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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1-17 10:58
(3)3세기에 걸친 스톤-캠벨 운동 역사: 조사와 분석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298  

 3세기에 걸친 스톤-캠벨 운동 역사: 조사와 분석
Stone-Campbell History Over Three Centuries: A Survey and Analysis

번역: 조동호 목사
출처: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목차

  • 서론
  • 운동사 저술에의 도전
  • 초기 역사들
  •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 미국 종교사 속에서 그 운동의 역사기술
  • 요약과 분석
  • 그 운동의 역사기술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상태
  • 참고자료
  • 역자 해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기술
Historiography of the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

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가들이 자기 집단을 위해 분열을 일으키는 분파 이야기만이 아닌 그 이상의 역사로써 한 지속적인 역사를 확인하려고 힘쓰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역사가들은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또 그 이상까지 그리스도의 제자들 내부에서 발생된 이념적 갈등과 제도적 분열을 언급하려고 힘썼다. 소위 ‘독립교회주의자들’(independents)에 속한 보수주의자들과 중도파들은 모두 스톤-캠벨 운동에서 주창해왔던 역사상 중요한 호소(plea)를 재고(再考)하였다. 이 재고는 역사적 성찰을 실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20세기에 발생한 제도적 신학적 갈등의 중심에 놓인 스톤-캠벨 운동의 미래 사명에 대한 그들 자신의 비전을 분명하게 밝히려는 관점에서 이뤄졌다. 신시내티 소재의 ‘스탠더드 출판사’(Standard Publishing)는 각 권이 그 자체로 약간의 독특한 관점들을 지닌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학자들이 저술한 특별히 중요한 세 권의 스톤-캠벨 운동사들을 출판하였다.

제임스 드포레스트 멀치(James DeForest Murch)의 <오직 그리스도인들: 환원운동사>(Christians Only: A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1962)는 오랜 기간 스톤-캠벨 운동의 표준 역사였으며,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 소속 대학 및 대학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J. 멀치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지된 자유주의 경향을 철저하게 반대한 비평가였고, ‘그리스도인의 환원 협의회’(Christian Restoration Association, 1925년 설립)의 초대 회장이었다. 그는 스톤-캠벨 운동이 ‘자유 교회’(Free Church) 교회론의 정점이었다는 점을 피력한다. 로마 가톨릭의 신시내티 시(市)의 주교인 존 뱁티스트 퍼셀(John Baptist Purcell)과 펼친 1837년 토론에서 알렉산더 캠벨이 추적한 논쟁의 여러 방식 중 하나에서 영감을 받은 멀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서문에서 스톤과 캠벨부자(父子)의 환원운동은 권위와 의식을 존중하는 교권주의(high-church ecclesiasticism)와 배도를 무시한 다른 운동들의 계통 속에 서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운동들을 하나님께서 꾸준히 일으키셨는데, 그들은 가톨릭과 정교회를 회피하고 “사도전통의 계승”(apostolic succession) 곧 신약성서기독교(New Testament Christianity)를 증언한 (때때로 박해를 받았던) 증인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유서 깊은 프리실리안파(Priscillians)[역자 주17]와 보고밀파(Bogomils)[역자 주18]가 있었고, 종교개혁이전시대에 카타리파(Cathari)[역자 주19]와 왈도파(Waldenses)[역자 주20]가 있었으며, 종교개혁이후시대에 재침례파(Anabaptists)[역자 주21]와 할데인(Haldane) 형제들[역자 주22]이 시작한 스코틀랜드의 환원운동이 있었다.

