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광(素光)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치매, 모세가 그 마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모세가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출 39:42-43).
1. 랍비가 명한 대로
유대교가 실패한 것 세 가지
첫째, 하나님의 말씀(계명)보다 랍비들의 해석과 전통에 포로된 것.
둘째, 하나님의 독점과 극단적인 선민의식.
셋째, 하나님의 구원사건과 예언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이해.
모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따랐지만, 유대교인들은 랍비들의 해석과 전통을 따르고 있다. 출애굽기 25장 40절에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고, 출애굽기 39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다”는 구절이 열 번(1, 5, 7, 21, 26, 29, 31, 32, 42, 43절)이나 쓰였다.
출애굽기 39장은 성막제작의 핵심사상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행한 것,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다 이뤄진 것,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뤄지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대교인들의 장점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 6:5) 지키려한데 있다. 613개의 계명들뿐만 아니라, 그들 계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수많은 울타리 법들까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지키려한다.
그러나 단점은 하나님의 계명들의 근본취지와 뜻을 모른 채 랍비들의 왜곡된 해석과 전통들을 부지런히 따르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내적인 것, 영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 문자적인 것에 치우친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이다. 성막과 관련해서 그들이 새롭게 이해한 것은 보이는 지상성막이 보이지 않는 하늘성전의 그림자라는 것, 보이는 지상성막은 일시적이요, 보이지 않는 하늘성전은 영원하다는 것, 또 구약성경성막은 신약성경교회의 예표라는 것, 먼저 나타난 지상성막은 나중에 나타난 신약성경교회의 모형이요 그림자란 것이다.
유대교인들은 하나님을 떠돌이와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을 찾아오셔서 독수리 날개에 업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 기슭에서 언약체결을 하셨으며, 사막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의 물로 먹이셨고, 안식할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신 조상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유대민족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선민사상이고, 유대민족을 매우 특별한 민족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강한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선민사상은 그들을 허물어뜨려 그들이 모멸하는 이방인의 나라들에서 수천 년을 떠돌이와 노예로 살게 한 목의 가시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독점하였다. 그래서 타 민족들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 민족들이었다. 세상에는 오로지 두 개의 민족, 즉 유대인과 이방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다. 선택된 자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선택의 목적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해서 그들을 선교사로 뽑았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들만을 택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없을까?
신구약성경 전체이야기는 세 가지 사건으로 압축된다. 구약성경에 두 가지가 있고, 신약성경에 한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은 다섯 개의 단어로 압축된다. ‘떠돌이,’ ‘노예,’ ‘해방,’ ‘언약,’ ‘선민’이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매우 특별한 관계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들이다.
구약성경의 두 가지 사건들은 출애굽사건과 바벨론 유배사건이고, 신약성경의 한 가지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다. 출애굽사건은 떠돌이와 노예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의 언약선민이 되는 이 땅의 모든 구원사건들의 원초적 사건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의 예표적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출애굽사건을 첫 번째 대구원사건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사건이 바벨론 유배사건인데, 일부 유대인들의 고토귀환이 70년 만에, 148년 만에, 혹은 173년 만에 세 차례나 이뤄졌지만, 이 두 번째 대구원사건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고,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사건으로 보는 것이 유대인들의 입장이다. 구약성경의 기록이 끝난 지 470여년쯤 지난 주후 70년에 유대인들에게 또 한 번의 비극적인 떠돌이와 노예사건이 일어났고, 이전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배이후 2,600여년이 지난 이금까지도 이 두 번째 대구원사건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오랜 기다림이 유대인들의 가장 뼈아픈 실패이다. 이 실패는 두 번째 대구원사건의 예언을 잘못 해석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영성을 가졌던 민족이지만, 이 두 번째 대 구원사건의 예언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의 두 번째 대구원사건을 다르게 해석한 것이 신약성경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유대인들의 제1,제2 대구원사건의 원형이자 실체적 사건이었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설명이다. 바벨론 유배이후 예언자들의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 등장에 관한 ‘희망’(하티크바)의 선포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본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의 입장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희망을 이루기 위한 대구원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오심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방식과 희망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과 내용으로’ 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간의 세속적인 희망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방식과 내용으로’라는 전혀 새로운 이해를 선포한 사건이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해 준 것이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과 22-25절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설정하고 있다.
첫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설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한 새로운 관계의 예표요 그림자였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율법(토라 혹은 계명)과 짐승의 피로써 ‘구약’(옛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독생자 하나님 그리스도의 복음과 피로써 ‘신약’(새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선민이란 점이다.
둘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조상들의 하나님’ 또는 ‘유대민족의 하나님’으로 한정했다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든 민족의 하나님’ 또는 ‘열방의 하나님’으로 또는 ‘온 인류의 하나님’으로 극대화시켰다는 점이다.
셋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대민족과 타민족, 남성과 여성, 신분과 계급으로 나눠 차별하였다면,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남녀노소빈부귀천민족에 관계없이 인류는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아들과 딸들이요, 형제와 자매라는 하나님과의 매우 독특한 관계를 설정하였다.
