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산 돌05: 산 소망(4)(벧전 2:1-8)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1-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말씀에서 강조는 “사모하라”에 있다. 그리고 “갓난아기들”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린” 곧 그 같은
말을 할 줄도 모르고 하지도 않는 순수한 자들이고,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자들이다. 따라서 “갓난아기들”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깨끗하고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그리고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1장 24-25절에 연결되는데, 풀과 풀의 꽃처럼 그 영광이 마르고 떨어지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세세토록 있는 “주의 말씀”을 말한다. 베드로는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란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주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들은 성도들의 믿음이 구원을 이루기까지 충분히 성장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성도라면 배고프지 않도록, 영양분이 부족하지 않도록, 무럭무럭 잘 성장하도록 순전하고 신령한 주의 말씀들을 밥을 챙겨먹듯이
반복적으로 챙겨 먹어야한다.
2절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에서 “신령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로써
‘로고스’(λόγοs)의 형용사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이 말이 “영적”이라고 번역되었다. 여기서 “영적” 혹은 “신령한”은 영어성경에서
“reasonable”(KJV, NKJV), “true”(TNIV), “spiritual”(NASB)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번역되는 이유는
‘로기코스’가 인간에게만 있는 합리적이고 신적인 이성과 지성을 나타내는데 쓰였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지성, 이성, 학문을 뜻하기도 하고,
변화의 주체지만 정작 스스로는 결코 변치 않는 변증법적 도리나 법칙에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해석하면서
그 “말씀”은 변증법적 도리나 법칙조차 뛰어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셨으며, 만물의 근원자라고 하였다(요 1:1-4).
야고보는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17)고 하였다. 요한은 그 “말씀”이 끝없이 변하고 회전하는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을 주시는 독생자 하나님이시다고 하였다(요 1:5-18).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40?∼?BC)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이 얼음이 되듯이 성질은 변하지 않고 형태만 변하는 물리적 변화가 있는가하면, 산소와 수소가
만나서 물이 되는 경우처럼 형태뿐이 아니라, 성질까지 변하는 화학적 변화도 있다. 이런 모든 변화는 질서에서 무질서의 극대화로 진행되는데, 이
법칙을 엔트로피법칙 또는 제2열역학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하면서, 흘러가는 강물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변한다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솔로몬처럼 만물의 끝없는 이 변화 속에서
인생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벗어난 영원토록 불변하는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이 진리를
'로고스'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로고스’는 우리말로 '법칙' 또는 '도리'를 뜻하는데, 이 법칙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스스로는 결코 변치
않는 변증법적인 것을 말한다.
4-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에서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다”는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배로운 산 돌”이라고 한 것은 그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살아계신
‘로고스’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변증법적 도리나 법칙’을 뛰어넘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빛을 주시는 독생자 하나님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에서 “신령한 집”은 성전을 말하고, “거룩한 제사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을 말한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담(또는 휘장)을 상징한 당신의 육체를 십자가에서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길을 열어놓으신데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치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성소의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예배했던 것처럼, 누구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제사장의 직무에 충실해야한다.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6-8절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에서 “모퉁잇돌”이란 유대인들의 건축에서 모퉁이에 놓이는 커다란 ‘기준 돌’을 말한다. “건축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퉁잇돌이 되셨음을 말한다. 이 사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오늘날까지도 실제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반면에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한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배”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참 소망과 변함없는
반석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의 가르침과 전통은 문자적 이스라엘 곧 유대교의 모퉁잇돌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통은 영적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교의 모퉁잇돌이다.
여기서 모퉁잇돌이란 기준을 말한다. 따라서 모세가 유대교의 모퉁잇돌이란 말은 옛 기준인 율법을 말한다. 반면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교의 모퉁잇돌이란
말은 새 기준인 복음을 말한다.
예수님은 인류의 ‘산 소망’과 ‘산 돌’(새 기준)이시고, 인류가 피할 ‘바위’와 ‘산성’이시며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다”(시 18:2).
‘산 돌’(living stone)이란 새롭고 영원한 기준,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변함이 없는 기준을 말한다. 모세의 가르침과
전통은 일시적인 잠정적인 옛 돌 곧 옛 기준이다.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전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산 돌 곧 새 기준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새 기준의 본래성과 순수성과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들이 펼치는 운동을 환원운동(Restoration
Movement) 또는 신약성경교회(New Testament Christianity) 회복운동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