멀치의 온건한 승리주의(triumphalism)의 관점에서 볼 때, 스톤-캠벨 운동은 이들 환원운동들의 정점에 선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 자체는 전적으로 환원운동의 참된 소명에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작금의 개혁’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정녕코 또 다른 운동을 일으키실 것이다.”고 멀치는 기술한다. 그는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역자 주23] 미국의 상황에서 환원사역을 위한 영역을 섭리적으로 마련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기독교 역사에서 특히 미국 기원을 가진 가장 위대한 신앙운동”을 무르익게 한 것은 “선언과 제언”과 더불어 토마스 캠벨과 「그리스도인 침례자」(Christian Baptist)와 더불어 알렉산더 캠벨이었다고 역설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교회론적으로 충실하며, 시기적으로 백퍼센트 적절한 하나의 운동을 위해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멀치의 <오직 그리스도인들>은 캠벨부자를 다루고 나서야 비로소 발톤 스톤을 다룬다. 멀치는 스톤에게 교리적으로 (특히 삼위일체와 대속의 교리에) 의심스런 견해들이 있었음을 감지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또 스톤의 주된 공헌이 “그의 평화 정신, 그의 실천적 일치에 대한 소질 그리고 잃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그의 깊은 관심”에 있었음을 주장한다. 캠벨의 환원신학과 관련하여 스톤의 제한적인 지도자 역할에 관한 멀치의 소감은 스톤-캠벨 운동의 형성에 기여한 스톤의 중요성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에 퍼져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역자 주17] 프리실리아누스는 스페인 아빌라의 주교로서 ‘성경말씀에 따른 개혁’을 주장하다가 383년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글들과 가르침이 소각당하여 남은 것이 거의 없지만, 그의 사망 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와 투르의 주교 마르티노 등이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명예회복을 위하여 제소한 재판기록이 1886년에 발견됐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교회가 교권과 형식에 치우쳐 가는 것을 경고하여 성경연구와 성만찬 준수를 강조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순수하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렀다. 프리실리안파(Priscillians)를 공박하기 위해서 주후 400년에 스페인 톨레도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역자 주18] 보고밀파는 8-9세기에 성경연구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남은 기록은 대부분이 재판기록뿐이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나레크의 그레고리(Gregory of Narek)라 불리었으며, 역시 무서운 핍박을 받아 죽었고 세상은 이들을 ‘하나님의 벗’(Friends of God)이라 불렀다. 이들은 성모 마리아상과 같은 우상을 반대하였다.

    [역자 주19] 카타리파는 9세기경 발칸반도와 그 주변 섬에서 형성되었고, 중세 유럽 여러 지역에서 발흥하다가 14∼15세기경 소멸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순결한 사람’(Katharoi)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적이고 청빈적인 교회를 꿈꾸던 많은 개혁가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역자 주20] 프랑스 리옹의 발두스(Petrus Waldus, ?~1217)는 청빈(淸貧)을 실천하기 위해 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고, 지지자들과 함께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pauperes Christi) 혹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Poor men of Lyon)이라 불렀으며, 주교의 탄압에 대항하였다. 그의 사상은 청빈과 더불어 교황권위의 부정, 연옥의 부정, 평신도에 의한 사죄(赦罪)의 인정, 죄에 빠진 사제가 거행한 미사의 성사성(聖事性) 등을 부정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등지로 확산되어 종교개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역자 주21] 재침례자들은 유아세례, 이단자에게 받은 세례, 박해 때 배교했던 성직자에게 받은 세례 등을 부정하였고, 스스로 믿고 신앙을 고백한 후에 침례(believer's baptism)를 다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밖에도 성서의 권위회복을 강조하였고, 신약성서 교회로의 환원을 역설하였다.

    [역자 주22] 로버트 할데인(Robert Haldane/1764-1842)은 스코틀랜드의 부흥목사요, 저술가요, 박애주의자였으며, 할데인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그의 형제 로버트 할데인과 함께 스코틀랜드 교회를 탈퇴하였고, 인위적인 가르침을 버리고 사도 시대의 가르침에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경만이 신앙의 표준임을 강조하였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교회의 머리로 섬겼으며, 교회정치로는 개 교회가 다수 장로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회중주의를 주장하였고, 유아세례를 배제하고 침수세례를 베풀었으며, 매 주일마다 성만찬을 거행하였다.

