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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31 01:38
민들레 같은 젊은이(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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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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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가 보는 젊은이들은 언제나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젊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기성세대가 보는 젊은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오늘날의 젊은이들의 상당수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삶의 목표가 없고 타인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고 있고 계산적이며 감각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85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가 청년 10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젊은이의 의식구조' 조사 결과를 보면, 신세대는 '개인의 행복과 한국 전체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대해 '개인'(26%)을 '국가'(15.4%)보다 10.6퍼센트 높게 평가함으로써 전체보다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나타냈습니다.
'사회봉사형' 인간에 대해서는 22%가 훌륭하다고 평가한 반면, 반수를 넘는 59%가 훌륭하지만 좋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 일단 남의 희생적 삶을 높이 평가하지만 자신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주저하는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젊은이들은 또 살아가는 목표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하고 사는 것'(53%)을 경제적 富(23%), 사회적 지위(5%), 사회봉사(16%)보다 월등히 앞세워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도 보여 주었습니다.
갤럽조사 결과 나타난 20대의 특징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남자 44%, 여자 54%가 목표없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타인을 믿고 살수 없다는 답이 75%였습니다. 셋째, 돈 계산이 지나치게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응답자의 60%가 스스로도 돈에 얽매이고 이해 타산적인 경향이 짙다고 평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물을 판단할 때 심사숙고(43%) 하기보다는 주로 감각적인 판단(47%)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둘째,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이 보냈던 청소년 시절보다도 인내심이 부족하고, 강인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초창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렇다 할 종교적인 지식이 없이도 십계명과 같은 기도문만 아침저녁으로 외우고서도 혹독한 고문을 이겨냈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순교자들 가운데에 열 세살 된 유대철(劉大喆)이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유대철 소년은 아버지 유진길(劉進吉)이 옥에 갇히자, 자신의 신앙의 깊이를 확인하고 싶어 제발로 포도청을 찾아가 자수했습니다. 옥졸(獄卒)들은 이 소년에게 들린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갖은 고문을 가했습니다.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사타구니를 지져대면서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느냐' 라고 묻자 `미동(微動)도 안 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벌겋게 달군 쇳조각을 화젓가락으로 집어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자 크게 입을 벌리고 내어 밀어 오히려 옥졸들이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옥에 돌아와 같은 신도들이 위로를 하면 `이 정도는 한 말(一斗)의 쌀 가운데 한 톨에 불과하다'고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소년 유대철은 도합 열 네 번 신문을 받고 태장을 육백 대 맞고, 치도곤을 마흔 다섯 번 맞았으며, 살이 저며 나가고 뼈가 탈골하기까지 했는데도, 오히려 그를 보고 우는 어른들을 위로할 만큼 태연자약했다고 열 명 이상의 증인들이 선서를 하고 증언을 했습니다. 이 소년 하나를 배교(背敎) 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신경질이 난 옥졸들은 이 상처뿐인 소년을 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나이 어린 소년을 순교할 수 있게 한 그 심지(心志)가 본래의 한국 젊은이들의 모습이었는지 모릅니다.
옛날 서울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열 살만 되면 삼각산(三角山) 백운대를 오르게 하여 그 정상의 아슬아슬한 뜀바위 `결단암(抉斷岩)'을 함성을 지르며 뛰어넘게 하여 고통과 위험과 겁을 이겨내는 정신력을 길러주었다고 합니다. 문헌에 보면, 안평대군도 이 백운대에 올라 뜀바위를 뛰어넘었고, 수양대군은 그 이웃에 있는 노적봉(露積峰)에 올라 담력을 길렀다고 합니다. 개성(開城)에는 천마산의 안돌이 바위, 등돌이 바위라는,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는 두 바위를 안고 돌고 등대고 돎으로써 담력과 극기력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거풍등고(擧風登高)'라는 토속적인 가정교육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누룽지를 아들의 허리춤에 싸매어 주고는 인근의 높은 산에 등산을 시키고 정상에 올라가 고추를 내놓고 오줌을 싸고 오라고 했습니다. 돌아오면 거풍(쌓였던 것을 바람 쐼)을 했는지 안했는지 고추를 보면 안다고 고추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이겨낼 인내심을 키우기 위해서 등산으로 어릴 때부터 극기력을 길러주었던 것입니다.
