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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8-09 00:41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가정(엡 5:20-6:4)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604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조상과 어버이에 대한 은혜를 헤아리고 어른과 노인에 대한 존경과 보호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가정'에 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고, 가정에도 있고, 교회와 같은 인간공동체 속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또는 공동체나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한 경우가 더 많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보다는 지옥을 이루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가정의 달 속에 있는 어버이 주일을 맞아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가정을 이룰 수 있겠는가를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조건에 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는 고통이 없고,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고, 슬픔이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런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평화롭고 정의로운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의와 평화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어서 공존이 쉽지 않습니다. 평화가 살면, 정의가 죽고, 정의가 살면, 평화가 죽기 쉽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죄 지은 인간을 살려주자니, 정의가 희생되고, 죄를 벌하고 징계하자니, 사랑이 희생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죄 지은 인간을 벌하자니, 인간이 불쌍하고, 그냥 넘어가자니, 정의가 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범한 인간들을 용서하면서 또한 그들의 죄를 벌할 수는 없을가를 놓고 고민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하나님이 취하신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벌했다는 측면에서 정의를 살리고, 인간을 용서했다는 측면에서 사랑을 살리며 또 그들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평화보다는 정의를 살리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평화야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간섭하지 않고, 못되게 구는 사람이 있어도 모른척하고 넘겨버리면 되지만, 정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의는 상대방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쳐야 되기 때문에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것을 떠나서 분란이 생기고 원한이 생기고 평화가 깨집니다. 따라서 평화만을 원한다면, 정의를 포기해버리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없는 곳엔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가정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의를 살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가정에는 평화만 있지, 정의가 없기 때문에, 많은 가정에서 누리는 평화는 대개가 가식적인 평화 또는 휴전에 의한 일시적인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과 부인과 자식간에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절대로 참다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의는 가정에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는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공정한 보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돈을 버는 사람이 누구든 한 사람뿐일 때, 어떻게 나누어 쓰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번 사람 마음대로 쓰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냐, 아니면, 가족 구성원들이 필요에 따라 공정하게 나누어 쓰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돈을 움켜쥐고 최소 생활비만 내놓고, 나머지를 자기 멋대로 쓰면서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인색하게 굴고, 굴욕감을 준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가사노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냐, 아니면, 가사노동의 크기를 따져 가족 구성원들이 공정하게 분담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돈을 번다고 했을 때에 빨래를 한다든지, 설거지를 한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아기를 돌본다든지 하는 모든 가사노동을 부인의 몫으로 돌려버리고, 남편이 상전노릇을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보복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징계의 주체는 주로 아버지입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징계의 주체는 주로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징계가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버지이니까, 남편이니까, 선생님이니까 마구 때리고 욕설을 퍼부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피차에 인격적으로 하지 아니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약속 지키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평생 부인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남편이 부인을 배신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한 평생 남편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한 부인이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정의로운 것인가를 깊이 따져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편은 부인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정의로워야 합니다. 피차에 정의롭지 못하면, 싸움이 없다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결과를 보면, 아버지 중엔 자신이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2%나 됩니다. 그러나 자녀들 중에 의논상대로 아버지를 꼽은 사람은 불과 4.6%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말해주듯이 아버지들은 아들 놈들이 자기를 먼 친척 대하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미국의 남성학 전문가인 낸시 메이어는 저서 {아버지 마인드 스토리}에서 "아이만 사춘기를 겪는 게 아니다. 아이가 그 연령 대에 있을 때, 그 아버지 역시 사춘기 못지 않게 고민이 큰 인생의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다"며 "부자 또는 부녀간의 상호관계가 단절될 때 겪는 고통은 아이들보다 아버지 쪽이 훨씬 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 .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다."고 '아버지의 마음'에서 노래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힘이 세다고 아버지를 때려 이를 부러뜨리고,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어머니의 입술을 때려 터지게 했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거추장스럽다고 노부모를 외딴섬에 버렸다면,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냐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린 영수는 어머니에게 한 장의 청구서를 제시했습니다. 청구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된 값 2천원, 집에서 심부름 한 값 1천원, 엄마가 음악공부 하라고 하여 피아노 공부한 값 5백원, 집에서 청소한 값 1천원, 기타 동생을 돌본 값 1천원, 계 5천 5백원."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저녁식탁 위에 5천 5백원과 함께 한 장의 편지를 놓았습니다. "엄마가 매일 밥지어 준 값 3천원, 매일 세탁해 준 값 3천원, 잠재워 준 값 4천원, 기타 바느질해 주고 돌봐준 값 3천원, 계 1만 3천원. 그러나 엄마는 영수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 무료." 여러분, 어느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영수의 청구가 정의로운 것입니까? 엄마의 무보수 사랑의 봉사가 정의로운 것입니까?

