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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4-10 08:46
믿음이 이끄는 삶(막 5:21-4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10,131  
믿음이 이끄는 삶(막 5:21-43)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5장 21-43절의 말씀은 마태복음 9장 18-26절과 누가복음 8장 40-56절에도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 곳의 내용을 종합해서 믿음이 이끄는 삶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복음서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그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어린 딸을 “열두 살 먹은 외딸이”라고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곡하게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라 가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셨습니다. 마가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다른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무리 가운데 섞여 있던 사람으로 십이 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혈루증을 한방에서 말하는 자궁근종 곧 '석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질병이 원인이 되어 하혈이 멈추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병으로 인해서 여인은 용하다는 의사들을 다 찾아다니며 몸을 내보였지만, 가산만 탕진한 채, 고침을 받지 못했고, 병세만 악화되어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 달이나 두 달도 아니고, 십이 년간이나 피를 흘렸으니, 가정이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사회에서는 정결법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혈루증을 앓는 이 여성은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성이 무리 중에 섞여서 밀고 밀리면서 사람들과 접촉했다면 그것은 분명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을 보면, 유출병에 대해서 자세한 규율을 정해 놓고 있는데, 유출병이 있는 자 본인은 물론이고, 그가 접촉했던 모든 것들과 또 그가 접촉한 것들에 접촉된 자들까지도 다 부정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대로 말하면, 이 여인이 만진 예수님은 물론이고, 그와 접촉한 모든 자들 또한 부정한 자가 됨으로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합니다. 이 여인이 당한 육신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 겪었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능히 짐작케 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두 여성에서 우리는 12년이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여성은 열두 살 먹은 회당장의 외딸이고,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며, 다른 여성은 나이는 알 수 없지만,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했고, 병을 고치려다가 가산만 탕진했으며, 여전한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이 12란 숫자에 어떤 의미가 숨어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12란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두 여성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볼 때 신부 곧 여성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 여성 곧 이스라엘이 지금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12살 된 외딸은 제국들의 속국으로만 존재해온, 그러니까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는 유대교와 율법의 현주소를 연상시킵니다. 회당장은 유대교회당의 장로로써 율법에 밝고, 율법을 가르치며, 유대교예배를 비롯해서 회당에서 주관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린 딸을 살려내지 못했던 것처럼, 유대교와 율법이 또 그 누구도 그토록 해방을 기다리는 이스라엘 민중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의 믿음이 귀한 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그의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릴 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시란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 엎드려 간청한데 있습니다. 회당장이 자신의 한계와 딸의 위급함을 알았다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그의 딸에게 생명을 주실 분이란 사실을 알고, 믿고, 간구했다는 점이 회당장의 딸의 치유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란 생각이 듭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마음에 간직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 소중한 믿음이 죽어가던 딸을 살렸습니다. 믿음이 이끄는 삶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역시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성은 속으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이스라엘을 연상시킵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이 여성이 치유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고, 또 원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가져다대는 이 여성의 절박한 심정이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게 요청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유대인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중병에 걸린 자들이었으면서도 치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썩어서 냄새나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그런 상태인지조차도 모르고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병을 고치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배고픔을 모르고서야 어찌 빵이 귀한 줄 알겠으며, 중병에 걸려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건강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속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모르니, 어찌 치유에 대한 노력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천 년 전 예수님시대에 살았던 그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가져다댔던 이 여성의 심령과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바로 그 가난한 심령, 곧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가난한 심령과 믿음은 ‘죄’라는 중병에 걸렸음을 스스로 깨우치고 고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한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무엇에 홀린 듯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주님께로 다가서게 하였고, 그 옷깃에 손을 대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절실함이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간절함, 애절함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언가 참된 것을 얻고 그것으로 채우려하는 그 가난한 심령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깊은 은혜를 체험치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밭에 감춰진 값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달려가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밭을 사듯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이 전 재산을 처분하여 그 값진 진주를 사듯이, 이 여인에게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다는 믿음과 그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거는 올인정신(all-in spirit)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과 정신이 그녀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한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는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인처럼 믿음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자기부족을 모릅니다. 내 진정한 처지와 형편이 어떠한가를 모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다가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믿음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가를 모릅니다. 물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가치를 모르니 허울에 허례허식에 또는 가짜에 매어 인생을 살아갑니다.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모릅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죽음의 길이요 천 길 낭떠러지로 향하는 길인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서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에 깊이가 없습니다. 깊은 인생의 맛을 모릅니다.
현대인들의 더 큰 병은 자신의 현 정신적 영적상태를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모르는 것뿐 아니라 설사 안다하더라도 그것을 고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멀리하고 믿음을 멀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대한 온갖 편견과 오해들을 열심히 열거하며 왜 자기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지 신앙을 갖지 않는지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12년간 혈루병을 앓았던 한 여인처럼 고침을 받겠다는 간절함이 없이는 참 자유와 참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손을 뻗어 그분의 옷깃에 가져가지 않고서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온전한 건강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는 주님의 선포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12년간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성은 참으로 용기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병을 고침 받겠다는 강한 의지가 유출병에 대한 율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주님께로 달려가게 하였습니다. 이 여성은 “그 겉옷만 만져도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이끌려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긍정의 믿음, 할 수 있다는 믿음, 용기 있는 믿음, 적극적인 믿음이 그녀를 삶에로 이끌었습니다. 12년간 창피스런 고통의 세월을 보냈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고, 주님의 손이 와 닿기만을 피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먼저 달려가 주님의 겉옷 가에 손을 댄 그 믿음이 그녀를 살렸습니다. 믿음에 이끌리는 삶이 그녀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에 무슨 치유의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가졌지만, 그 옷으로 인해서 그들이 무슨 특별한 체험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이끌려 예수님의 겉옷 가에 손을 댄 이 여인은 텅 빈손임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에 이끌렸던 회당장 야이로도 죽은 딸이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주님의 외침에 죽은 소녀가 살아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달리다굼,’ 우리 주님의 이 한마디에 잠자던 우리 영혼이 벌떡 깨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죽어가던 우리 영혼에 생명의 기운이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겉옷 가에 손을 내미는 간절한 심정을 갖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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