넷째, 구약성경의 유대인들은 토라의 613개의 계명과 수많은 울타리 법들을 지켜야만 또 할례와 침례를 받고 유대교에 개종해야만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의 축복을 독점하였지만,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으면,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약속받고, 보증과 인침의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 그분이 주시는 은사들을 가지고 천국생활을 맛보고 누리며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2. 교황청이 명한 대로
가톨릭교회가 실패한 것 세 가지
첫째,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황청의 해석과 전통에 포로된 것.
둘째, 하나님의 독점과 지나친 사제의 특권의식.
셋째, 구약성경의 잘못된 해석과 이해.
가톨릭의 문제점은 성경보다는 교황청이 명한대로 하는데 있다. 가톨릭도 유대교처럼 하나님을 독점하려 한데서 몇 가지 폐단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사제들의 하나님독점이다. 유대교가 하나님을 유대인들의 하나님으로 독점하는 오류를 범했듯이, 가톨릭교회도 사제들이 하나님을 독점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차단시켰고, 마리아와 성인들을 그 자리에 대신 앉혔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부 성자 하나님께 감히 기도하지 못하고, 마리아나 성인들께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하나님께 바치는 제대(제단)를 더욱 높은 곳에 세웠고, 신자석과의 거리를 더욱 멀게 하였으며, 사제복을 더욱 화려하고 위엄 있게 만들었다. 성부 성자 하나님을 신자들과 멀어지게 하고, 그 사이를 사제들이 꿰차고 앉았다.
둘째는 사제들의 사죄권 행사와 주의 만찬의 독점이다. 사제들이 하나님을 독점함으로써 신자들은 성부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신자들은 회개할 기회와 주의 만찬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사제들에게 회개하였고, 사제들은 사죄권을 행사하였다. 고해성사의 기회가 평생에 몇 번으로 제한된 때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신자들은 죽음에 임박하기 전까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주의 만찬에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매일의 미사를 통해서 행하여지는 주의 만찬은 사제들만의 것이 되어버린 적이 교회사 속에서 오랫동안 있었다.
셋째는 사제들의 성경과 예배의 독점이다. 가톨릭은 과거 1,400여 년 동안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미사언어도 라틴어만 허용하였다. 값싸고 질 좋은 종이와 인쇄술이 없던 시절에는 성경이 고가여서 소유하기가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몰라서 읽지 못하였다. 조선에 가톨릭이 전래된 역사가 2백 년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라틴어를 몰라서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고, 라틴어를 몰라서 예배진행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가톨릭교회에 자국어 성경과 자국어 미사가 허용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1960년대 이전에는 신자들이 기껏해야 세례문답과 간단한 교리를 배우는 정도에 그쳤다. 성경을 읽지 못한 사람들은 사제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신봉하였고, 또 사제들은 미개한 신자들이 그들이 이전에 빠져있던 이방종교와 문화를 기독교 신앙에 혼합시키는 것을 부분적으로 눈감아 주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자국어 성경을 읽고, 자국어 미사를 갖게 된 것은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교황청이 1,400여년 만에 미사 중에 설교와 대중 찬양을 복원하였지만, 아직까지도 평신도 기도는 복원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미사와 설교문과 기도문을 극도로 통제하고 있어서 사제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넷째는 사제들의 성사의 독점이다. 가톨릭에서는 미사 말고도 일곱 가지 성사가 있는데, 사제만이 집례할 수 있다. 침수세례를 약식세례로 변질시킨 것은 십자군을 모병하던 12세기경에 이방인 병사들을 집단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가톨릭의 폐단들을 고치고 성경에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 16세기에 단행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이 이뤄진지 500여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폐단들이 과연 기독교에서 모두 사라졌는가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3. 교리가 명한 대로
개신교가 실패한 것 세 가지
첫째,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단교리와 전통에 포로된 것.
둘째, 진리의 독점과 지나친 배타주의.
셋째, 구약성경의 잘못된 해석과 이해.
개신교회들의 가장 큰 폐단이 교리우상화이다. 교단마다 제각각 교리서를 만들어 교조화하고 있다. 그들의 가장 큰 폐단은 유대교와 가톨릭처럼 하나님을 독점하려들고 성경해석의 권리를 독점하여 그들의 해석을 절대 진리로,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바꾸어 절대화하고 있다.
