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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13 11:44
[특별기고] 내가 믿는 환원운동(원종호)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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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내가 믿는 환원운동
원종호 전도자(성지 그리스도의 교회, 전 그리스도대학교 총장)

1. 들어가는 말
환원운동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도 필자는 나의 판단이나 생각이 불완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답하려 한다. 특히 환원운동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게 생각한다. 환원운동은 부단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환원운동을 말하려 하지만 어쩌면 속 좁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필자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 말이다. 오늘날에는 교회사에 쌓여져 온 신학적 지식이 해박하지 못하고, 그러한 신학적 시각과 기준에서 평가하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이나 수준 낮은 사람으로 평가되는 듯한데, 환원운동 안에서도 그런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우주전체와 하나님의 나라와 이 역사세계 전체에 적용되는 절대 불변의 법칙이 틀림없다. 그런데 성경으로 모든 것을 판단 평가하겠다는 사람을 수준 낮고 무식한 사람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무식한 사람이며 환원운동의 대열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환원운동에 처음으로 동참하던 때에 매우 감동적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필자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실물 호랑이를 대단한 화가들이 순서대로 그리는 일이었다. 첫 번째 화가는 실물호랑이를 직접 그리고, 두 번째는 호랑이의 실물이 아닌 첫 번째 화가의 그림을 보고 그려야 하고, 세 번째는 두 번째의 그림을 보고 그리는 방식으로 일곱 번째 화가까지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물론 첫 번째의 그림은 호랑이의 실물과 꼭 같았다고 한다. 동시에 두 번째의 그림은 첫 번째의 그림과 꼭 같았고, 역시 세 번째는 두 번째와 꼭 같아서 순서대로 일곱 번째까지의 그림들도 바로 그 앞의 그림과 꼭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일곱 번째의 그림을 맨 처음 그리던 호랑이의 실물에 갖다 견주어 보니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더라는 것이었다. 신학의 발전과정이 바로 이러하였다는 의미였다. 어느 시대까지인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떻든 처음 사람들은 성경으로만 교리(신학)를 그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역사가 진행되면서 자기들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이 그려놓은 신학을 근거로 더 높은 신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성경을 완전히 배제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성경보다는 신학을 더 중요시한 것이 신학의 일반적 경향이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환원운동이란 누구든지 호랑이의 실물로 돌아가서 그림을 그려야 그 실체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듯이 성경자체로 돌아가서 시작하자는 운동이다. 인간 역사 안에 그려 나온 신학은 참고사항이다.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 환원운동의 의미
서론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환원운동의 기본틀과 정신을 이미 밝혔지만 여기서는 본지 지난 호에 실린 조동호 교수의 글 “환원운동에 관한 오해”< 조동호, 「환원운동에 관한 오해」, 『월간참빛 305호(2008년 1· 2월호)』, 참빛사, pp.19-29.>를 중심으로 환원운동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필자는 쟁론을 원치 않지만 조 교수님이나 또 다른 사람들이 필자의 글뿐 아니라 환원운동에 대하여 이의나 건설적인 대화 같은 것을 제기, 혹은 제시할 수 있는 광장으로 본 지(참빛)를 공개한 일이 있으므로 주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조동호 교수는 “환원운동에 관한 오해는 외부인들에게서 보다 이 운동에 관계된 사람들에게서 더 많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이 운동의 껍데기만 알고 속맛은 모른 채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역시 공감한다. 그런데 환원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아니라면서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지 환원운동은 아니다”고 하면서 그 결과로 나타난 폐해를 지적하였는데 이의가 없다.

환원운동과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다는데는 이해가 되지만 조 교수께서 말하였듯이 환원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십중팔구의 독자들을 위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신학적 시각에서가 아니고 성서적 관점에서 환원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대로는 환원운동은 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고 성서적 사고를 하여야 한다. 신학적 사고가 성서적 교회를 이질화하였기 때문에 환원운동이 출범한 것이라면 신학적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다스리는 주체적 동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그 신학이라는 서구적 유물(?)이 100%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환원운동은 기존의 신학적 체계나 업적을 배제하고 오직 성경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16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이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운동을 근거로 하거나 그 운동을 승계하려는 연장이거나 확장이 아니라 순수 성경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환원운동이고 그 정신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조 교수께서는 환원운동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도 아니고 오직 신약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면서 그 이유는 초대교회란 당대의 이단교회들 곧 영지주의, 율법주의, 유대주의 등이 다 망라된 느낌을 줄뿐 아니라 원시교회, 곧 미래 지향적인 교회가 아니라 왠지 과거 지향적인 교회란 느낌을 주는 그런 용어라고 하였다. 물론 지난 호에서 지면 때문에 하실 말씀을 다 하시지 못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환원운동이 매우 초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대교회를 원시교회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초대교회라 한다고 하여 반드시 과거 지향적 느낌을 준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환원운동을 흠잡고 비판하기 위하여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줄 필자도 안다. 그러나 그러한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다만 보다 효과적인 환원 운동의 선교를 위하여 초대교회라는 호칭이 걸림이 된다면 그 이름 사용 자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조 교수에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초대교회란 당시의 영지주의나 율법주의, 그리고 유대주의와 같은 이단들을 망라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은 조교수의 개인 생각으로 이해하고 싶다. ‘느낌’이라는 표현이 그러하고, 또한 그 당시의 이단들까지를 ‘교회’의 범주에 포함시킬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라는 말은 성경에 없으니까 오직 신약교회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환원운동이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딱히 신약교회라는 말 역시 성경에 있는가? 그럼에도 조 교수의 환원운동의 수준으로 볼 때에 그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은 환원운동이 아니라고 까지 말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초대교회란 이 땅위에 처음 세워진 사도들의 교회, 그러니까 요한 사도가 마지막 기록한 계시록까지의 신약교회로 필자는 믿는다.

