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목사(1913.05.06~1957.04.25)
정찬성 목사는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반능(半陵)이 고향이다. 친구인 이학재(감리교 장로)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집배인이었다. 낮에는 편지를 배달하고 저녁에 교회를 다녔다. 일제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정찬성은 신앙에 어긋난다면 가미사마에게 절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다리가 얼음 속에 박혀 부상을 입게 되었다. 치료를 받기위해 청주 모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 병원에서 성경책을 주며 읽도록 권하였다. 마침 교회를 다니고 있던 터라 기도하기를, “내가 여기서 병을 낫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고 했는데, 기도한 후에 정말 다리가 낫게 되어 김용선 자매와 결혼까지 하였다. 결혼하고 나서야 김용선은 정찬성이 다리를 조금 전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정찬성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노방전도를 다녔는데, 왜경들이 늘 추적하였고, 김상호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 어른들의 핍박도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그는 믿는 사람들(목사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청주 남조동, 대전 신탄진, 충주로 이송되면서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처형이 사는 만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만주에서는 산에 올라 초근목피 하였고, 구두닦이 통을 만들어 왜경의 눈을 피해가며, “일본의 가미사마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 무렵에 만주 길림성에서 김은석 조사(전도사)를 만났다.
해방 후 고향인 충북 괴산군 불정면으로 돌아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연못골 자택에서 반능교회를 하다가 적산건물인 사립학교를 구입해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만주에서 만났던 김은석과 연락이 닿아 부강에서 해후하였다.
정찬성은 고려통신신학을 수료하였고, 1946년에 시작된 초창기부터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1948년에 신탄진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6.25전쟁을 만났다. 전쟁 중에 김정만 목사(정찬성을 스승으로 생각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1950년 겨울에 북한군에 잡혀 밤새 고문을 당하였다. 북한군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자 밤새도록 총대로 구타하였다. 아침에 북한군은 예수 믿지 않을 사람은 이쪽으로 나오라고 말하고, 남은 사람들을 향해서 총으로 난사하였는데, 당시 정찬성은 기도를 하느라 머리를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총알이 살짝 빗나가면서 구사일생하였다. 총알 세례를 받고 난 후, 눈을 뜨고 자기 몸을 꼬집어보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찬성은 충청지방에 7-8군데 교회를 세웠다. 해방 후 고향인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돌아와 외령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고, 1948년에 예배인도 차 심방하던 충북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동막교회(현 시골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소속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켜 1949년 4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시무하였으며, 1951년에는 김은석, 최춘선과 함께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조선기독교회를 조동(현 동량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켜 건지부락 산 밑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여 건립하였다.
그밖에도 소태 그리스도의 교회, 삼방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정찬성은 1951년 5월 15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구 마을에 이흥식 전도자가 조남철의 가정에서 1950년 3월 19일에 시작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0월까지 1대 목회자로 섬기다가 이신에게 넘겼다. 이신은 그곳에서 김은석, 함태영과 함께 광주에서 하던 신학교를 이어갔고, 정찬성도 참석하여 공부하였다. 정찬성은 이 교회에 부임하기 위해서 약 400여리 떨어진 곳에서 오촌 조카와 가족들을 데리고 간단한 짐만 손수레에 싣고 14일 걸려 이사하였다. 그곳으로 가게 된 동기는 한 독지가로부터 수천 평의 땅을 헌납 받아 5촌 조카(정석기 장로)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교회를 시무하기 위함이었다.
정찬성은 부여 합송리 신학교에서 있었던 성령론 논쟁 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탈퇴하여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김상호와 함께 (추측컨대 최요한도 함께, 김교인은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5년 4월 27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기하성의 제1호 목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이신 목사도 부여 합송리를 떠났고, 김광수 목사/장로가 1954년 8월 7일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이적한 정찬성은 충주순복음교회의 전신인 오순절 충주교회를 개척하였고, 1957년 2월 15일에는 기하성 본부의 후원으로 신탄진 강희천의 집을 매입하여 삼정순복음교회를 개척하였으나, 삼남 정형기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왜정 때 신사참배 거부로 매를 맞았던 것이 병이되어 복막염으로 4월 25일에 소천 하였다. 소천일자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존하였다. 정찬성 목사는 순교자 유족회에 등록되어있으며, 김상호 목사와 함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희년 50인 인물’에도 올랐다.
슬하에 인자(목사 사모), 용기(공주 탄천순복음교회 목사), 형기(순복음예광교회 목사), 인순(집사)과 동순(일본 고베순복음교회 사모)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