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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1-15 19:59
(1)3세기에 걸친 스톤-캠벨 운동 역사: 조사와 분석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55  

 3세기에 걸친 스톤-캠벨 운동 역사: 조사와 분석
Stone-Campbell History Over Three Centuries: A Survey and Analysis

번역: 조동호 목사
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목차

  • 서론
  • 운동사 저술에의 도전
  • 초기 역사들
  •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미국 종교사 속에서 그 운동의 역사기술
  • 요약과 분석
  • 그 운동의 역사기술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상태
  • 참고자료
  • 역자 해설

서론
Introduction

스톤-캠벨 운동은 미국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두 개의 기독교 단체가 1832년에 연합함으로써 생겨났다. 이 두 개의 단체가 바로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이 이끌었던 ‘그리스도인들’(Christians)과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 주도했던 ‘개혁자들’(Reformers) 혹은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이다. 이 연합운동은 이름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19세기 스톤-캠벨 운동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다양하게 알려졌고, 그들의 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로 확인되었다. 19세기 말에 이 연합운동은 두 줄기로 갈라졌다. 한 줄기는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이란 이름을 가졌고, 다른 줄기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과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1920년대에 다시 분열이 진행되어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로 알려진 두 단체를 낳았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종종 제자들(Disciples)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때때로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independent Christian Churches)로 불리곤 한다.

운동사 저술에 대한 도전
The Challenge of Writing the Movement's History

제1세대 스톤-캠벨 운동 지도자들은 실제적인 일과 당면한 개혁을 향한 도전들에 소진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듬었던 역사나 그들이 다듬어갔던 역사를 충분히 반추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어도 M. 루터 때 시작된 교회개혁의 전통 속에 자신들이 서 있음을 확인하였다. 스톤과 캠벨 모두 다 목회지망생들에게 성서뿐 아니라 교회사를 공부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던 보편적 교리들과 실천사항들을 변호할 목적으로 초기 기독교 문헌을 참고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기대와 종종 자기비판이 혼재된 짧은 여러 논문에서 그들 자신의 일의 진행을 추적하려고 시도하였다. 발톤 스톤은 1827년 <그리스도인 전령>(Christian Messenger)지에 연재한 “서부지역 그리스도인의 교회사”란 제목의 글들에서 ‘그리스도인’ 운동의 발생을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캠벨은 자신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성장에 대해 다수의 글들을 남겼다. 이중, 일부는 수많은 순회 설교 때 적은 자서전적인 ‘수기’(手記)였고, 다른 일부는 ‘개혁의 진척’에 관한 간략한 초록이거나 요약들이었다. 여전히 다른 일부의 글들, 즉 1835년 <천년왕국의 선구자>(Millennial Harbinger)지에 기고한 ‘위기’(The Crisis)에 관한 그의 짧은 소논문과 같은 글들은 스톤-캠벨 운동의 사명과 정체성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었다. 또 캠벨과 다른 사람들은 스톤-캠벨 운동에 관한 역사적 신학적 이야기를 동시대에 미국에서 발행된 종교대사전들에 기고하였는데, 그 같은 대사전들에는 J. M. 브라운(Brown)의 <종교지식대사전>(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1836)과 존 와인브렌너(John Winebrenner)의 <미국의 제(諸) 교파들의 역사, 1849>(History of All Denominations in the United States)가 포함되었다.

가끔 캠벨은 객관성을 제대로 지닌 역사기술의 어려움을 숙고하였다. 그 같은 한 가지 사례를 “배도에 관한 글-혼재된 동기들”(Notes of Apostasy-Mixed Motives)이란 제목의 짧은 글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은 「천년왕국의 선구자」1837년 1월호에 실렸다. 이 글은 원래 가톨릭교회 신시내티 시(市) 주교 존 뱁티스트 퍼셀(John Baptist Purcell)과 펼친 토론을 위해 준비한 글이었다. 캠벨은 신뢰할만한 기독교 역사가 일찍이 기록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였다. “교회사의 가장 논쟁적인 시기에서조차 참되고 신실한 역사를 기술하려는 공정하고 숙달된 객관성이 없었고,” 덜 논쟁적인 시기에서도 “집권세력의 부도덕과 부패들을” 파헤친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고 캠벨은 말하였다. 그는 분명히 주장하기를,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합당치 못하므로” 스톤-캠벨 교회 개혁에 대해서 “정확한 역사를 기술할 수 없을 것이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의 반대자들은 “정통파” 그리스도인들과 같아서, “노바티안파(Novatians),[역자 주1] 도나티스파(Donatists),[역자 주2] 바울파(Paulicians),[역자 주3] 발덴스파(Waldenses),[역자 주4] 롤라드파(Lollard),[역자 주5] 개신교파에게 과오자들과 이단자들과 분열주의자들이라는 걸출한 칭호들을 수여하였다. 동시에 캠벨은 “심지어 우리의 동료들 가운데서도, 전혀 들뜨지 않고, 매우 침착한 기질로, 공정하여 꾸미거나 덧붙이지 않고, 그들이 가장 익숙하게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할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캠벨은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공정한 역사가들이 몇몇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적 가능성을 비록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역사기술의 과제가 독특한 관점과 특정한 상황과 어떤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캠벨은 이것들이 우리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에서 포함시키거나 배제시키는 것과 포함시키는 것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있는 한, “거울을 통해서 [사물을] 희미하게 볼” 것이라는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을 되새겼다.