    [역자 주23]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은 1720~40년대 사이에 미국의 영국식민주들에서 일어난 신앙부흥운동을 말한다. 이 부훙운동은 주로 칼뱅주의였던 네덜란드 개혁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일부 성공회 등에서 일어났다. 이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은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로서 성공회 사제였으며, 1739~40년에 미국을 방문하여 야영집회들을 열어 설교했다. 또 다른 주요 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로서 회중교회 목사였으며, 학자이자 변증가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움을 얻는다고 설교하여 호응을 얻었다. 제2차 대각성운동(the Second Great Awakening)으로 알려진 부흥운동은 1790년대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 때만큼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대학과 신학교들이 세워졌고 선교협회들이 조직되었다. 이 기간 동안 켄터키주에서도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야영집회 방식의 부흥운동이 발전했으며 19세기 내내 미국 개척지에 영향을 주었다. 켄터키주 부흥운동(the Kentucky revival)의 주역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오직 그리스도인 운동’(Christian-Only Movement)을 펼친 발톤 스톤(Barton W. Stone)이다.

‘전국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의 창립멤버로서 멀치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특히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과 동일시된 자유주의 곧 인지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주의에 직면해서, 그리스도인 일치에의 더 큰 임무에 스톤-캠벨 원리들이 끼친 공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국제 복음주의 연맹’(international Evangelical Alliance)에 대한 알렉산더 캠벨의 초기 지지는 중요한 선례로 남았다. 그렇지만 또 교회조직, 침례, 등등의 이슈들을 성서대로 복원하는 일에서는 비타협적이고 고집스런 태도를 취하였다. 멀치는 비슷한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의 제2세대 중에서 발전적 보수주의자인 아이작 에레트(Isaac Errett)의 지도력을 부각시켰다. 멀치에게 있어서 에레트(Errett)는 “고립주의 종파”(isolationist sect)가 되지 않도록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한 인물이다. 동시에 에레트는 자신의 책, <우리의 입장>(Our Position, 1870)에서 ‘신약교회를 복원하자’는 호소(restoration plea)를 더 넓은 개신교 세계에 지적으로 세련되게 발표한 인물이었다.

멀치는 20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대배도’(Great Apostasy)의 결과로 인해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이 당한 재난을 분석한다. ‘대배도’는 ‘대논쟁’(Great Controversy)으로 이어졌다. ‘대논쟁’은 ‘신약교회를 복원하자’는 호소(restoration plea)를 놓고 윤곽이 뚜렷한 세 줄기가 총력을 기울여 마찰한 이념전쟁이었다. 멀치는 세 줄기를 미국 그리스도인 문화에 속한 남은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크게 분리시킨 반동(보수)적 ‘우파’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신(新) 복음’을 끌어들여 환원 강령을 전부 버린 ‘좌파’ 진보주의 제자들 그리고 발전적 보수주의에 헌신했던 “중도파” 신실한 자들로 나누었다. 멀치는 우파와 좌파 모두에 동정적 주변부 그룹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중도파를 직접적으로 신생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로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도파 근거의 제도적 구현을 기술하면서, ‘연합 그리스도인 선교회’(United Christian Missionary Society)에 대항하여 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초기 교단화(교권주의)에 대항하여 결집한 성서대학들과 교회들을 네트워크로 빠르게 하나로 묶는 선교기획들을 주로 열거한다.

멀치는 진보주의 제자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개입하면서 보여준 타협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으로, 자기 자신이 전역(全域)의 스톤-캠벨 교회들에서 관심 있는 중도파(Centrists)를 이끌도록 도왔던 내부일치협의회(Consultations of Internal Unity)에 대해서는 희망 섞인 진술로, 또 세계교회주의(ecumenism)의 현 상황이 오히려 ‘신약교회를 복원하자’고 호소(restoration plea)하기에 또 한 번의 적절한 기회란 것을 긴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인들>의 끝을 맺는다. 멀치는 심지어 세계교회협의회(WCC) 안에도 환원 프로젝트에 열려있는 요소들이 있어왔다는 사실, 즉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신실하게 주창하는 자들이 성서적 진리에 관해 진지하게 논의할 준비가 될 때, 에큐메니컬 운동의 협의들 속에서 그 날이 곧 도래할 것이 드러날 것이다”는 사실에 용기를 낸다.

