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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7-26 00:47
예수의 빈 무덤[막 16:1-6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708  
예수의 빈 무덤과 부활에 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실제의 무덤과 부활뿐 아니라, 영적인 또는 정신적인 무덤과 부활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첫째, 무덤은 사단의 부정의 결과요, 예수의 빈 무덤은 하나님의 긍정의 결과이다. 인간의 죽음은 사단의 'NO'의 결과요,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YES'의 결과이다. 그래서 신학자 바르트(Karl Barth)는 부활을 사단의 'NO'에 대한 하나님의 'YES'라고 했다. 사단의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라고 했다.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다고 긍정한다. 무덤에 갇힌 자는 영원히 그 무덤에 갇힐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무덤을 박차고 밝은 세계로 나올 수 있다고 긍정한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을 수 없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긍정한다. 낮은 자는 높아질 수 없고 높은 자만이 영원히 높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높은 자는 낮아 질 것이요, 낮은 자는 높아진다고 긍정한다. 가난한 자는 무시당하고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가난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한다. 먼저 된 자는 영원히 먼저 되고 나중 된 자는 영원히 꼴찌가 된다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긍정한다. 높은 산은 항상 높고 낮은 골짜기는 항상 낮다라는 사단의 부정에 대해 하나님은 높은 산이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가 높아지는 메시아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긍정한다. 그래서 사단의 이 부정에 빠져들면 그 자체가 죽음이요 무덤이지만, 하나님의 긍정에 빠져들면 그 자체가 생명이요 부활이다. 그래서 시인 구상은 그의 [부활송]이란 시에서 "당신[예수]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고 노래했다.
둘째, 사단은 인간을 끝없이 회칠한 무덤에 가두려고 한다. 우리의 사상과 정신과 육체와 영혼을 썩고 냄새나고 눅눅하고 어두운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한다.
미국에서는 공동묘지도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돈 많은 미국 사람들이 무덤들을 화려하게 꾸며놓았기 때문이다. 비싼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하고 거대한 집처럼 생긴 무덤들이며, 납골당과 동상들을 볼 수 있다. 잘 포장된 도로며, 잔디며, 자연 그대로의 지형을 살린 공동묘지는 산책코스로도 아주 훌륭하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답고 화려한 무덤들 속에는 썩고 냄새나는 시체들뿐이란 점이다. 대단히 크고 대단히 화려한 무덤이라 할지라도 무덤은 무덤인 것이다. 그 속에는 썩고 냄새나는 시체뿐이란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인간을 끝없이 회칠한 무덤에 가두려고 한다.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우리의 사상과 정신과 영혼까지도 썩고 냄새나는 어두운 무덤 속에 가두려고 한다. 사단의 전략은 우리 인간을 부정과 비관과 허무와 죽음과 나태함과 게으름과 시기와 질투와 중상과 모략과 사치와 낭비와 교만과 허세에 빠뜨려 폐쇄된 공간인 무덤에 가두는 것이다.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들면, 겉모습은 화려해질는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썩고 병들어 냄새가 진동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예수는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질책하셨다.
마태복음 23장 27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서 저주하시기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고 했다. 예수의 이 말씀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하여도 그 무덤 속에는 썩고 냄새나는 시체뿐인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겉모습이 좋고 훌륭해 보여도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이 썩고 냄새나고 폐쇄적이고 율법적인 것이면 무덤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당대의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민중을 위함이 없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을 위함이 없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정의가 없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구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딤후 3:5). 그들은 율법이란 폐쇄된 무덤에 갇힌 자들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이 없는 자들이었다.
예수의 부활과 관련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이 이런 사람들이 아닌가 돌이켜 반성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서 무덤에 영원토록 가두려고 했다. 예수의 시체뿐만 아니라, 예수의 자유롭고 복음적인 정신과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사상마저도 썩고 냄새나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다. 하나님의 진리를 무덤에 가두려고 했다. 하나님의 정의를 무덤에 가두려고 했다. 세마포로 꽁꽁 싸고 묶어서 가두려고 했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며,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온유한 자들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과 긍휼히 여기는 자들과 마음이 청결한 자들과 화평케 하는 자들을 편들며, 그들에게 복을 비는 예수를 폐쇄되고 생명이 없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다. 세리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병든 자들을 고쳐주며, 폐쇄적이고 편협한 율법풀이로 불쌍한 민중을 옭아매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도전하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바꾸어놓은 사두개파들에게 도전하며, 진정으로 인간에게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 줄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천국복음을 전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는 무덤에 가두고 장정 20명이라도 굴릴 수 없는 무게가 무려 1.5~2톤이나 되는 큰돌로 입구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나서 당대 최고였던 로마군인들로 하여금 보초까지 서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 육중한 돌문을 열어제치고 냄새나는 육신을 감쌌던 세마포를 벗어 던진 채 그 냄새나고 폐쇄된 죽음의 공간을 벗어나 새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무덤이 그를 가둘 수가 없었다. 세마포가 그를 묶어둘 수 없었다. 죽음이 그를 지배할 수가 없었다. 불의가 그를 지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빈 무덤만을 남긴 채 무덤을 박차고 나왔다. 자신의 몸을 꽁꽁 묶었던 죽음의 오랏줄 세마포를 풀어 던진 채 무덤을 탈출하여 밝은 세상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나서 예수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이자 정치적 술수와 비방이 난무한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을 떠나 민중의 삶의 터전이자 새 출발의 장소인 갈릴리로 가셨다. 그곳에서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셨다. 그곳은 비록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천국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지던 곳이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무덤에서 빼내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빈 무덤은 많은 빈 무덤의 출발신호였다. 예수의 새아침은 많은 새아침의 출발신호였다. 예수의 새 출발은 많은 새 출발의 시작에 불과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했다. 그분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은 우리 모두도 예수처럼 더럽고 냄새나는 무덤을 벗어 나와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우리 모두도 죽음과 죄악과 구습의 세마포를 풀어버리고 하늘에 오른 예수처럼 하늘에 오르는 변화된 사람이 될 것이란 뜻이다.