[역자 주1] 노바티안파는 데키우스(Decius)와 발레리아누스(Valerian) 황제들의 박해시기(249-260년)에 배도했던 자들의 교회 내에서의 처리문제와 로마감독 선출문제로 파생된 강경개혁파였다. 북아프리카 칼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가 이들에 대항하였으며, 교회에 ‘가톨릭’(Catholic) 개념을 도입하였다.

    [역자 주2] 도나티스파는 312년 북아프리카 칼타고감독에 박해시기에 성경을 박해자에게 넘겨줬던 카이실리아누스가 선출되면서 파생된 강경개혁파였다. 어거스틴(354-430년)이 이들과 논쟁하였다.

    [역자 주3] 바울파는 660년경에 콘스탄틴 실바누스가 사복음서와 바울서신들을 선물로 받고 그와 그의 동료들이 성서중심의 규칙을 삼았던 개혁파였다.

    [역자 주4] 프랑스 리옹의 발두스(Petrus Waldus, ?~1217)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청빈을 실천하였으며, 교황권위의 부정, 연옥의 부정, 평신도에 의한 사죄(赦罪)의 인정, 죄에 빠진 사제가 거행한 미사의 성사성(聖事性) 등을 부정한 개혁파였다.

    [역자 주5] 롤라드파는 1382년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붙여졌던 이름이다. 화체설에 반대하였으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초기 역사들
Early Histories

그러나 캠벨은 적어도 자신의 운동에 대한 공정한 청문을 원했다. 그 같은 역사를 전달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곧 캠벨의 학문적 동료이자 내과 의사였으며, 가까운 친구였던 로버트 리처드슨(Robert Richardson, 1806-1876)이다. 그는 캠벨 가족의 요청에 따라 <알렉산더 캠벨의 회고록>(Memoirs of Alexander Campbell)을 썼다. ‘약속들’이란 부제를 단 두 권으로 된 이 책은 캠벨이 사망한 직후인 1868년과 1870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캠벨 가문에 대한 전기 이상의 것으로써, “[캠벨이] 주창했던 종교[기독교]개혁의 기원, 진행, 원리들에 관한 견해”를 폭 넓게 담고 있다. 다른 중요한 전기들도 이 시기에 교회개혁 사역의 거대한 비전을 보여줄 목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주제들을 중심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캠벨이 자신의 부친에 대해 기록한 <토마스 캠벨 장로의 회고록>(Memoirs of Elder Thomas Campbell, 1861), 존 로저스(John Rogers)의 <발톤 스톤 장로의 전기>(Biography of Elder Barton Warren Stone, 1847), 윌리엄 박스터(William Baxter)의 <월터 스코트의 생애>(Life of Walter Scott, 1874),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존 스미스 장로의 생애>(Life of Elder John Smith, 1870), A. S. 해이든(Hayden)의 <오하이오 주 서부 보류지 제자들의 초기역사>(Early History of the Disciples in the Western Reserve, Ohio, 1875)가 포함된다. 대개는 전기들을 수집한 것에 불과하지만, 특정 지역의 스톤-캠벨 운동사를 기록하고자한 최초의 노력이다.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기술
Historiography of the 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