멀치의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출판된 지 거의 30년 만인 1990년에 스탠더드 출판사가 헨리 웹(Henry Webb)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찾아서: 환원운동사>(In Search of Christian Unity: A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를 세상에 내놓았다. H. 웹은 이 책이 더 새로운 역사적 관점들을 고려할 수 있는 신선한 접근을 제공할 것으로 믿었다. 밀리건 대학(Milligan College)의 교회사 교수를 역임한 웹은 멀치가 특징적으로 시도한 환원운동가의 재건(restorationist reconstruction)으로 첫 장을 시작한다. 환원운동가의 재건이란 “수세기에 걸쳐 역사 속에 있어왔던 ‘참 교회’를 추적하려는 시도가 이런 역사기술(work)에서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으나 1세기이후로 교회는 언제나 참 교회의 구성원들로 정말 헌신적인 성도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또 역설적으로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할 필요가 있었다.”는 역사관을 말한다. 그래서 웹은 스톤-캠벨 운동이 이룬 독자적인 성취들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개혁’이란 더 큰 틀(work)의 일부로써, 스톤-캠벨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의 공동노력을 고찰한다. 멀치와는 달리 웹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의 화해라는 하나의 목적에 대한 일종의 수단으로써 그것의 실행 가능성을 여전히 주장하는 동시에, 또 그것의 내재된 복잡성을 지적하면서 ‘환원’ 이상 그 자체를 더 면밀히 비판적으로 기꺼이 검증받게 하려고 한다.

또 멀치와는 대조적으로 웹은 스톤-캠벨 운동의 형성과 역사를 해석할 때 사회-문화적인 요인들을 고려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예를 들면, 그는 옛 남서부지역에서의 발톤 스톤의 ‘그리스도인 운동’(Christian Movement)을 솔직히 애팔래치아(Appalachia)[역자 주24]역을 가로지르는 변방의 종합적 종교문화에 엮으려 한다. 게다가 노예문제와 남북전쟁에 관한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투쟁의 여파를 분석하면서 웹은 [데이비드 에드윈 해럴 2세(David Edwin Harrell, Jr.)에 동의하면서] 좀 더 풍성하고 도시 공업화된 북부와 더 가난하고 대부분 발전하지 못한 시골지역인 남부사이에서 제자들(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에 분열을 재촉하는 잔존하는 ‘문화적 갭’(cultural gap)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예배에서 악기사용과 같은 이슈는 전적으로 해석학적 갈등으로써가 아니라, 오르간이나 멜로디언들과 같은 호사를 솔직히 누릴 수 없는 남부지역 회중들의 견해를 달리한 표현으로써 이해되어질 수 있다.

웹의 역사서가 거둔 주요 공헌은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 사이에 마침내 분열을 일으킨 개인과 제도적 반목을 상세하게 (그러면서도 멀치와 비교했을 때 덜 의도성을 가지고) 다룬 것이다. 웹은, 멀치의 전례를 따르면서, 선교론, 교회론, 해석학의 근본적 차이와 좌우 분극화를 막기 위한 1940년대 ‘재검토 제자들 위원회’(Disciples' Commission on Restudy)에서 드러난 온건파의 무능을 강조한다. 웹은 진보주의자들과 초보수주의자들이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을 또 다른 공개적 분열로 몰고 갔을 때 온건파들은 사실상 거기서 밀려 났다고 주장한다. 웹은 멀치보다 훨씬 더 기꺼이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역자 주25]지와 북미주 그리스도인 대회(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역자 주26]에 소속한 초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 제자들(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분열에 대한 공동책임을 져야한다고 본다.

