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산 돌02: 산 소망(1)(벧전 1:3-5)
“산 소망”
산 소망(a living hope)은 새 소망(a new hope)을 말한다. 구약성경은 문자적
이스라엘의 ‘그 소망’(Ha-Tikvah) 곧 ‘옛 소망’에 관한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영적 이스라엘의 ‘산 소망’ 곧 ‘새 소망’에 관한
말씀이다. 따라서 ‘그 소망’ 곧 ‘옛 소망’은 ‘산 소망’ 곧 ‘새 소망’의 그림자요 모형이다.
베드로가 소망에 ‘산’ 곧 ‘살아있는’(living)이란 수식어를 붙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산 소망’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인류에게는 살아서 역사하는 구원의 소망이란 뜻이다. 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에서 알 수 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신 분이 그리스도님을 살리신 성부
하나님이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성자 그리스도님이시며,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새롭게 해주시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살아계셔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셨고, 또 영원히 살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살아있는’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실효성이 영원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이후 수천 년에 걸쳐 대대로 절절히 희망했던 ‘그
희망’(Ha-Tikvah)처럼 썩거나 더럽혀지거나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에 대한 희망, 바꿔 말하면, 적에게 빼앗기거나 짓밟히거나 망하지 않는
하늘 가나안땅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에 ‘살아있는’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4절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셋째,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에 ‘살아있는’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5절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예수님의 강림은 그 희망(Ha-Tikvah)의 새 출발점
예수님의 강림의 의미들 가운데 한 가지는 그 희망의 새 출발점이다. 복음서들 특히 마태복음이 그것을
말하고 싶어 했다. ‘그 희망’이란 아브라함이 나이 일흔 다섯에 가나안땅에 나라를 세우고 싶어 한 희망을 말한다. 그런데 그 때 아브라함은
무자식이었다. 늙고 자식도 없었던 때에 품었던 가능성이 희박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그 희망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모세오경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그 희망’은 아브라함이후 3천8백년이나 된 오래 묵은 것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살아남아
있고, 그 희망의 내용이 그들의 애국가에 담겨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성취할 영웅이 다름 아닌 장차 오실 메시아 혹은 모쉬아크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2천 년 전에 선포된 예수님을 이미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그 희망을 가시적으로 성공시킨 인물이 모세였다. 그리고 그 희망이 절정에 달했던 나라가 다윗왕국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고 왕국은 북과 남으로 쪼개졌고, 북이스라엘왕국은 200여년 만인 주전 722년에 멸망하였으며, 남유다왕국은 340여년 만인 주전
586년에 멸망하였다. 출애굽 후 가나안땅에 나라를 세운지 860여년 만에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원점이 이집트의 노예에서
바빌로니아의 노예로 바꿨을 뿐이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나이 많고 늙은 무자식 상태에서 처음 품었던 그 희망, 곧 성취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그 희망을 다시 품기 시작하였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그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가능성이 제로인 상태, 절망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
깊은 흑암의 상태, 무질서가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희망은 아브라함의 희망이 430(혹은 645)년 만에
성취되었듯이, 유대인들의 희망은 580여년 만에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이 신약성경이 선포한 메시지이다. 또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그 희망의 새 출발점인 것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그 희망의 성취가 최악 가운데 최악의 상태인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이뤄졌듯이, 예수님 탄생이 가져온 제2희망의 성취도 로마제국의
압제라는 사실상의 노예생활에서 이뤄졌다. 모세가 이집트에 등장한 시기처럼 예수님의 등장시기도 흑암과 절망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제2, 제3의 떠돌이들을 위한 그 희망
유배지에서 조상들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모세오경의 이야기는 엄청난 자극제가
되었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겪었던 이방인들의 핍박과 경제적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이 바벨론(페르시아)탈출 세대가
고토에서 겪었던 어려움은 900여 년 전 이집트탈출 세대가 광야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가나안부족들과의 전투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떠돌이와
노예들인 조상들이 극한의 시련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들어가는 영웅적 광야시대의 이야기는 수천 년에 걸쳐 제2, 제3의 떠돌이
광야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그 희망’(Ha-Tikvah) 자체였다.
마찬가지로 2천 년 전 예수님이 강림하시고 30대에 이르러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보좌에 앉는 영광을 누리시는 영웅적
이야기는 매일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희망’ 자체이다. 베드로전서 1장 21절,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는 말씀은 앞선 유대인들 이야기와 같은
뜻이다. 3-4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하늘 가나안땅에 있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것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고 했고, 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신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근거인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데 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데 있다.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을 믿는데 있다. 우리들의 삶은 마치 주검처럼 실망과 좌절과 고난과 흑암과 무질서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 상태 곧 용광로
속과 같은 처지에서 건져내 주시고 살려내 주시며, 영광을 주시고 산 소망을 주실 분이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믿어야한다. 우리의 믿음은 용광로란
시련을 통해 단련된다. 불같은 시련을 이기고 단련된 믿음은 금보다 귀한 것이어서,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