스톤-캠벨 운동의 첫 번째 종합 역사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A History of the Disciples of Christ, 1894)로써 제자들 교회의 목사 B. B. 타일러(Tyler)가 ‘미국 교회사’(American Church History)에 연재한 짧은 책이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이 <19세기의 교회개혁>(The Reformation of the Nineteenth Century, 1901)이다. 이 책은 제자들 교회의 저명한 목사와 지도층 선교사들이 쓴 일련의 역사 스케치를 <그리스도인-복음전도자>(Christian-Evangelist)지의 편집자인 J. H. 개리슨(Garrison, 1842-1931)이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의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의 출판 100주년을 맞은 해인 1909년에 두 권의 종합 역사서들이 추가로 출판되었는데, 그 두 권 가운데 더 짧은 책인 <한 세기의 이야기>(The Story of a Century)를 J. H. 개리슨이 저술하였다. 개리슨은 이 책에 스톤-캠벨 운동의 성과에 대한 탐구를 담았을 뿐 아니라, 교회개혁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강한 도전을 피력하였으며, 그 도전을 전환시기로 삼고 또 그 도전의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 다른 책은 제자들의 목사 W. T. 무어(Moore)의 대표작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종합역사: 그 믿음, 교리, 삶에 있어서 초기 기독교를 회복하려 했던 한 세기 동안의 과업에 대한 서술>(A Comprehensive History of the Disciples of Christ: Being an Account of a Century's Efforts to Restore Primitive Christianity in Its Faith, Doctrine, and Life)이다.

해이든, 타일러, 개리슨, 무어, 리처드슨과 또 다른 초기 전기 작가들은 스톤-캠벨 운동을 19세기 미국인의 보편적 역사관이었던 “천년시대”를 개방시킬 섭리로 이해하였다. 이들 저자들은 스톤-캠벨 운동이 섭리에 의한 보다 큰 계획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 운동을 택하고 부르신 것은 기독교를 그것 본래의 순수함과 능력으로 복원시키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 저자들은 이 섭리에 의한 계획 속에서 미국이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를 올바르게 선도할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자임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신생 국가 미국은 유럽의 기독교가 충분히 개혁되는 것을 방해한 국가간섭과 교권주의 전통들을 집어던져버릴 기회를 제공하였다. 스톤-캠벨 운동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소명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런 확신은 그 운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세 줄기 모두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기술의 주제가 되었다.[역자 주6]

    [역자 주6]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의 새 천년시대를 바라본 회개운동에서 비롯되었다(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세례 요한 또한 새 천년시대를 예비하는 전령으로써 ‘회개’를 외쳤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400여 년 전부터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실 신정국가인 ‘올람 하바’(Olam Ha-Ba), 곧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그 나라를 교회를 통해서 이루셨다. 비슷한 케이스로 19세기 미국인들은 신대륙의 개척과 맞물려 ‘자유’를 화두로 한 새 천년시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이 전통에 매어 있었다면, 신대륙에는 모든 분야에서 자유가 물결치고 있었다. 동시대에 스톤-캠벨(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을 펼쳤던 선각자들은 기독교 본래의 순수성과 능력을 회복함으로써 새 천년시대를 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이 운동을 전령으로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확신 속에서 새 천년시대의 전령(Millennial Harbinger)을 자임하면서 개혁운동, 곧 신약성서교회(사도전통)로의 회복운동을 펼쳤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거룩한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20세기 들어, 학식 있는 설교자들과 편집자들의 초창기 노력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 교회의 전문 역사가들은 스톤-캠벨 운동의 종합적인 역사기술의 과업을 수행하였다. 제자들의 교회의 전문 역사가에 의하여 기술된 최초의 저술은 에레트 게이츠(Errett Gates)의 <그리스도의 제자들>(The Disciples of Christ, 1905)이다. 게이츠는 이 책에서, 스톤-캠벨 운동내의 여러 불일치와 논쟁을 토마스 캠벨이 반드시 “협동적이고, 상호 교정(矯正)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두 가지 원칙들, 곧 “초기 기독교의 권위와 그리스도인 일치의 의무”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의 결과로 해석하였다.

