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자 그리스도16: 풍랑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2)(계 2:1-7)
폭풍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1)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은 에게해 동편 곧 소아시아의 서해 지역에 소재했던
교회들이다. 이 지역에는 말발굽 형태로 일곱 교회가 대략 80KM 정도씩 떨어져 위치하고 있었다. 시계 방향으로 에베소 교회는 8시, 서머나
교회는 10시, 버가모 교회는 12시 방향에, 두아디라 교회는 1시, 사데 교회는 2시, 빌라델비아 교회는 3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5시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을 배에 비유한다면, 로마제국이란 험한 바다에서 강력한 박해라는 폭풍을 만나 좌초위기에 몰려 있었다. 말
그대로 바람 앞에 등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가복음 4장 35-41절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사가 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실 때에 피곤하셨던지 잠이 드셨다. 그 사이에 폭풍은 몰아 닥쳤고 배는 위태로웠다. 제자들은 몹시 당황했고 두려워했다. 그 때에
제자들은 능력의 주님이 배에 계신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깨웠다.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은
상황이 위급함을 아시고 바람과 바다를 향해 서신 후 명령하셨다. "잠잠 하라. 고요 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여졌다.
이 모습이 계시록 1장에 소개된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다. 박해와 시련이라는 엄청난 폭풍과 전복될 위급한 상황에서 요한은 믿음의 눈을
뜨고 폭풍 배후에 버티고 서신 폭풍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를 보았다. 믿음의 눈으로 본 이 환상에 근거해서 요한은 아무리 거대한 박해와 시련의
물결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몰아 닥쳐와도 이 그리스도께서 지키고 계신 한 든든하며, 그분께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한 결코 전복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메시지를 계시록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여러 형태의 배 곧 가정이란 배, 교회라는 배, 회사라는 배, 국가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고, 자주 폭풍을 만난다. 이 폭풍이
크건 작건 간에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쩔 것인가? 몰아치는 폭풍과 파도만 바라보고 놀라 자빠질 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눈을
뜨고, 이 풍랑을 향해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할 수 있고, 또 우리를 도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능력의 예수님을 의지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이 탄 배에 함께 계시다는 점이다. 우리가 폭풍을 만난 바로 그곳에 그분이 함께 계시다는 점이다. 폭풍을
만난 우리의 가정에도, 폭풍을 만난 우리의 교회에도, 회사에도, 국가에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떴을
때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폭풍을 잔잔케 하실 그리스도(2)
요한이 환상으로 본 인자는 우리를 사랑하사 피로써 죄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사랑의 예수님이시다. 이 분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분이시다. 이 분은 힘
있고 전능한 심판주요, 재림주이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불꽃같은 눈과 단련된 발과 예리한 말씀의 검과 해처럼 빛나는
힘 있는 모습을 하신 구원의 주요, 교회의 목회자들을 손안에 넣으시고, 교회를 왕래하시며, 교회를 지키는 구세주이시다. 이 예수님이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의 폭풍을 능히 잔잔케 하실 것이다.
출애굽기(주전 15세기)는 약속의 땅을 찾아 고난의 길을 떠난 히브리인들의 광야이야기이다. 히브리인들이 40년간 광야(사막)에서 겪었던
말할 수 없는 시련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희망했던 가나안땅을 끝내 차지하고 그곳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끝까지 야훼를
신뢰했기 때문이고, 야훼의 자비를 입어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구름기둥은 성령님의 예표였다.
오디세이아(주전 8세기)는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고향 땅을 찾아 고난의 길을 떠난 오디세우스의 항해이야기이다. 오디세우스는 숫한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전쟁터에서 10년과 고향으로 향하던 바다에서 10년을 보낸다. 이 영웅이 20년 만에 고향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신
아테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테나는 ‘멘토르’로 변신하여 오디세우스에게 나타나 그가 위기를 만날 때마다 격려하였다. 아테나 역시
그리스로마인들에게는 성령님의 예표였다.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시대에 신화를 만들고 신봉했던 그리스로마인들은 복음을 접한 후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아온 사람들이다.
아이네이스(주전 1세기)는 트로이패망 때 아이네아스가 신들의 계시를 따라 소수의 트로이인들을 이끌고 새로운 트로이건설을 위해서 미지의 땅을
찾아 험난한 길을 떠난 트로이인들의 항해이야기 또는 로마건국이야기이다. 그들은 조국 트로이가 멸망한 이후 7년이란 시간을 험난한 바다와
싸워야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한 수호신들의 자비를 입어 새 땅에 정착하여 로마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은 스토아철학의
영향으로 자신의 몫으로 태인 숙명의 십자가를 받아드리는 동시에 그 숙명을 수호신들에 의지하여 잘 감당하려고 했다.
에베소 교회
그런 그들을 격려한 글이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이다. 성서적으로 보면,
모세오경, 욥기, 다니엘서, 사복음서가 고난을 겪는 신앙인들에게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라’는 격려와 응원과 권면의 글들이다. 요한계시록은
앞서 열거한 글들보다 더 적나라하게 그리스도인들의 험난한 천로역정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권면의 글이다. 천성을 향한 항해는, 광야 길과 바닷길이
험하고 거친 길이듯이, 험난한 가시밭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마귀는, 마치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에게 속삭였듯이, 마치 변 사또가 성춘향이에게
은밀히 제안했듯이, 안락한 삶을 유혹한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비록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그들이 신뢰하는 성삼위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천성에 입성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천성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믿음의 끈을 놓지 말자. 희망의 끈을 놓지 말자. 인내의 끈을 놓지 말자는 권면이다.
2-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주신 말씀들은 공통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간략한 인자의 특징이 소개된다는
점이고, 둘째는 각 교회는 행위에 따라서 칭찬과 권면과 책망을 받는다는 점이며, 셋째는 매 교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강한 충고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는 각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 주실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시록 2장 1-7절은 소아시아 최대 도시 에베소에 소재한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생사여탈권을 쥔 분으로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서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점을 지적하셨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징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혼인(사랑)서약으로 관계가 맺어진 데 있다. 만일 사랑이 식는다면, 이 혼인이 깨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선민사이에 맺은 혼인(사랑)서약은 남녀사이의 애정문제하고는 크게 다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사랑이 있고 없고는
애정문제가 아니라, 생사문제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권태기에 빠진 에베소 교회에 첫사랑을 회복하라(2:5)는 권면을 강한 어조로 주고 있고,
끝까지 그 사랑을 유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줘서 먹게 하겠다(2:7)고 약속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