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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09-01 20:51
전 영국수상 로이드는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이었다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819  

David Lloyd George(1863-1945) 웅변가, 정치가, 영국 수상(1916-1922). 국교인 성공회에 다니지 않고, 신실한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충실하게 섬겼다. The Lloyd family were staunchly Nonconformist and his early years were marked by a heavy involvement in the Disciples of Christ Chapel.

결단·추진력으로 1차대전 이끈 '전쟁 승리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05.05 02:28 / 수정 2013.05.05 14:52

되살아난 강국, 영국의 리더십 ③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데이비드 로이드조지(1863~1945)는 20세기 자유주의의 상징이자 복지국가 영국의 창설자로 평가받는다. 1916년부터 6년간 자유당 주도 연립내각의 총리를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전쟁 승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 허버트 애스퀴스 총리의 자유당 정권(1908~1915)에서 당과 내각의 2인자인 재무장관을 맡아 국민보험(1909)·실업보험(1911) 등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복지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수장관과 총리로서 총력전을 지도하고 전후 처리를 주도했다. 교육법을 제정해 14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여성?젊은이와 어린이 노동법’을 입법해 철도·운송업·건설업·기계업·공장·광산에서의 아동 노동을 금지했다. 역사학자 케네스 모건은 “영국을 인권·교육·복지·연금·고용 환경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국가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회개혁의 설계자로서는 물론 전시 지도자로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은 역동적인 리더십으로 프랑스와 미국을 설득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질서를 재편했다.

2004년 BBC 라디오가 실시한 20세기 역대 총리에 대한 인기 조사는 그의 업적을 잘 압축해 준다. 윈스턴 처칠(보수당·1940~45, 1951~55 재임)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이다. 2000년 영국과 미국의 영국 정치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노동당)에 이어 3위에 올랐다. 그는 웨일스어를 모국어로, 영어를 제2 언어로 쓴 인물로는 영국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총리다. 그래선지 웨일스 지방에서는 지금도 가장 존경받는 근대 지도자다.

1913년 대중연설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영국을 현대복지국가로 변모시켰다.

 

27세 최연소 의원으로 정치 입문

로이드조지는 교사였던 윌리엄 조지와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출생인 그는 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웨일스로 옮겨 구두 제조공이자 교회 목사인 외삼촌 리처드 로이드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열렬한 자유당원이자 웨일스 민족주의자였다. 외삼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선지 로이드조지는 친가와 외가의 성(性)을 합친 로이드조지를 자신의 성으로 썼다.

로이드조지는 중등학교만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으나 우수한 성적으로 법률가 과정을 마치고 사무변호사(solicitor)가 됐다. 오랫동안 지역 교회에서 설교하고 웨일스절주협회에서 활약하면서 연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자유당 입당 후 지방에서 활동하다 웨일스 캐너번의 시의원이 됐다. 젊은 시절엔 존 스튜어트 밀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글을 애독했다. 또 혁명보다 계몽·개혁을 추구한 페이비언협회의 조지 버나드 쇼와 시드니 웹 등 당대의 진보 지식인들이 쓴 정치 팸플릿을 꼼꼼히 읽었다고 한다.

그는 1890년 27세에 캐너번의 보궐선거에 출마해 18표 차로 당선해 최연소 의원으로 등원했다. 유세 중엔 대중에게 영합하는 정책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종교적 평등, 토지 개혁, 지역 당국의 알코올 판매 거부권, 누진세·자유무역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의원들은 급료를 받지 않아 그는 런던과 고향에서 사무변호사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그는 의원 시절 틀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스타일로 이름을 날렸다. 하원에선 통렬한 발언으로 상대 진영의 두려움과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뛰어난 웅변술로 자유당과 하원 지도자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발생한 보어전쟁에 대놓고 반대한 뒤 당내에서 ‘급진적이고 비애국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당 중진들은 그가 1900년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그는 지역구 주민의 민의를 가장 잘 따르는 의원으로 평가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1906년 자유당이 집권하자 그는 무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승승장구했다. 1908년 애스퀴스가 총리가 될 땐 재무장관을 맡았다. 자신이 주장했던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자 연금제 도입 등 ‘빈곤과의 전쟁’을 본격화했다. 애스퀴스 총리 시절 이뤄진 사회보장제도 아이디어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으며 의회 입법도 뒷받침했다. 토지세 도입 등 세제 혁신에도 앞장섰다. 그 덕에 20세기 들어 가장 개혁적인 재무장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로이드조지의 추진력을 잘 보여 주는 게 1909년 노령연금 비용이 포함된 이른바 인민예산과 상원 개혁에 관한 일화다. 당시 그는 전국을 돌며 개혁 지지 연설을 했다. 그러면서 “실업자 가운데 500명을 무작위로 뽑아 귀족으로 만들어 자유당 소속 상원의원으로 만들겠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발언으로 보수당을 위협했다. “과격하다”는 비난이 잇따랐지만 그는 이 말을 단순한 수사로 끝내지 않았다. 1910년 애스퀴스 총리와 함께 국왕 조지 5세를 설득해 지지의사를 이끌어 냈다. 이런 과감한 행보 덕에 그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과격’에서 ‘과감’으로 바뀌었다. 상원에서 자유당이 ‘영구 다수당’이 될 조짐을 보이자 보수당은 결국 상원 개혁을 받아들였다.