스톤-캠벨 운동내의 여러 불일치와 논쟁이 환원(restoration)과 일치(unity)에 대한 두 가지 원칙 또는 이상들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의 결과였다는 게이츠의 해석적 입장은 이후 스톤-캠벨 역사기술에 하나의 큰 흐름이 된다.[역자 주7] 그러나 20세기 제자들 교회의 전문 역사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J. H. 개리슨의 아들 W. E. 개리슨(Garrison, 1874-1969)보다 영향력이 크지는 못하였다. 개리슨은 A. T. 드그루트(DeGroot)와 함께 종합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The Disciples of Christ: A History, 1948, 1958년에 개정편집)를 출판하기에 앞서 <변방을 좇는 종교>(Religion Follows the Frontier, 1931)와 <미국의 한 신앙운동>(An American Religious Movement, 1945)을 출판하였다. 개리슨의 저술들은 하나의 명백한 역사신학에 근거한 이야기들에서 역사가의 가설을 반영하는 이야기들로의 전환을 반영한다. 그 가설은 모든 역사적 사건들이 전(前)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카고대학교의 교회역사가인 피터 모드(Peter Mode)와 윌리엄 워렌 스위트(William Warren Sweet)의 동료인 개리슨은 역사가 프레드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 1861-1932)의 변방지역 논문에 대한 관심을 그들과 공유했다. 서부의 ‘자유의 땅’으로의 확장은 독특한 미국의 특성과 제도들이 등장할 수 있는 필요조건들을 만들어냈다고 터너는 주장하였다.[역자 주8]  개리슨은 터너의 논문을 따르면서, 어떻게 개척자의 삶이 전통을 통해 물려받은 방식과 장려된 자립의 관습들을 조절해갔는가를 기술하였다. 개척자는 “국가와 교회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제도들조차, 만일 그것들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않는다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그는 단언하였다. 스위트의 입장을 따르면서, 개리슨은 19세기 스톤-캠벨 운동의 성장을 개척자 정신과 그 운동의 개혁적 메시지의 양립성에서 설명하였다. 당시, 스톤-캠벨 운동의 개혁적 메시지는 복잡한 신학적 교리와 권위주의적 성직자들로부터 해방된 연합된 교회를 요구하는 것이었다.[역자 주9]

    [역자 주7] 환원운동의 핵심논쟁을 이해하려면, 교회일치와 성서적 권위회복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환원운동은 종교개혁가들이 파괴한 우주적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치 운동이며, 성서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복합적인 성격을 띤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쟁점이 환원운동을 지난 200년 동안 지속시켜 온 추진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원칙의 맥락을 어떻게 조화와 균형 있게 이어 가느냐에 있다. 교회일치 쪽이 밀리면, 율법주의적이고, 분파적인 성향을 띄게 되고, 성서의 권위 쪽이 밀리면, 교리적 상대성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고로 ‘환원’(restoration)은 성서권위와 연관된 말이며, ‘일치’(unity)와 ‘연합’(union)은 교회연합에 연관된 말이다.

    [역자 주8] 여기서 서부(the West)란 캘리포니아 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부지역 오하이오 강(Ohio River)을 따라 형성된 변방개척지역을 말한다.

    [역자 주9] 신약성서의 순수성과 능력을 회복하자는 환원운동은 19세기의 개척자정신과 유럽대륙의 전통중시보다는 자유를 찾아 미주대륙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실용적 개혁노선과 그 맥을 같이한다. 따라서 환원운동의 기수들은 교파교회의 교조주의나 교권주의에서 가감하게 탈피할 수 있었고, 그 같은 정신을 가졌던 당대의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반면에 한국에서 환원운동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이런 개척자정신과 실용적 개혁노선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물려받은 방법들”(inherited ways)에서 벗어나 “권장된 자기 의존의 습관들”(encouraged habits of self-reliance)에로 수정해 나갈 수 있을 만큼 그 사고가 열려있지 못하다.

