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작성일 : 05-07-02 18:04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롬 12:3-13)
|
|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9,847
|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롬 12:3-13)
로마제국 당시 교회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헬라인들로부터도 이단시 취급당했고, 탄압을 받았던 아주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겨자씨와 같은 공동체가 10여 차례의 큰 박해를 당하고도 300여년 만에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대제국 로마를 기독교왕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런데 그 이유들이 의외로 매우 단순합니다. 1965년 영국인 에릭 도즈(Eric R. Dodds) 교수가 ꡔ불안시대 속에서의 이교도와 기독교도ꡕ(Pagan and Christian in an Age of Anxiety, Cambridge University Press)란 책을 냈는데요, 도즈 교수는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는 배타적 신앙이 불안시대를 살던 당대의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되었다는 점,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시하는 구원에는 남녀노소빈부귀천의 어떠한 차별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
셋째, 사람들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점,
넷째, 일체감이 강한 그리스도인공동체에 가입하게 되면 의식주는 물론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우리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작된 지 3년밖에 되지 아니한 비록 겨자씨와 같이 작은 공동체지만, 역시 불안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나름의 독특한 메시지를 전한다면, 작지만 순수한 교회를 지향한다면, 때가 이르면, 쓸 만한 재목의 나무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도록 합시다. 특별히 오늘 임직하시는 집사님들께서 이 일에 힘을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의 ‘독자 여러분께’란 글을 보면, “적잖은 사료가 보여주고 있듯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까요?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로마인이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 광대한 영역을 그토록 오랫동안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 덕분이라고. 과연 그럴까요?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인도 결국 쇠망의 길을 걸은 것은 패권을 장악한 민족이 흔히 빠지기 쉬운 교만 때문이었다고. 과연 그럴까요.... 왜 로마인만이 그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썼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같은 책 ‘프롤로그’에서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폴리비오스는 주전 2세기 초중반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왜 그리스는 스스로 무너져 가고, 왜 로마는 계속 융성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그로 하여금 20여 년 동안 40장으로 이루어진 역사란 책을 쓰게 했다고 합니다. 폴리비오스 자신이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게으름뱅이가 아닌 한, 불과 53년 만에 로마인이 이룩한 이 위업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또한 어떤 정치체제 아래서 가능했는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폴리비오스가 말하는 53년이란 주전 202년에 한니발의 패배로 끝난 제2차 포에니 전쟁부터 주전 146년에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끝난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해까지를 헤아린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 50여 년 동안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 이후 지중해 세계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역사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는 말합니다. 로마는 53년 전에 난데없이 출현한 나라가 아니며,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는 재력이나 인력이나 사이즈나 능력 면에서 큰 교회들에 크게 뒤지며, 프로그램이나 활동에서도 많이 뒤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브랜드 가치도 매우 낮은 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들보다 낫은 것이 있다고 말할 자격조차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 우리 자신이 우리 교회에 대해서 자긍심을 갖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가 표어로 내세운 것처럼 철저하게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교회’(of the Christ)가 되고, ‘신약성경을 표준삼는 교회’(by the Bible)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인뿐인 교회’(for the Christian)가 되고, 그리고 ’빛과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with the Gospel)가 된다면, 저들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또 하나, 우리 성도님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우리가 한 몸이지만,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지체들인 것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음으로” 하고,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쓴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교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에 여러분들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고 있다면,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면, 그 진실하고 참된 신심이 바로 그리스제국을 쓰러뜨리고 로마제국을 세워 천년의 세월동안 팩스 로마나(pax romana)를 이룬 힘처럼, 로마가 난데없이 출현한 나라가 아니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도 장구한 세월 속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단비를 뿌리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도록 합시다.
스티븐 코비의 원칙중심의 리더십, 제7장을 보면, 마하트마 간디는 이 세상에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7가지 큰 죄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이요, 둘째는 ‘양심이 결여된 쾌락’이며, 셋째는 ‘성품이 결여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업’이며, 다섯째는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이며, 여섯째는 원칙이 없는 정치요, 마지막 일곱 번째는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희생이 없는 종교 부분에서 코비는 말하기를, “적극적인 교회 활동은 희생 없이도 가능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인 복음을 따르는 것은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또 남을 돕기 위해서는 자만심과 편견을 버리고 봉사에 따르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교회가 위계질서를 갖춘 또 하나의 제도로 보이는 한, 그 구성원들이 진정한 봉사정신이나 신앙심을 가지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 중심도 원칙 중심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의 직책은 가톨릭교회가 견지하는 것처럼 위계질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봉사하는 직책이란 사실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오늘 임직하시는 집사님들께서는 겸손한 가운데 성 프랜시스의 기도처럼, 평화의 도구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되시기를 바라며,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직책은 명예직도 아니고, 권위직도 아닙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봉사자로 세운 구별된 성스러운 직책입니다. 신명기 10장 8절은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구별하여 언약궤를 메게 하시고, 성막과 관련된 임무를 부여받아 하나님과 백성을 위해서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민수기 3장 12절과 4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레위인은 내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부르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부르심을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제사장에게 속하여 제사장 앞에서 성막에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지시를 받아 제사장을 돕고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성막 일의 위계 질서상 레위인들은 제사장에게 철저히 순종하며 봉사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집사들과 성도들은 영적 레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집사님들과 성도님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땅에 오신 대제사장이요,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좇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기뻐했으며, 그분을 섬기게 된 것을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종 혹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어떤 다른 사람의 종이 된다면 이는 매우 수치스런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충성이란 말은 신실 하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굳게 지키라는 뜻입니다.
광야시대에 레위인들은 법궤를 메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다른 성막 기구처럼 수레에 실어 운반하지 못했고, 친히 어깨에 메고서 운반하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일할 때에 육체적 정신적 힘을 많이 쏟으면 그 일의 성과가 좋게 나타나고, 반대로 소홀히 하면서 몸을 사릴 때에는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는 예가 많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할 때 최선의 수고와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을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풍성한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임직 받는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