교회사를 보면, 신앙 선배들 가운데 예수를 본받아 자신의 썩고 냄새나는 육신을 묶었던 세마포를 풀어버리고 빈 무덤을 남긴 채 부활의 새아침을 맞았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본다. 이런 분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한국 초기 개신교 신자였던 서상륜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처음 이 땅을 밟았던 1885년에 우리 나라에는 이미 평안북도 의주와 황해도 소래에 교회가 있었고, 서울에만 이미 70여명의 세례 지원자들이 있었다. 이 모두가 서상륜이란 사람의 전도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서상륜은 1849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난 평안북도 의주 사람인데, 14세 때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동생을 데리고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십대의 나이에 만주를 넘나들며 무역을 했던 국제 보따리 장사꾼이었다.
그런데 그가 만주에서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부터는 장사를 거둬치우고 만주에서 번역된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쪽복음서를 번역하는 일과 또 출판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복음젼셔}를 봇짐 속에 숨겨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들을 판매하며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 당시만 해도 아직 기독교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로스(Ross)라는 선교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복음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삶을 회고했다. "외모로는 공자와 맹자의 도를 섬기고, 스스로 문벌을 신뢰하고, 안으로는 교만과 궤휼과 거짓과 간음과 탐냄을 품어 남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속이며 남을 얕잡아 보고 나만 잘 생겼다고 자랑하였고, 주위 사람이 흠잡아 말하기를, '면주자루에 개똥'이라고 하여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의 지혜를 자랑하고 다녔으니,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진실로 한심하고 무섭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면주자루에 개똥'이란 말은 '비단자루에 개똥'이란 말로써 겉모양은 멋진데 속에는 냄새나는 개똥이 담겼다는 뜻이다. 서상륜은 대단한 미남자였지만, 실상 속에는 냄새나는 개똥으로 차있었던 것이다. 이는 철저한 자기 반성이자 회개였다. 양반 집에서 태어나 가문을 내세우며 자만했던 나날들, 남을 속이며 생명까지도 빼앗았던 지난 날, 인간의 모든 악한 행실을 직업 탓으로 돌리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과 회개였다.
이일 후로 서상륜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삶을 철저히 반성하면서 옛일을 떨쳐버렸고, 침례를 받아 성령으로 새롭게되자, 그는 비로소 질그릇에 보석을 담게 되었다. 교만하던 비단자루가 변하여 겸손의 질그릇이 되었고, 냄새나는 개똥대신에 천국복음의 보석을 담게되었다. 서상륜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와 같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 천국의 보배를 가졌다는 것과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실로 서상륜은 복음을 받아드린 후에는 면주자루에 개똥이나 회칠한 무덤과 같았던 자신을 발견하고, 썩고 냄새나는 무덤의 현실, 빛이 없는 무덤의 현실을 박차고 벗어난 후에는 질그릇에 천국복음을 담는, 무덤의 현실을 이기는, 능력의 사람으로 부활하였던 것이다.
셋째, 사단은 인간들을 회칠한 무덤에 가두려고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조차도 썩고 냄새나는 무덤에 가두려고 했다. 그런 그가 오늘날에는 인간들을 영원토록 무덤에 가둘 목적으로 많은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무덤에 가두려고 한다. 사단에게 이용만 당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법칙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자연의 법칙을 수호하며, 인간의 죽음조차도 가장 자연스런 자연의 법칙의 하나로 받아드리고 있다. 부활을 믿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또 유물론 사상에 기초하여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의 힘의 논리를 신봉하며, 자기들의 조상이 원숭이였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 우주가 폐쇄된 체계 속에서 자연의 법칙인 인과율의 사슬에 매어 숙명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며, 하나님은 이 우주에 계시지도 않고, 인간사에 관심도 없으시며, 주권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 이런 사람들은 인간도 이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에 속한 한 부품에 불과하며, 죽음도 아주 자연스런 것이어서 부활과 같은 기적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폐쇄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을 무덤에 가두는 사람들은 결단코 빈 무덤을 남길 수 없으며, 부활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옭아매는 세마포를 풀어내고 썩고 냄새나고 어두운 무덤을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슬려 사는 창조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단의 부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긍정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