그러나 개리슨의 주된 관심은 변방지역의 정황에서 비롯된 스톤-캠벨 운동의 등장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 문화, 지성적 사정들을 스톤-캠벨 운동이 채택한 데에 있었다. 개리슨이 잘 알고 있었던 대로 1930년대까지 스톤-캠벨 운동은 조직에 대한 논쟁, 예배 시 악기사용문제, 성서 해석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에 따르면 이때에 스톤-캠벨 운동은 위기국면을 넘기고 있었다. 그 운동의 미래는 개개인들이 성숙해 가는 미국 사회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좌우되었다. “과거 30년 동안 제자들 교회의 화합을 방해해 온 모든 논쟁의 더 깊은 내막은, 다소 애매한 말을 쓰자면, ‘자유주의’(liberalism)로 호칭되는 것에 대한 여러 다양한 태도에서 찾아야 하며, 또한 이것은 차례로 변방지역을 함께 통과한 변화들, 즉 사회적, 문화적, 지성적 변화들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에 놓여있다”고 개리슨은 1931년에 썼다.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기술의 또 하나의 전환이 1931년에 출판된 개리슨의 <변방을 좇는 종교>와 1945년에 출판된 <미국의 한 신앙운동> 사이에 생겨났다. 이 전환은 스톤-캠벨 운동의 형성에 끼친 B. 스톤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다. 로버트 리처드슨을 좇아서 그 운동의 이전 역사들은 최우선적으로 알렉산더 캠벨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했다. 리처드슨이 캠벨의 전기에서 스톤을 자연스럽게 소개한 시점은 스톤이 캠벨을 처음 만난 때이다. 스톤과 그의 추종자들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는 공화 감리교인들(Republican Methodists)과 아브너 존스(Abner Jones)와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의 ‘그리스도인 운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뤄진다. 리처드슨은 캠벨 운동과 스톤 운동의 연합을 다룰 때 캠벨의 영향권에 들어온 스톤의 추종자들에 초점을 맞춘다. 리처드슨에게 있어서 스톤 운동은 캠벨의 개혁의 줄기에 흘러들어 온, 그러나 캠벨의 이야기에서는 오히려 늦은, 하나의 중요한 지류에 불과하였다. J. H. 개리슨(Garrison)의 <한 세기 이야기>와 W. T. 무어(Moore)의 <종합 역사>(A Comprehensive History)는 리처드슨의 기본 개요를 따른다. 이 두 권의 책은 1909년에 출판되었다. 그 해는 토마스 캠벨이 “선언과 제언”을 선포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더불어 스톤-캠벨 운동이 100주년이 되는 해로 널리 간주되었다. W. E. 개리슨의 『변방을 좇는 종교』는 동일한 경향을 반영한다. 그 책은 유럽의 유산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스톤에 관해서는 “배경”이란 제목 아래서 “개척자들 중에 있는” 다른 “선지자들”과 연결해서 짧게 논의하며, 캠벨 부자(父子)의 이야기로 “개척자 시대”를 시작한다. 바꿔 말하면, 스톤은 캠벨의 개혁이 채택한 상황의 일부분에 그치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1945년 판 개리슨의 <미국의 한 신앙운동>은 스톤-캠벨 운동이 “두 개별 운동들의 연합으로 19세기 초에 시작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캠벨은 주류, 스톤은 지류라는 그간의 함의(含意)가 포기된 것이다. 이것은 그 책의 구성에서도 명백하다. 미국의 무대와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캠벨부자의 이주’에 관한 이야기보다 앞서 나온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개리슨(Garrison)과 드그루트(DeGroot)의 종합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에서도 이어졌다. 이 책에서 전반적인 교회와 그 교회의 영국과 미국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들이 서술된 이후에, 스톤과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캠벨부자의 소개에 앞서서 한 장(章)에 할애되어 기술된다. 스톤-캠벨 운동의 형성에 끼친 스톤과 캠벨의 상대적 중요성에 관한 동일한 접근이 개리슨과 드그루트의 계승자로서 1975년에 출판된 레스터 맥칼리스터 2세(Lester G. McAllister, Jr.)와 윌리엄 터커(William E. Tucker)의 <믿음의 여정>(Journey in Faith)에서도 나타난다.

스톤-캠벨 운동의 형성에 기여한 스톤의 역할에 대한 이런 인식의 전환은 시리즈로 소개된 미국 교회사의 일부로써 1894년에 출판된 B. B. 타일러(Tyler)의 짧은 책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1894)에서도 드러났다. 타일러는 유럽과 캠벨부자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먼저 미국의 정황으로 시작하여 스톤 운동의 발전을 스케치하였다. 1931년에 출판된 <변방을 좇는 종교>와 1945년에 출판된 『미국의 한 신앙운동』사이에 생긴 개리슨의 사고(思考)의 변화는 하나의 결과물에 기인했음이 드러난다. 그 결과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일러의 저술이 아니라, 발톤 스톤과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을 도드라지게 하는 출판된 두 권의 책이다. A. W. 포춘(Fortune)의 <켄터키의 제자들>(The Disciples in Kentucky)이, 1832년에 성사된 스톤과 캠벨 추종자들의 연합을 기념하여, 켄터키 주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 의해서 1932년에 출판되었다. 포춘은 이 책에서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가들이 켄터키 주가 끼친 기여에 “제대로 주목” 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 같은 간과(看過)를 수정하기 위해 포춘은 그의 역사에서 스톤 운동을 눈에 띄는 위치에 배치하였다.