또 한 가지는 환원운동이 신약성서의 교회를 21세기에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는 데에 이의가 있을 환원운동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약교회라는 의미는 구약교회를 전제로 한다는 개념을 벗어나기 어렵다. 구약에도 교회가 있었는가? 물론 구약성경에 교회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용어도 있고 그의 모든 신학자들이 이스라엘을 구약의 교회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구약시대에는 교회가 없다.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세우리라는 동사가 미래 시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까지도 이 땅에 교회는 없었고, 그리스도께서 세우리라 하셨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그의 몸으로 세우신 교회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첫 오순절에 세워졌다. 따라서 그 이전에 이 땅 위에는 교회가 없었다고 해야 옳다. 다만 스데반이 “우리 조상들이 광야교회에 있을 때(행7:38)”라고 말함으로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교회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모형이었다고 해야 한다. 만약 그 때에도 교회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아니어야 한다. 성경은 몸인 교회는 하나(엡4:4)라고 하면서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신 후에 세워졌다(엡1:22-23)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이 교회 이외에 다른 교회는 없다. 이 같은 필자의 입장 때문에 남들이 필자를 신학적 무식쟁이라고 해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전시대를 휩쓸고 역사를 주름잡던 신학이라 하더라도 그 것들은 성경에 의해서 비판 평가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환원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세워진 교회하나만 있다. 따라서 신약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보다는 오히려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성서로 돌아간다고 할 때에도 거기에 대두되는 문제는 적지 않다. 신구약의 차이나 연관관계성, 율법과 복음의 정확한 이해,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 이유 등 실로 많은 난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에 의해서 구약을 이해하지 않고 지금까지는 구약에 의해서 신약을 이해하여 왔다든지, 아니면 신구약을 대등한 위치에 세우는 일들이 상존한다.”고 한 조 교수의 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필자는 신약에 의해서 구약을 이해한다는 의미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에 의하여 구약은 물론 신약도 이해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 까닭은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구약의 그리스도」에 자세히 기술하였기에 참고해 보기 바란다. 필자는 이것이 환원운동이라고 확신한다.

또한 조 교수는 “오늘날은 환원운동이라는 말보다 스톤-켐벨(stone & campbell) 운동이라고 말하는 추세인데 무악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스톤이나 켐벨을 전폭적으로 따르자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들이 목표로 삼고 추구하였던 성서로 돌아가자는 그 정신을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환원운동의 선구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전적으로 따르라고 한다면 필자는 거기에 동의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다. 만약 환원운동이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성서로 돌아가지는 못한 채, 루터만 따르다가 끝이 난 역사 안에 부단히 일어났다가 사라져간 그러한 하나의 사건과 다를 바 없게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서로 돌아가자를 외치면서 그들 자신들도 성서로 돌아가는 삶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그러나 스톤이나 켐벨이라 하더라도 미흡한 것이 있다면 보완하여야 하고 오류가 있다면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오류가 있는데도 그냥 따른다면 그들을 실패케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성경 전체를 꿰뚫고 관통하는 체계가 있고 통일성 있는 교리가 이미 확보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절대화되면 안 된다. 그러한 경우에도 우리는 그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스톤-켐벨 운동’이란 말은 마음에 별로 들지 않는다. 만약 미국인 형제들이 스톤이나 켐벨에게도 오류나 미흡한 점이 있어서 스톤-켐벨 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3. 교회의 호칭문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 운동의 유일한 호칭으로 아는 것은 오해이라면서 본래 환원운동은 이 운동권에 속한 성도들을 제자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렀다고 하고는 영어권에서는 공동체를 호칭할 때 구성원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 또한 우세한데 이 맥락에서 나온 이름이 그리스도인의 교회(Christian Church)다”라고 조 교수는 말하였면서 먼저 '본래' 그렇게 불렀다고 하였는데 그 본래가 켐벨이 환원운동을 시작할 때를 말하는 것이라 이해되어 긍정하기가 어렵다. 진정한 의미에서 본래란 성경이어야 한다. 더욱이 영어권에서 그 구성원들의 성격에 따라 나타내는 이름을 곧 그러한 그 문화의 산물을 이 땅에 성경적 교회의 호칭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지 의문스럽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니까 그리스도인의 교회라고 한다면 이해는 간다. 만약 성경에 교회의 명칭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면 가장 성서적 호칭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조 교수도 소유주(所有主)의 개념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회의 명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듯이 분명히 교회의 명칭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다(롬16:16). 그것도 신약 성경이 확증한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는 의미는 당시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이었음을 확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까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그리스도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고 하셨기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세례의 오해
알렉산더 켐벨을 물 중생론자로 보는 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켐벨에게 있어서는 침수세례와 약식세례의 차이가 구원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온전하냐, 불완전하냐의 문제였다. 켐벨은 침수세례를 받은 자와 약식세례를 받은 자와의 차이를 온전한 신체를 가진 자와 생명(영생과 구원)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신체의 일부가 불구인자로 비교하였다” 라는 말에 필자는 매우 놀랐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조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그 만큼 필자가 환원선구자들의 사상을 다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시인한다.