웹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찾아서>는 스톤-캠벨 전통의 세 가지 영속적인 지류들의 강점과 직면한 도전 모두를 공정하지만 비판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결론에서 보여준다. 웹이 자신이 소속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내적 동력과 교회론의 특성들에 대해서 내린 분석은 특히 중요하다. 웹은 이들 교회들이 개 교회자치에 쏟는 헌신을 조심스럽게 고찰하지만, 그들이 수많은 소속 선교단체들(parachurch organizations)[역자 주27] 협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근본적으로 ‘비협조적’일 것이라는 오해를 바로잡고자 노력한다. 웹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직면한 일부 첨예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뛰어난 식견을 제공한다. 이들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에는 (일부 학자들과 교회들이 수용한 성서의 무오설과 같은) 근본주의의 유입, 여성목회자에 대한 찬반 토론, 그리고 신학적 사회학적 다양성의 유감스런 부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웹의 역사서의 결론은 교단화에 저항하면서 ‘독립(무소속)’교회로 남아있는 중도파 대표자들에게 적어도 저자가 분명히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독특한 공동체로써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출현에서는 승리주의의 표현이 덜했다는 것이다.

[역자 주24] 미국의 동북부 뉴욕 주로부터 동남부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주에까지 펼쳐진 미동부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산맥과 그 지역을 일컫는다.

    [역자 주25] <크리스천 스탠더드>는 1866년에 창간된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Independent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의 대표적인 주간지이다. 제20대 미국 대통령 제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 필립스 석유회사의 소유주였던 T. W. 필립스(T. W. Phillips), 초대 편집자였던 아이작 에레트(Isaac Errett) 등이 창간멤버로 참여하였다.

    [역자 주26] 북미주 그리스도인 컨벤션(NACC)은 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의 반작용으로 1927년에 시작된 독립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Independent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이 매년 1회 여는 큰 모임이다.

    [역자 주27] 주변교회(parachurch)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교파시스템이 역동성을 잃고 경직화되면서 교파제도가 하나님의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교의 걸림돌이 된다고 보는 시각이 생기면서 등장한 운동이다. 미국에만 이런 주변교회가 10,000개가 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주변교회의 대표적인 조직으로는 YFC(Youth for Christ), IVC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월드 비젼(World Vision)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수많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스탠더드 출판사는 1990년대에 신시내티기독대학교(CCU)의 교회사 교수인 제임스 노스(James North)가 저술한 또 한 권의 역사개론서, <진리 안에서 연합: 환원운동의 해석사>(Union in Truth: An Interpretive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1994)를 출판하였다. 노스는 자신의 책보다 조금 먼저 출판된 저술들, 곧 리로이 개리트(Leroy Garrett)의 <스톤-캠벨 운동>(The Stone-Campbell Movement, 1981; 1994년 개정판)과 웹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찾아서>(In Search of Christian Unity)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개리트의 『스톤-캠벨 운동』은 환원사상의 포기를 인지한 것 때문에, 웹의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찾아서>는 특징적으로 중도(中道)적인 관점 때문에 비판적이었다. 노스는 스톤-캠벨 운동이 일치와 환원이란 두 원칙들을 놓고 비극적인 분열을 겪었다는 해묵은 주제를 이용한다. 그는 그의 수정된 해석에서 스톤-캠벨 운동이 일치와 성서 권위라는 한 쌍의 관심들을 통합할 능력에 따라서 일어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다고 제시한다. 노스의 확신은 명확히 프로그램에 입각한 환원을 통해서만 오로지 성서의 참 권위가 그리스도인 일치의 토대로 존중될 것이라는 것이다.

노스는 환원이상이, 스톤-캠벨 운동만의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기독교 세기들에서 단지 제한된 표현에 그쳤다고 한 번 더 주장한다. 멀치가 그랬던 것처럼, 노스도 19세기의 환원운동을 교회사를 통틀어 일치와 성서 권위의 두 원칙이 결정적으로 결합된 최초의 개혁운동이자 정점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스는 멀치보다 더 과감하게 “이[환원] 운동”의 역사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C)과 그리스도의 교회들(COC)의 역사가 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노스는 사도시대말과 알렉산더 캠벨의 등장 사이에 끼인 보편적(catholic)인 기독교역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은 거만이며 뻔뻔함이었다는 웹의 주장에 동의한다. 노스는 뻔뻔한 승리주의를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를 철저히 배제한 멀치의 사도전통을 신실히 계승한 ‘남은 자’ 교회의 재건론을 공공연히 비난한다. 캠벨부자는 사도들의 기독교를 다시 세우지는 않았으나, 이전의 개혁가들처럼, 사도들의 기독교를 힘써서 식별해내고, 복원시켜야 했다. 그러므로 노스는 캠벨운동에서의 환원사상에 대한 궁극적 표현과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의 환원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유산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가지고 [교회]개혁에 대한 더 광범위한 역사적 전망에 감성을 결합한다.