동년에 베다니 출판사는 찰스 크로스필드 웨어(Charles Crossfield Ware)가 쓴 <발톤 워렌 스톤: 그리스도인 연합의 개척자 - 그의 생애와 시대에 관한 이야기>(Barton Warren Stone: Pathfinder of Christian Union - A Story of His Life and Times)를 출판하였다. C. 웨어의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 엘머 엘즈워스 스노디(Elmer Ellsworth Snoddy)는 스톤-캠벨 운동의 기원이 두 단체 곧 캠벨파와 스톤파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대부분이 캠벨파의 영향권이었던) 북부의 뿌리가 그 운동의 문서들을 통해서 (스톤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스톤과 그의 이상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다뤄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 같이 스톤을 가볍게 다루는 접근은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톤이 캠벨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미국의 경험에서 앞서고, 일치에의 이상(理想)에서 앞서고, 전도에서 앞서고, 그의 운동의 독자성에서 앞서고, 칼빈신학체제의 완전 거부에서도 앞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대의명분에 전념한 희생적 헌신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웨어의 전기는 스톤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고, 이를 통해서 스톤이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에서 캠벨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스노디(Snoddy)의 논문을 확증하려했다.

스톤의 생애와 공헌에 관심을 집중시킨 포춘, 스노디, 웨어의 업적은, 다른 한편 일반적으로 인식된 알렉산더 캠벨과는 다른 어떤 창시자, 곧 ‘자유주의’(liberal) 제자들이 좀 더 자신들과 친밀하게 동일시 할 수 있는 창시자를 찾으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제자들은, 1931년 개리슨이 지적한 ‘자유주의,’ 곧 과거 30년 동안 스톤-캠벨 운동의 일치를 방해한 논쟁들의 핵심에 있었던 자유주의를 끌어안았다. 개리슨은 이 자유주의를 사회, 문화, 지성의 변화에의 대응으로 인식하였다. 이들 제자들은 한 창시자가 필요했는데, 그의 견해들이 ‘제자들의 학풍주의’에 굳어있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또 그는 에큐메니즘의 창시자로서 그리스도인 일치에 헌신하지만, “옛 믿음과 일의 옛 질서”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1948년은 한 권의 스톤-캠벨 운동의 종합 역사가 쓰이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 역사는 당대의 한 주도적인 자유주의자에 의해 쓰였고, 그 책에서 발톤 스톤은 그 운동의 선구자로서가 아니라, 그 운동의 창시자로서 기술되었다.[역자 주10]