교단마다 창시자가 있고 창시자의 사상과 가르침을 떠받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칼뱅주의와 웨슬리안주의이다. 그러나 칼뱅주의나 웨슬리안주의와 같은 특정 신학자들의 사상과 가르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 신학자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교조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데 있다. 교조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을 보면, 단지 신앙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별 관계없는 사람의 신념과 행동까지 간섭하고 개입하려들며, 심지어 사용하는 용어나 복장까지도 제약하려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들의 집단에서는 교수의 강의를 학생들이 재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된다. 이토록 배타적인 학생들이 도대체 무슨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을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어느 민족보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어느 민족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어느 민족보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기독교를 배척했다면, 기독교 집단에서 가장 조직이 크고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가톨릭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들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면, 개신교 교단들에는 교리나 실천에 심각한 문제가 없을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개신교회들은 유대교나 가톨릭교회가 실패한 길을 걷고 있다. 한쪽으로는 선민의식에 빠져있고, 다른 쪽으로는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이해했던 방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신약성경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고, 유대교의 랍비들이 유대교에 했던 것처럼, 교황청이 기독교에 했던 것처럼 개신교회들도 기독교에 하고 있다. 그 결과 기독교는 구약성경의 기독교와 유대교적 기독교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유대교인들, 가톨릭 교인들처럼 열정과 노력은 가상한데, 예수님의 지적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다”(마 23:23). 공리주의적 성공주의와 유대교적 권위주의에 빠져서 신약성경교회의 사도전통을 멋대로 왜곡시키고 있다. 출애굽기 25장 40절,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를 말씀을 충실히 따르되, 구약성경유대교적 방식이 아니라, 신약성경기독교적 방식을 따라야 한다.
4. 성경이 명한 대로
교회에 필요한 세 가지 운동
첫째, 신약성경교회 운동(New Testament Church Movement)
둘째, 오직 그리스도인 운동(Christians Only Movement)
셋째, 교회일치 운동(Christians Unity Movement)
유대교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기독교였고, 가톨릭의 폐단을 고치려했던 것이 개신교였다. 그러나 개신교의 폐단은 누가 고칠 것인가, 무엇으로 고칠 것인가? 이 물음에 답을 줄 곳은 과연 있는가? 다행히도 200여 년 전, 정확하게는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 27살의 젊은 나이에 화려한 목회경력을 자랑하는 레드스톤 침례회의 목사들 앞에서 1816년 9월 1일에 행한 ‘율법에 관한 설교’를 시발로 1823-30년까지 7년간 발간된 [크리스천 침례자](Christian Baptist)와 1830-70년까지 40년간 발간된 [새천년 전령](Millennial Harbinger)에 발표된 “옛 질서의 회복”(to restore the ancient order of things)의 글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는 개혁주의니, 복음주의니 하는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각종 폐단과 분열이 심각하고 상호비방이 난무한 게 현실이다. 자기가 속한 교단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도 하고, 이름이 다르고 조금만 다르게 실천해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침례가 이단이 되고, 매주 행하는 주의 만찬이 이단이 되고, 신성한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조차 이단이 되는 게 현실이다. 유대교나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개신교회들에서조차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폐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고쳐야 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개신교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에로 돌아가 진리를 회복하자는데 있다. 그런데 이 좋은 취지와 뜻이 심각한 분열과 유대교적 기독교란 왜곡된 결과로 드러나고 말았다. 더 심각한 것은 개신교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도무지 모른다는데 있다.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방도를 제시하면 의심부터 하고 그 알량한 지식을 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약성경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이해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이 말한 것을 말하고, 신약성경이 행한 것을 실천하고, 신약성경이 침묵한 것을 자유로 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교회명칭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그 구성원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으면 그렇게 부르고, 그들이 침례를 행하였으면 그렇게 행하고, 그들이 매주일 예배 때마다 주의 만찬을 행하였으면 그렇게 시행하여야 한다. 이 운동, 곧 ‘신약성경교회 운동’(New Testament Church Movement)은 침례교회 목사 알렉산더 캠벨이 1816년 9월 1일에 행한 '율법에 관한 설교'(The Sermon on the Law)에서 출범되었다.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핵심사상은 만인사제론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민족의 차별, 남녀노소의 차별, 빈부귀천의 차별, 계급과 신분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일군들이다.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성한 이름이 그리스도인이다. 이 운동, 곧 ‘오직 그리스도인 운동’(Christians Only Movement)은 장로교회 목사 발톤 스톤(Barton W. Stone)과 그의 동료 목사들이 1804년 6월 28일에 발표한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유언서'(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에서 출범되었다.
셋째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실천아래서 지상의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빙자한 분열은 죄악이다. 분열의 가장 큰 원인은 구약성경을 유대인들의 해석방법인 문자적 해석이 아닌, 하나님이 만세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해석한 신약성경저자들의 모형적 해석과 단순 원리를 적용하지 못한데 있다. 여기서 단순 원리는 신약성경이 말한 것을 말하고, 신약성경이 침묵한 것을 자유롭게 하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경이 말한 것은 본질이다. 본질에는 일치해야 한다. 신약성경이 침묵한 것은 비본질이다. 비본질은 자유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명한대로’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이 운동, 곧 ‘교회일치 운동’(Christians Unity Movement)은 장로교회 목사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이 1809년 9월 7일에 발표한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 of the Christian Association)에서 출범되었다.
이 세 가지 운동, 곧 신약성경교회 운동, 오직 그리스도인 운동, 교회일치운동은 지상교회의 과제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할 하나님의 선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