먼저 ‘물 중생론’이란 언급에 동의하기 힘들다. 그러한 논리라면 성경에 물에 잠기어 세례를 받으므로 중생되는 일 말고 또 다른 중생의 방법이 있는가? 없다. 그러하다면 ‘물 중생론’이란 표현은 우리로서는 쓰지 않아야 한다. ‘물 중생론이란 물 속에다가 사람을 잠기게 했다가 끄집어내면 그것이 거듭났다고 하는 죄를 씻는 힘이 있다는 말이냐?’ 고 침수세례의 중생 론을 비판하고 조소하는 사람들의 사용하는 표현이겠기 때문이다. 환원운동을 하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우리도 물 중생론이라고 하는가? 물 중생 론이란 환원운동 밖의 혹자들이 우리에 대하여 사용하는 반대자의 표현이다. 필자는 물의 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고 믿지 않는다. 죄 사함과 관련되는 상징성은 있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물 자체에 중생의 능력이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도 인간을 중생시킬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침수세례를 통하여 구원된다는 신앙은 물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 신체가 불구인 정도라는 비유를 통하여 약식세례 받은 자도 생명, 곧 구원받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한 알렉산더 켐벨의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신약성서의 교회로의 환원함이 그들 환원선구자들의 목표였는데 그 신약성경 어디에 약식 세례가 인정되고 있으며 구원에 지장이 없다는 의미가 있는가?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 비록 스톤이나 켐벨이라 하더라도 비(非)성경적 오류가 있으면 수정되어야 한다. 만약 그들이 환원선구자들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들을 따르게 된다면 환원운동은 역사상에 성서로 돌아가자는 동일한 목적은 있었지만 결국 사라져간 선구자들과 같은 운동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들이 추구하였던 그 정신을 계승하여 성경으로 온전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가장 옳다고 하여 평생을 이 운동에 던졌다.

5. 목회자 명칭
필자가 배워온 대로는 전도자란 한 교회에 상주하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 지역으로 다니며 개척 교회를 세우는 순회직으로 알고 있었다. 그 교회에 장로가 세워지기 까지는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있지만 일단 장로가 세워지면 그 교회를 떠나는 직으로 말이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보건데 장로는 감독이나 목사와 같은 직분이기에 즉 장로들이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장로가 존재해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 전도자 디모데를 떨어 뜨려(딤전1:3) 교회의 일을 하게 하였다는 사실로서 장로가 있는 교회에서도 전도자가 목양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지니라(딤전5:17)”는 말씀에서는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을 구별하고 있는데, 이는 장로 중에서도 다스리는 자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별도 직분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입장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도 나타나는 것 같다. 즉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를 세웠다(엡4:11)는 말씀에서 그러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성구에 나타난 직분 가운데에는 집사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교회전체의 직분은 아닌 것 같고 가르치는 계통의 직분들만을 말하는 것 같기 대문이다. 이 같은 의미는 교사라고 하는 직분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과 이 문맥의 전후에서 가르침의 성격이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성구에서 장로와 목사가 같은 직분이라 하더라도 장로라는 명칭이 사용되지 않고 목사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볼 때에 디모데전서 5장 17절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이 구별된다는 의미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6. 예배시의 악기 문제
신약교회의 예배 원리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을 간략하게 말하면 신령과 진정의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이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4:22, 23)”고 하였고 이 예배는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에 있는 성전에서 하는 예배가 아니라(요4:21)고 하셨기 때문에 구약적 성전 제사가 아닌 신약시대의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예배에 과연 악기를 사용하여야 되겠는지 독자들은 판단할 것이다.

7. 여 성도들의 집사직 문제
집사의 직분은 디모데전서 3장 8절 이하 13절에 나온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 할지니라(딤전2:11-12)” 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고전 14:34-35)”이라는 말씀들을 근거하여 성령의 인도로 지혜롭게 판단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서는 다음호나 또 기회가 되는 대로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것이다.

8. 나가는 말
환원운동을 한다면서 지나친 배타성으로 자기 울타리를 더욱 강화하고 높인다면 이는 십자가를 지는 마음도 아니고 자신감마저 결여된 매우 좁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환원운동이 성경전체를 꿰뚫는 체계 있는 진리를 추구하기에 이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교리보다 더 성경적임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우리와 다른 교리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하여 포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환원운동은 그만큼 영계와 물질계를 다 지배하는 큰 운동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세계 전체를 품었다<참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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