진(秦)나라 재상이자 진시황(秦始皇)의 아버지였던 여불위(呂不韋)는 사람을 보고 쓰는 방법으로 `육험론(六驗論)'을 강조했습니다. 이 방법은 중국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규범이 되어 전해져 내려왔는데 사람의 됨됨이나 기량(器量)을 타진하는 여섯 가지 시험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서 그에 얼마나 빠져드는가를 보고, 둘째 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서 그를 얼마나 자제하는가를 보며, 셋째 그 사람을 괴롭게 하고서 얼마나 참아내는가를 보고, 넷째 그 사람을 두렵게 해 놓고서 얼마나 나타내지 않는가를 보며, 다섯째, 그 사람을 슬프게 해 놓고서 얼마나 삭이는가를 보고, 여섯째 그 사람을 성나게 해 놓고 얼마나 개의치 않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자제력과 인내심과 담력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젊은이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셋째, 요즘 젊은이들의 키는 콩나물처럼 자라는데 체력이 떨어지고 있고 가슴은 새가슴처럼 좁아지고 있다고 최근 체위(體位)조사에서 지적되고 있습니다. 가슴만 좁아지면 몰라도 가슴이란 그릇 속에 담겨진 신앙, 자유, 용기, 정의, 희망, 분노, 관용, 아량, 그리고 사랑 같은 내용까지 작아질까 걱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로망 폴란스키의 작품에 {옷장과 두 사나이}라는 게 있습니다. 현대인의 병리현상을 고발한 희곡으로서 영화까지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닷속에서 두 사나이가 커다란 옷장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불안정하게 옷장을 맞들고 거리를 누비는데 어딘가 에다가 그 옷장을 놓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내려놓으려 할 때마다 거절당하고 밀 치우고 쫓겨나곤 합니다. 좁은 골목에서 전주에 부딪치고 쓰레기통에 부딪치며 우충좌돌하다가 주인 없는 버림받은 땅에 남의 눈을 속여 놓아봅니다. 그러나 앞으로 기울거나 모로 기울거나 삐딱빼딱 고정이 되질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두 사나이는 체념을 하고 옷장을 다시 들고 바다로 되돌아간다는 줄거리입니다.
여기에서 옷장은 현대인의 가슴, 곧 마음을 상징합니다. 서양에서는 옷을 담아두는 옷장을 마음을 담아두는 가슴에 곧잘 비유하며 이 작품에서도 옷장은 현대인의 가슴, 곧 심정(心情)이 발붙일 곳 없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현대인의 가슴이 모가 났는지 현대의 상황(狀況)에 아귀가 맞지 않고 마냥 뒤틀리기만 하여 고독한 바다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가슴은 자유와 정의와 신앙과 정열과 의지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화가들은 반드시 젖가슴에 악센트를 두어 그렸습니다. `성(聖) 아가다의 순교(殉敎)' `성(聖) 바바라의 순교(殉敎)' 등 순교를 그린 명화를 보면 집게로 성녀(聖女)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음을 봅니다. 젖가슴은 신앙(信仰)과 열정이 담겨져 있는 그릇이기에 그 그릇을 깨뜨리는 뜻에서 젖가슴 고문이 가해졌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서양보다 더 가슴과 마음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대중가요에 빈도 높게 등장하는 `가슴 아프게', `쓰라린 가슴', `찢어지는 가슴'은 흉부(胸部)에 외상(外傷)을 입어서 아프고 쓰리고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아프다는 뜻입니다.
가슴이 크다는 것은 포용을, 가슴을 편다는 희망을, 가슴이 뛴다는 것은 흥분을, 가슴이 무겁다는 것은 우울을, 그리고 가슴을 나눈다는 것은 정(情)을, 가슴이 벅차다는 것은 감격을 뜻하였습니다. 희비애로(喜悲哀怒)가 가슴속에 있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가슴속에 있습니다. 흉금(胸襟)을 튼다 하면 마음을 튼다는 뜻입니다.
