을 고쳐주었을 때, 귀찮도록 따랐던 민중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힘없어 보일 때, 그들은 예수를 버렸다. 심지어 예수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겠다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를 버렸다. 그들은 예수께서 "너희도 떠나가려느냐?"고 물었을 때에,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을 받고 스승을 팔아먹었고,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런 나약한 민중들의 배신을 배신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들의 버림을 버림으로 받아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그들의 버림을 하나님의 버림으로 받아드렸다. 실제로는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지만,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나누어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은 버려진 민중들 속에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섬김을 받기 원하십니다." 톨스토이도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는 민화를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가 곧 하나님이시다'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것은 테레사나 톨스토이가 모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 .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마 25:40-41)이라는 성경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인간으로부터의 버림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당함으로 이해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을 나누어 생각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보이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아 이 큰 고통을 당한 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 일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일의 잘잘못을 하나님께 묻고 검토 받고 심판 받겠다는 뜻이다. 이 점에 관해서 목원대학교 송기득 교수는 그의 삶과 믿음의 에세이, {살며, 믿으며, 바라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의 모든 승패는 결국 하느님 앞에서 결정된다. 하느님께 인정을 받을 때 그것은 진정한 인정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때는 아무리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인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마지막에는 하느님께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설사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했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면, 그 인정이 진정한 인정이 되는 것이다. 욥이 뜻 모를 재난을 만나 부인이 떠나가고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를 믿지 않는 큰 시련을 겪으면서도 예수처럼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절규할망정,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의 불행의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고 검토 받고 심판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문자그대로 "나를 이렇게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자신을 철저하게 버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참뜻을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규는 어떤 물음이기에 앞서 아픔에 대한 호소이다. 예수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었기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입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물음은 "아버지의 뜻을 반드시 이루셔야 합니다."는 절규에 가까운 요청이기도하다. 예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알고 계셨고, 또 잡히시기 수 시간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 26:39)라고 기도한바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이 갖는 하나님의 참뜻을 모르셨을 리 없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인간들을 구원코자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했고, 인간들의 뜻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뜻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명에 가까운 절규는 하나님을 원망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사람을 원망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또는 죽음을 거부하는 몸짓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절규는 산고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 어찌 고통 없이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죽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귀한 일인데 어찌 그만한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져 죽을 때 비로소 많은 알곡이 맺히는 것이다. 그의 절규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절규하는 천둥번개와 같은 것이다.
끝으로 예수의 절규는 곧 하나님의 절규란 사실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몸짓이자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을 죽인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철길에서 놀고 있는 자식을 살려내기 위해서 기차에 뛰어들 듯이 하나님은 우리 못난 인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 던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절규에서 인간을 구원코자 몸부림치는 하나님의 절규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독교만의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