    [역자 주10] 스톤-캠벨 운동을 세 파로 나눈다면, 보수 그리스도의 교회들, 진보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 중도(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이 펼치는 운동의 양 날개는 신약성서교회회복과 교회(그리스도인)일치 혹은 교회(그리스도인)연합이다. 보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신약성서교회의 회복을 통한 교회일치를 기치로 삼고 있고, 진보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는 신약성서교회의 회복보다는 교회연합 또는 에큐메니즘을 기치로 삼고 있다. 중도(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신약성서교회의 회복과 교회일치를 기치로 삼고 있다. 진보와 보수는 양 날개 가운데 어느 한쪽의 날개에 기우는 경향이 있고, 중도(독립)는 균형을 유지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신학에 이성주의와 합리주의가 유입된 것은 18세기부터이다. 19세기에는 변증법에 근거한 진화론적 사고가 더해져 역사적 예수와 선포(신앙고백)적 예수를 구분하는 자유주의 신학이 발전했고, 20세기 초에는 비교종교사 내지는 양식(forms)발전사적인 접근을 시도한 진보신학이 발전하였다. 예일 대학교나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한 제자(파)들이 20세기 초의 현대신학을 스톤-캠벨 운동에 유입시킴으로써 신약성서교회 운동을 약화시켰고, 일치보다는 에큐메니즘에 더 큰 관심을 기우렸다. 이런 맥락에서 왜 제자(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전통의 회복’을 주장한 알렉산더 캠벨보다는 ‘그리스도인 운동’(혹은 교회연합운동)을 펼친 발톤 스톤을 단순한 스톤-캠벨 운동의 선구자가 아닌 창시자로 부각시키려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 제자(파)들은 다른 한편에서 알렉산더 캠벨의 이성적, 합리적 또는 과학적 신학방법론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그 후에 스톤에 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연구에 두 권이 더 추가되었다. 윌리엄 개리트 웨스트(William Garrett West)의 <발톤 웨렌 스톤, 그리스도인 일치의 초기 미국인 주창자>(Barton Warren Stone, Early American Advocate of Christian Unity, 1954)와 D. 뉴엘 윌리엄즈(D, Newell Williams)의 <발톤 스톤: 영적 전기>(Barton Stone: A Spiritual Biography, 2000)가 그것들이다. 웨스트의 책은 예일 대학교에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써, 웨스트는 삼위일체와 대속교리에 관한 스톤의 비정통적 견해와 시민정부에 대한 그의 급진적 종파주의 견해들을 탐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 일치가 스톤의 삶의 “두드러진 열정”이었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즈는 어떤 방법으로도 스톤의 그리스도인 일치에의 헌신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후대의 20세기 영적 깊이와 특수한 그리스도인의 전망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들에 반응하면서, 어떤 영향도 스톤의 신학 발전과 종교사회적 실천에서 그의 장로교의 영성보다 더 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스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계시된 사랑과 은혜(은총)의 하나님을 섬겼고, 인간 본성이 징계를 받았다는 견해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즐거움과 봉사를 인간의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였다. 스톤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케인 릿지 예배당(Cane Ridge Meeting House) 건립 200주년기념에 때맞춰 스톤 운동사에서 1991년에 시작되는 일련의 200주년 행사들에 의해서 고무되었다. 1992년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사학회(Disciples of Christ Historical Society)는 렉싱턴신학대학원(Lexington Theology Seminary)의 역사가 안토니 L. 두나번트(Anthony L. Dunnavant)가 편집한 <케인 릿지의 정황: 발톤 워렌 스톤과 부흥에 관한 전망들>(Barton W. Stone in Context: Perspectives on Barton W. Stone and the Revival)을 출판하였다. 두나번트의 독특한 공헌은 스톤의 지위에 대한 고찰을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편찬에 개시한 것이다.

스톤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짐과 동시에 또한 캠벨 연구의 르네상스를 맞기도 하였다. 캠벨에 대한 많은 새로운 관심이 1940년대에 예일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서 일어났다. 예일대학교의 교무처장 루터 A. 위글(Luther A. Weigle)은 그 자신이 스톤-캠벨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도 캠벨 연구를 장려하였다.[역자 주11] 그 결과 네 개의 박사학위논문이 출판되었다. 로버트 프레드릭 웨스트(Robert Frederick West)는 자신의 <알렉산더 캠벨과 자연종교>(Alexander Campbell and Natural Religion, 1948)에서 캠벨을 당대의 자연종교와의 싸움에서 이긴 성서 계시의 챔피언으로 인정하였다. 해롤드 L. 렁거(Harold L. Lunger)는 <알렉산더 캠벨의 정치윤리학>(The Political Ethics of Alexander Campbell, 1954)에서 캠벨이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활달한 관심을 보였고, 정치적 결정들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책임감을 인정하였음”을 보여주었다. 캠벨은 설교 때 “광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하였다. 그랜빌 T. 워커(Granville T. Walker)는 <알렉산더 캠벨의 사상과 설교>(Preaching in the Thought of Alexander Campbell, 1954)에서 캠벨의 이성에의 호소가 변방에 거주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종교생활과 하나님 영접을 위한 정직한 탐구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주장하였다. D. 레이 린들리(D. Ray Lindley)는 <자유의 사도>(Apostle of Freedom, 1957)에서 교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캠벨의 견해들을 그의 시대에 나타나고 있었던 “민주주의를 삶의 한 방식으로 재고(再考)하는 것”에 관련시켰다. 또 세실 K. 토마스(Cecil K. Thomas)가 프린스턴대학교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알렉산더 캠벨과 그의 새 번역 성서>(Alexander Campbell and His New Version, 1958)가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서 토마스는 어떻게 캠벨의 번역 성서가 “표준개역성서(RSV)가 담고 있는 수많은 가장 인상적인 특징들”을 그보다 앞서서 담고 있는가를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역자 주11] 학문적으로 열린 미국의 대학들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호서대, 한신대, 연세대 등의 대학들에서는 연구자가 소속된 단체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연구논문들을 쓰도록 장려하고 있다.