오래 전 서당에서는 마당에 민들레를 키워 서생들을 교육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들레가 가진 특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민들레는 열 가지 특성을 가진 잡초입니다.
첫째, 민들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길가에 피어 마소와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짓이겨도 죽지 않고 끝내 살아나는 끈질긴 잡초입니다.
둘째, 나쁜 환경, 나쁜 여건을 억척스레 이겨내는 인내의 잡초입니다. 민들레보다 생명력이 웃도는 강인한 잡초는 없다고 합니다.
셋째, 뿌리를 난도질하여 심어도 그 뿌리에서 싹이 돋으며, 뿌리를 캐어 닷새고 이레고 햇볕에 바싹 말렸다 심어도 싹이 돋는 생명력이 강한 잡초입니다.
넷째, 민들레는 돋아난 이파리 수만큼 꽃대가 올라오는데, 꽃이 한꺼번에 피지 않고 반드시 한 꽃대가 피었다 지면 기다렸다 피는 차례를 아는 꽃입니다. 예의를 아는 꽃입니다.
다섯째, 여린 잎은 나물로 무쳐 먹고 뿌리는 김치를 담가 먹기 때문에 효용성이 있는 식물입니다.
여섯째, 꽃에는 꿀이 많아 원근에서 벌을 많이 끌어들이는 정이 넘치는 잡초입니다.
일곱째, 잎이나 줄기를 자르면 하얀 젖이 나오는 사랑이 넘치는 잡초입니다.
여덟째, 약재로서 머리를 검게 하여 연세 드신 분을 젊게 하는 효도를 아는 잡초입니다.
아홉째, 민들레 즙은 모든 종기를 치료하는 약초로 쓰입니다.
열째, 씨앗이 되어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자수성가하니 자립심이 강한 식물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훈장들은 서당 뜰에 민들레를 키워서 서생들을 교육했던 것입니다. 민들레처럼 끈질기고, 강인하고, 생명력이 강하고, 예의범절을 알고, 쓸모 있고, 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효도할 줄 알고, 약초 같고,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 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학우들도 민들레 같이 강인한 젊은이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 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흑암에 빛을, 무질서에 질서를, 죽음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기 이전에는 이 우주가 흑암과 무질서와 무생명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태를 말씀으로 빛과 질서와 생명의 상태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어가 긍정적이었고 창조적이었습니다.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을까? 무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생명 없음을 생명 있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라고 머뭇거리거나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주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그러자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주의 흑암과 무질서와 무생명의 상태를 빛과 질서와 생명의 상태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흑암과 무질서와 무생명의 상태는 창조적인 언어와 삶의 태도를 갖기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창조적인 언어와 삶의 태도가 있고 난 후에는 흑암이 빛으로, 무질서가 질서로, 생명 없음이 생명 있음에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현실은 어둠과 무질서와 죽음이 가득한 곳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둡고 무질서하고 죽음의 상태를 경험하지 아니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침울하고 부정적이고 혼란한 상태에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둠과 빛 사이에,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 죽음과 생명 사이에서 방황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어둠의 현실을 빛으로, 무질서의 현실을 질서로, 생명 없음의 현실을 생명 있음의 현실로 바꾸어줄 능력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긍정과 창조적인 언어의 습관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고, 혼돈의 상태를 질서의 상태로 바꿀 수 있으며, 없음을 있음으로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믿지 아니하고, 부정과 피동적인 언어의 습관으로 살아간다면, 어둠의 세력은 그나마 희미한 빛조차 삼키고 말 것이며, 극심한 혼돈과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며, 그나마 있던 한 달란트마져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에 우리 젊은이들이 민들레처럼 끈질기고, 강인하고, 생명력 있고, 예의범절하고, 쓸모 있고, 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고, 효도할 줄 알고, 약초 같고, 자립심이 강하고, 여기에 확고한 창조신앙으로 뿌리를 내리고 역경을 헤쳐간다면, 욥기서 8장 7절의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할 것을 믿으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된"(창 26:13)것과,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14년간 목동으로 일한 후에 마침내 거부가 된(창 31:1) 사건이 여러분의 사건으로 경험되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짐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힘겨운 것입니다. 그러나 자제력과 인내심과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지 않는다면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 후에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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