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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5-06 08:51
하나님과의 사귐05: 형제 사랑(요일 2:7-17)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7,692  

하나님과의 사귐05: 새 계명(요일 2:7-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요한일서에 요한이 편지를 쓴 목적에 관한 언급이 10회 나온다. 그 가운데 8회가 2장에 언급되었다. 1장 4절에서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5장 13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고,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썼다고 했다.

2장 1절에서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12-13절에서는 “자녀들아(children),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아(fathers),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young men),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다. 요한은 12-13절에서 “쓰다”를 현재형으로 말한 반면, 14절에서는 “쓰다”를 과거형으로 말하였다. “아이들아(children),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fathers),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young men),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하였다. 21절에서는 다시 현재형을 써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라고 부르면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함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으로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쓴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 편지의 목적이 그리스도인들을 믿음 위에 굳게 서게 할 뿐 아니라, 이미 믿고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려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요한은 소식을 전하는(proclaim) 목적을 3회 언급하였다. 1장 1-3절에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본 “생명의 말씀”(혹은 “영원한 생명”) 곧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분”을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사귐과 성도의 사귐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장 5절에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에서 “옛 계명”은 모세가 전한 계명, 곧 레위기 19장 18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를 말한다. 이 계명은 예수님께서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39-40)에 속한다고 하셨듯이, 십계명 5-10계명의 압축이다. 바울도 로마서 13장 9절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하였다.

“새 계명”은 제2모세 혹은 재림 모세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 곧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를 말한다. 이것이 7-8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의 의미이다. 그리고 요한일서 2장 1-2절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이 인류에게 보이신 참 사랑이 예수님과 요한이 말한 “새 계명” 곧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혹은 형제를 어떤 방법으로 사랑해야 할지에 대한 몇 가지 표준이 된다는 점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은 ‘먼저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1-2절에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다.”고 했고, 4장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했으며, 로마서 3장 25절에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유는]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고 했다.

둘째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권한과 자유를 제한하시고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인간의 죄와 허물을 사하기 위해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인간을 대신해서 벌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셋째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색깔에 차별이 없었다는 점이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가진 사람이나 갖지 못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에게 공평하셨다는 점이다.

넷째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은 정의로웠다는 점이다. 그 정의로운 사랑은 죄를 벌하신 것과 그 벌을 대신 받으신 것에서 나타났다. 이 정의로운 사랑이 바로 ‘아가페’이다.

그리고 3-6절은 이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을 본받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와 함께 빛과 생명과 사랑과 진리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9-11절은 “빛 가운데 있는” 자와 “어둠에 있는 자” 그리고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로 나뉜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빛 가운데 있는” 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고,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자이다. 반면에 “어둠에 있는 자”는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이고,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요한일서에는 ‘빛과 어둠’에 대한 말씀이 많다. 빛이신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1:5).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1:6). 반면에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1:7). 요한복음에도 ‘빛과 어둠’에 관한 말씀들이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고(요 8:12, 9:5), “사람들의 빛”이시며(요 1:4),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요 12:46). 그러므로 “빛을 미워하는” 자는 “악을 행하는 자”이고(요 3:20),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요 3:19).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는” 자이고(요 12:46), “생명의 빛을 얻을” 자이다(요 8:12). 그리고 이 빛에 거하는 자는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이다(요 11:9).

요한일서에는 ‘사랑과 미움’에 대한 말씀이 많다. 사랑하는 것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다(3:18).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이다(3:10).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3:14).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고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이다(3:15).

15-17절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과 “세상으로부터 온 것”으로 나뉜다. 15-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우리에게 있는 “대언자...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2:1, 요 17:8),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이시다(요 15:26). 반면에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3:1). 세상은 믿음의 식구들을 미워한다(3:13).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다(5:19). 세상은 거짓 선지자가 나오는 곳이다(4:1).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와 있는 곳이다(4;3). 따라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것이다(2:2). 세상은 구원받아야할 대상이지, 우리를 구원하는 곳이 아니다(4:9, 4:14). 믿는 자들에게 세상은 믿음으로 정복해야할 대상이다(5:4).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이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4:8, 12, 16). 따라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4:7).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다”(4:20).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계명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한다”(4:11, 21). 또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는 빛이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다(요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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