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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42
빵과 신앙의 문제(막 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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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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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신앙의 문제(막 8:14-21)
현대인들의 삶이 고달프다, 불안하다는 것을 굳이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국가도 지자체도 빚으로 살림을 꾸려가고 있고, 기업들이 힘없이 무너지는가하면, 헐값에 외국자본에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밥줄이 언제 어떻게 끊길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불안 속에서 살고 있고, 사업가들 또한 치열한 경쟁과 불황 속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수입은 줄고, 지출은 계속해서 느는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너나 할 것 없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우리민족이나 유태민족이나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지만, 과거에는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11년에 일본의 국왕 원의지(源義持)가 태종에게 바친 코끼리가 등장하는데, 조선은 궁색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 코끼리 한 마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전라도에서 충청도 또는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내곤 합니다. 대원군시절 경복궁 재건 때도 보면, 국가가 왕궁 한 채 지을 돈이 없을 만큼 궁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으로 말하자면, 성서시대 유태인들은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름에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기후 조건에다가 풀포기조차 보기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 무엇을 수확할 수 있었겠습니까?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복음서에는 빵문제가 적지 않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빵과 신앙의 문제”란 제목으로 잠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4장부터 8장까지에는 두 개씩의 기적들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이 가운데는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에서 건지신 두 개의 기적과 광야에서 민중에게 빵을 먹이신 두 개의 기적 그리고 두 개의 장애자 치유가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마가복음 4-6장을 보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4:35-41)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6:35-44)로 이어지는데, 이 두 개의 이야기 사이에서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고,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고침(5:21-43)을 받습니다.
마가복음 6-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호수 위를 걸었던 이야기(6:45-51)가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8:1-10)로 이어지는데, 그 두 개의 이야기 사이에서 귀신들렸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고침(7:24-30)을 받습니다. 그러고 나서 8장 29절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이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까지 예수님은 풍랑과 같은 재해나 각종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고칠 뿐 아니라, 광야에 모인 수천 명의 가난한 민중의 배고픔을 일시에 해결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 때문에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기적들을 셀 수 없이 펼쳐 보이셨지만, 대다수 유대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라, 그러면 너를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빵을 주고, 병 고침을 구하는 자들에게 병 고침을 베푸셨지만, 이것이 곧바로 예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참된 신앙은 육체적인 욕구를 채워주는데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육체적 필요만을 채워주는 분으로 오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오해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이며, 벙어리라고 마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복음서 7-8장에서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앞에 그리고 일련의 기적들을 소개한 다음에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7:31-37)가 고침을 받아 듣고 말하게 하고, 벳새다 장님(8:22-26)이 고침을 받아 볼 수 있게 합니다. 귀먹고 어눌했던 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듣고 말하게 되고, 장님이 눈을 떠 볼 수 있게 될 때, 빵 문제와 같은 육신의 문제들을 뛰어넘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와 장님들은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여 빵이 없음을 근심하고 걱정하는 자들이며, 예수님이 아무리 큰 능력들을 그들 앞에서 베풀어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와 벳새다 장님의 치유 바로 앞에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의 우둔함을 신랄하게 꼬집는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다음에 바리새인과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소개하고, 이어서 귀먹고 어눌한 벙어리가 고침을 받아 듣고 말할 수 있게 되고나서 신앙인들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우둔함은 그들이 율법과 바리새인 법과 같은 전통에 매어 본질을 상실한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우둔함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은 제자들의 일부가 손을 씻지 아니하고 떡을 먹은 데서 발단이 되었고, 제자들의 우둔함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7:15-16)는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일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한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비난하였는데, 이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본질에서 벗어난 비난이었던 것입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전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인간의 전통에 매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 7절에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고 하셨으며, 또 13절에서는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유전”이란 말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세운 장로들의 유전을 말하는 것입니다만, 오늘날로 말하면 사람들이 만들어 세운 교회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율법을 아는 지식과 행하는 일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기대했고,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기보다는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과 전통을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분을 일컬어 ‘귀신들린 자’(요 7:20; 마 12:24)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귀가 뚫리고 눈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신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도 바리새인과 제자들의 우둔함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어서 벳새다 장님이 고침을 받아 보게 될 때에 비로소 모든 신앙인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의 우둔함은 그들이 예수님을 힐난하며 시험하여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는데서 나타납니다.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하였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 따르면,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조상들을 먹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이신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보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라는 모세의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일 것이고, 그 선지자는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게 했던 것처럼 민중을 먹이는 표적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보고서도 믿지 아니하고, 하늘로써 오는 또 다른 표적을 구했다는 점에서 진정 우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음 속 깊이 탄식하셨고,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의 일인 떡이 없음을 서로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간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표적을 보았지만, 육신의 일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막혀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에서는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한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요 6:26)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둔함이 빵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는 것(요 6:40)이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민중을 먹이신 것은 오로지 자신이 새 시대를 위한 생명의 떡임을 밝히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적어도 하나님이라면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의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만큼은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입니다.
마가복음 4장부터 8장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특히 마가복음 8장 14-38절까지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14-38절은 대칭구조를 이루는 두 개씩의 이야기와 제자직에 관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4-21절을 보면, 빵이 없음을 의논하는 제자들의 우둔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31-33절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베드로의 또 다른 우둔함과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이 둘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22-26절에 벳새다의 소경이 눈을 뜨는 장면과 27-30절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또 다른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34-38절에 제자직에 관한 말씀이 결론으로 나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 8장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24절과 30절에 나오는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침묵에 대한 경계입니다.
마가복음 8장의 이야기를 좀 더 풀어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 즉 육신의 일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요, 마음이 둔한 자이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또 기억치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이며,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고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둡고 또 기억력이 나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그 깊은 영적인 비밀을 간직하지 못한 자이며, 복음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다 하더라도 벳새다의 소경이 서서히 눈을 뜨고 비로소 예수님을 바로 보고 또 그 신비한 비밀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처럼, 또 눈을 뜨고 예수님을 바로 보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며 그 신비한 비밀을 간직하고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멀고 귀가 먼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한 죄수에 불과하겠지만, 눈을 뜨고 귀가 열린 사람이 보고 듣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 그를 믿는 자들을 영생에 이르게 할 구세주란 사실을 깨닫고 그 신비한 영적 비밀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로 빵이 없음으로 의논하고,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아닙니까? 우리가 바로 믿음이 없어 눈을 뜨지 못한 소경은 아닙니까? 우리가 복음과 하나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아닙니까? 만의 하나 우리가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날마다 우리 자신들을 부인하고 또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몸 바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으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현세보다는 내세를 바라보고, 세상의 영광보다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서 살기를 원하는 깨닫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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