노스는 캠벨부자가 그들의 개혁을 환원(restoration)운동으로써 모양을 갖추는데 있어서 발톤 스톤보다 더 우위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웹과 멀치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화해에 대한 스톤의 관심이 어떻든 간에, 스톤-캠벨 운동의 헌신을 “진리 안에서 연합”(union in truth)에 한정한 것은 캠벨부자의 덕분이었다. 다음으로 노스는 진행 중인 성서권위의 위기로써 분열이 스톤-캠벨 운동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추적한다. “악기들, 선교회 조직들, 전임(located) 설교자들은 다툼이 일어난 이슈들의 상징들이었다. 그러나 진짜 이슈는 성서 권위의 적용이었다.” 그 점에 있어서 양진영은 고전적인 사례인 예배에서의 악기사용을 허용으로 봐야할지, 금지로 봐야할지를 두고 다투면서 서로 자기 진영의 주장이 성서적이라고 확언하였다. 차이점은 성서 권위의 상세한 적용, 이를테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었다. 마침내, 노스의 견해에 따르면, “무악기 주창자들”은, 그들이 편의의 원칙(principle of expedience)[역자 주28]을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인 일치에 대한 관심사에서 성서의 권위를 깨뜨렸다.

 [역자 주28] 환원운동가들이 의존한 세 가지 표준 가운데 비본질 문제에 대한 ‘자유’ 결정을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은 비본질에 속하는 신약성서가 침묵하는 부분을 금지로 보았고(“성서가 말하는 것은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침묵한다.”에서 침묵을 금지로 해석함).

그러나 제자들(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다음 국면의 분열은 진보주의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서의 고등비평에 전념하면서 성서의 위상과 권위를 무너뜨렸고, 또한 그리스도인 일치에 대한 관심사에서 성서를 격리시켰다. 그러므로 진보적인 제자들 세계교회운동가들에게 일치의 추구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노스의 결론은 퉁명스럽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의 반대쪽 극단에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들과는 달리, 성서권위에 대한 그 어떤 진정한 감각조차 없었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들은 이미 성서에 신실한 보수주의자들과 일치하기보다는 세계교회운동의 화해를 끌어안았다. 모든 점에서, 제자들(그리스도인들)사이, 즉 진보주의자들과 독립교회주의자들(independents)사이에서 일어난 제2차 분열이 1925년에는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었다고 노스는 선언한다. 이 점에서 노스는 제2차 분열이 1940년대 재검토 위원회(Commission on Restudy)가 실패한 후에 비로소 현실로 드러났다는 멀치와 웹의 판단과 의견을 달리한다.

만약 멀치, 웹, 노스의 역사서들 사이에 공통적인 맥락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독립교회주의자들, 곧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출현이 스톤-캠벨 전통에 선 ‘중도’를 통합할 합법적인 후계자들이었는가를 명확하게 따져봐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멀치와 노스와 더불어 중도적 입장에 선 자들은 복원에 전념한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과격한 분리주의자 사고방식을 경계한다. 그러나 웹에게 있어서 참된 중도주의자들은 복원의 제약성과 복잡성을 이해해 왔고 또, 재검토 위원회의 정신에서, 스톤-캠벨 운동의 본래성과 일치를 위해서 좌파와 우파로 기운 극단들을 함께 아우르는 실현 가능한 총의(總意)를 바라본 저 독립교회주의자들이었다.

---(4)글에서 미국 종교사 속에서 그 운동의 역사기술(Historiography of the Movement in American Religious History)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