1910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자유당을 비난하기 위해 제작한 선거 포스터. 로빈 후드가 당시 자유당 정권의 재무장관인 로이드조지의 멱살을 잡고 “나는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줬는데 당신은 양쪽을 다 털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독설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훗날 총리를 맡아 개혁과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땐 말보다 행동을 중시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현실적이고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재무장관 시절이던 1914년 전운이 짙어지자 다른 3명의 당 중진과 함께 애스퀴스 총리에게 영국이 참전하면 장관직을 사임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정작 개전 후엔 총리 곁에 남기로 결정했다. 군수장관을 맡아선 오히려 속전속결을 위한 확전을 주장하며 애스퀴스의 결단력 부족을 비판했다. 그는 애스퀴스가 1916년 물러나자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열정과 추진력을 갖춰 전쟁 수행에 가장 합당한 총리감이라는 평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이던 1917년 각의 300번 열어

전시 총리가 된 로이드조지는 세 가지 대담한 발상으로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했다. 첫째, 해군을 설득해 상선 호위 임무를 맡게 했다. 이 덕분에 영국은 안정적인 전시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둘째, 육군을 설득해 프랑스 전선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페르디낭 포슈 아래 연합군 지휘체계를 통합하게 한 것이다. 통합사령부는 효율적으로 독일군에 맞설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세기 국가 총력전에 어울리는 새로운 전시내각 운영 시스템을 확립한 것이다. 이전까지 전시내각은 소수 각료가 매주 한 차례만 회의를 했으며 논의 결과를 기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로이드조지는 각의를 거의 매일 열었다. 1917년에만 300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회의 어젠다를 준비하고 상세한 기록까지 남겼다. 모든 각료를 수시로 전쟁내각에 호출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 아울러 해당 부서의 보고서를 전시내각 전체에 회람시켰다. 이를 통해 내각 전체의 협력과 정보 공유, 기록문화를 정착시켰다. 총력전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전시내각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칠이 고스란히 벤치마킹했을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전시행정체제 규범이 됐다.

전시내각에서 함께 일한 로스클리프 경은 “로이드조지는 자신이 직접 통제하지 않는 조직은 신뢰하지 않았다”고 그의 리더십 특징을 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영국·프랑스·미국 등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종전의 순간, 로이드조지는 “지금은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의 혀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표시를 우리의 가슴이 대신하고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로이드조지는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과 함께 ‘빅3’로 불리며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파리평화회담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회담은 빅3 간의 이견으로 결렬 직전까지 갔다. 그는 1919년 3월 25일 ‘폴텐블로 비망록’을 발표해 클레망소로 하여금 윌슨이 제안한 국제연맹 창설과 독일에 좀 더 관대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윌슨을 만나서는 프랑스가 요구하는대로 독일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런 대화와 설득의 리더십으로 타협점을 찾고 베르사유 조약을 성사시켜 외교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그는 러시아혁명으로 새로이 떠오른 공산주의를 일찌감치 경계하는 혜안을 지녔다. “클레망소의 제안이 지나치게 가혹해 독일을 황폐화하고 유럽의 상당 부분을 볼셰비즘에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베르사유 조약 성사시켜 외교사에 업적

‘전쟁 승리자’ 로이드조지는 1918년 보수당과 연립해 총선을 치르면서 교육·주택·의료·교통 등에 대한 종합적인 개혁을 공약했다. 당시 보수당 지도부가 “본인이 원하면 종신 독재자도 될 수 있다”고 말했을 만큼 그는 대중적 지지를 만끽했다. 하지만 보수당은 전쟁 수행을 위해 로이드조지와 손잡았지만 개혁까지 함께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로이드조지는 1921년 아일랜드에 준(準)독립국 지위 부여 등 일부 정책만 뜻대로 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 개혁에선 보수당에 발목이 잡혔다. 그는 진퇴양난의 정치적 위기에 빠져 3년을 보낸 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외치에선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영향력을 자랑했지만 내정에선 좌절을 겪은 또 하나의 사례다.

그는 1941년 1월 부인 마거릿이 세상을 떠나자 43년 10월 오랜 애인이던 여비서 프랜시스 스티븐슨과 재혼했다. 1910년 딸의 가정교사로 만난 이 여인은 13년부터 로이드조지와 애인 관계를 유지해 온 사실이 드러나 영국 사회에 충격을 줬다. 아들 그윌림과 딸 미건은 아버지를 추종해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이 됐다. 45년 자유당이 무너진 뒤 그윌림은 보수당으로 옮겨 내무장관을 지냈고, 미건은 57년 노동당으로 말을 바꿔 탔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