캠벨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사회와의 연관성에서 명백히 이뤄졌다. 20세기 중반의 주류 개신교의 특징은 계시로써의 성서에 대한 신정통주의 견해들, 교회의 사회-정치적 민주주의와의 관계, 성서의 역사-비평 연구의 급성장, 종교생활에 대한 대중의 추구를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한 목사들과 교사들의 세대, 곧 이 새로운 세대에 의한 연구에서 부각된 캠벨의 관심들은, 비록 약점이나 맹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류 미국 개신교의 관심들과 현저하게 일치한 것들이었다.

(캠벨이 1840년에 자신의 농장에 세웠던) 베다니(Bethany)대학과 그 대학의 학장인 페리 E. 그레삼(Perry E. Gresham)은 캠벨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장려하였다. 1966년 그 대학은 S. 모리스 임즈(S. Morris Eames)의 <알렉산더 캠벨의 철학>(The Philosophy of Alexander Campbell)을 출판하였는데, 그 책은 캠벨이 “본질적인 종교적 신념들과 그의 동시대인들의 철학적으로 참신한 개념들을 어떤 형태로든 지적으로 조화시켜보려고 힘썼다”고 주장하였다. 6년 전에 그레삼은 <베다니의 현인: 광폭피륙의 개척자>(The Sage of Bethany: A Pioneer in Broadcloth)라는 에세이집을 편찬하였다. 에바 진 래더(Eva Jean Wrather)가 쓴 캠벨의 전기가 그녀가 사망한 2001년까지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책의 마지막 에세이로 실리게 되었다. 전후(戰後)시대의 캠벨 르네상스에 관해 해설하면서 래더는 과학적 인문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있고, 성서비평에서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고 있는 시점에서 캠벨은 유행이 지났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50년대의 두들겨 맞고 상처 입은 세계에서, 인간의 오만한 자급자족의 추락한 우상의 폐허 속에서, 알렉산더 캠벨은 때때로 놀랄만한 타당성을 가지고 큰 소리로 외친다.”는 점을 파악하였다.

1970년에 ‘그리스도인 출판위원회’(Christian Board of Publication)의 지도부는 새롭고 종합적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 서술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결정하였다. 역사가인 레스터 G. 맥칼리스터 2세(Lester G. McAllister, Jr.)와 윌리엄 E. 터커(William E. Tucker)가 작가로서 선발되었다. 1975년에 출판된 <믿음의 여정: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Journey in Faith: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가 제자들 교회의 권위 있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 개리슨과 드그루트의 1948년 역사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채택하면서 맥칼리스터와 터커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형성(창립)에로 귀착된 1968년의 조직개편을 관통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써나갔다. 새 역사의 해석구조는 개리슨과 드그루트가 만든 패턴을 따랐다. 스톤-캠벨 운동에서 생긴 갈등은 미국인의 삶에서 변화하는 사회적 동력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들의 결과에 크게 기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해석의 변화가 있었다. 앞서 기록된 역사들을 따르면서 개리슨과 드그루트는 스톤-캠벨 운동이 남북전쟁으로 인해서 나눠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가인 데이비드 에드윈 해럴 2세(David Edwin Harrell, Jr)의 저술에 영향을 받은 터커와 맥칼리스터는 기술적으로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이 남북전쟁으로 인한 공식적 분열을 피했지만, “불협화음의 씨앗들이 뿌려져, 재배되었고, 한 세대 후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제자들(그리스도인들)에서 분리될 만큼 자라서 만개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맥칼리스터[역자 주12]와 터커가 그들의 역사를 쓰기 시작할 때,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두 번째 공식적 분열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역자 주13]제자들(그리스도인들)에서 분리되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가까운 장래에 실현될 가망성에 대해 개리슨과 드그루트보다 더 적게 희망을 나타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제자들 교회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쓴 스톤-캠벨 운동의 역사를 대담한 선언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교회일치가 이뤄질 때까지, 세상이 그것을 믿도록,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는 성서에 기초한 교회 일치(연합)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증언할 것이다.”

[역자 주12] 맥칼리스터(Lester G. McAllister)가 편찬한 <알렉산더 캠벨의 글 모음>(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이 조동호 목사의 번역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다음의 인터넷주소를 클릭하면 번역된 책의 내용을 읽을 수 있다. http://kccs.pe.kr/main20.htm

    [역자 주13] 중도노선의 독립교회들(유악기파)

---(2)글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Historiography of Churches of Christ)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