하나님은 절대적 권위와 주권을 쥔 천상천하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천지만물을 지으셨을까요? 하나님 이외의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 특히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고등동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큰 위협이 되고 훼손이 되는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천사의 반역과 인간의 반역이 바로 그것을 입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감행하신 것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각오하고 수용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제한과 자기 낮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역을 줄여 남을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자신의 권한을 줄여 남이 그 권한을 나누어 받게 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자신의 신분을 낮춰 남과 동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서 홀로 존재하기를 거부하시고, 남과 함께 사귀고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자신이 손해를 입고, 피해를 볼망정, 피조물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천사와 인간에게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귐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을 만들어 자유로운 사귐과 공존을 원하셨던 하나님은 인간의 배반으로 분노와 굴욕감을 느끼셨지만, 인간을 무작정 벌하기보다는 한층 더 자신을 낮춰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후에는 지체 높은 사람과 돈 많은 사람들과 사귀지 아니하시고, 더 한층 자신을 낮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은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간들을 벌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과 진정한 사귐과 자유로운 공존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철저히 자신의 권한과 권리를 제한하시고 친히 그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는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과 화목하셨습니다.

자칫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을 예수 한 분의 사건으로 보아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나사렛 사람 젊은 목수 예수의 사건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아들 예수의 고난에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동참하셨습니다. 아들이 당하는 고통은 곧 아버지 하나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들 예수의 순종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함께 동참되어진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감히 우리 인간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아들 하나님인 동시에, 지금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각자가 독자성과 주체성을 가진 세 인격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무한한 사랑과 상호 존중 속에서 한 몸을 이루고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자의 인격적 고유성과 함께 서로 구분되어 있으나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부가 있는 곳에는 성자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자가 있는 곳에는 성부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령이 있는 곳에는 성부와 성자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공유하며 모든 일들을 함께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내면의 관계를 우리는 가정에서 만들어가야 합니다. 가정은 남편과 부인과 자녀들이 각각의 주체성과 고유성을 가지면서 무한한 사랑 속에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부인은 부인이며, 자녀는 자녀이지, 남편이 부인이 되거나 부인이 남편이 되지 않습니다. 또 자녀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는 자신의 인격적 고유성과 독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깊은 사랑의 영 가운데서 한 몸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들은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기쁨과 슬픔은 어머니와 자녀들의 기쁨이자 슬픔이요, 어머니의 기쁨과 슬픔은 곧 아버지와 자녀들의 기쁨이자 슬픔이어야 합니다. 또 자녀들의 기쁨과 슬픔은 곧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쁨이자 슬픔이어야 합니다. 가정 속에는 고립된 개인도 있어서는 안되지만, 군림하는 독재자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정은 명령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평등과 일치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 속에는 개인주의가 있어서는 안되지만, 개인의 존재가 무시되는 집단주의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가정에는 희생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순종과 상호 존중만이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부터 6장 4절의 말씀은 가정의 특성인 희생적인 사랑과 자발적인 순종과 상호 존중에 관해서 아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심같이 하고,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며, 자기 남편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또 자녀들은 주안에서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피차 사랑하고 존중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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