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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3-03 21:14
나의 아버지 정찬성 목사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2,428  
   http://kccs.info/jungchansung2110303.htm [435]

나의 아버지 정찬성 목사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가정

글과 사진제공: 정형기 목사
사진보정 및 워드작업: 조동호 목사

저는 1947년 3월 27일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렬리 677번지에서 아버지 정찬성 목사와 어머니 김용선 전도사 사이에서 5남매 중 3째 아들로 태어나 지금 예광순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정형기 목사입니다.

저의 아버지 정찬성 목사님은 6.25사변이후 충청도에서 목회하시다가 195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은석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1957년 4월 25일(목)에 소천 하셨다.> 왜정 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숨어 다니며 전도를 하셨는데, 왜경에 잡혀가 많은 매를 맞고 거의 죽게 되어 집으로 돌아오셨고, 회복이 되면 또 다시 잡혀가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의 가정은 순교자 유족회에 등록이 되어 있습니다.

선친께서는 원래 봉건적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시다가 절벽 아래로 굴러 다리가 얼음 속에 박혀 심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 어느 여집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감동을 주셨던지 저의 아버지는 강한 소명감을 가지게 되셨고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수많은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김상호 목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전통을 중히 여기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핍박이 시작되었고, 일정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인들을 잡아들이려 할 때 저의 부친은 구두 나우시통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전도하시다가 일본순사에게 붙잡혀 많이 맞으셨습니다. 회복되면 다시 잡혀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회복 후 충청도 지방에 7-8군데 교회를 세우시면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동량 그리스도의 교회, 소태 그리스도의 교회, 외령 그리스도의 교회, 삼방 그리스도의 교회, 충주 오순절 교회, 삼정 그리스도의 교회, 부여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 등을 세우셨으나 현재 이름이 바뀐 교회도 있습니다.

당시 선친께서는 고려 통신 신학과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을 수료하시고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가 되셨습니다. 처음에 제가 알기로는 제가 태어난 직후 충복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서 외령 그리스도의 교회 (유봉현 목사 시무)를 세우시고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부흥이 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개척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약 400여리 떨어진 충남 부여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하여 오촌 조카와 가족들을 데리고 간단한 짐만 손수레에 싣고 14일 걸려 이사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게 된 동기는 해방 후 한 독지가가 수천 평의 땅을 헌납하셨으므로 5촌 조카(정석기 장로)는 농사를 짓고 아버지는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교회를 설립하셨는데, 그 교회가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입니다. 얼마 후 다시 충청도로 오셔서 신탄진에 교회를 개척하시고 목회를 하셨습니다. 1957년 2월 15일 기하성 본부의 후원으로 강희천씨 집을 매입하여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삼정교회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지금의 삼정순복음교회의 전신입니다. 지금 청주순복음교회 당회장이신 권문집 목사님이 당시 삼정교회 교사로 일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현재 충주순복음교회의 전신인 오순절 충주 교회도 개척하셨습니다.

당시는 먹을 것이 없던 가난한 시절이어서 가족들이 밥을 자주 굶었으나 아버지는 몇 시간씩 기도만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미국 선교부에서 구호물자인 강냉이 가루, 우유, 옷, 신발 등을 보내오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가족들은 손도대지 말라시면서 이웃에게 나눠주며 전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뒷줄 좌측부터 김용선 사모, 정동순(일본 고베순복음교회 사모), 정찬성 목사, 정인자.
앞줄 좌측부터 정인순 집사, 정형기 목사(예광순복음교회, 당시 7살), 정용기 목사(공주 탄천순복음교회)>

당시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는 성령론에 대한 이견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측에서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를 단회적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성령운동과 방언하는 것을 비성경적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저의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를 탈퇴하시고, 때마침 오순절 교파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가 설립되었으므로, 몇 분의 목사님들과 함께 가입하여 그 이듬해인 1955년 4월 27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기하성 제1호 목사가 되셨습니다.

    <우측 사진은 2003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희년 대회를 기념하여 2002년 11-12월호 [기쁨의 해]에 실린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희년 50인 인물'에 오른 정찬성 목사와 김상호 목사를 따로 떼어내어 편집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기하성 초기 목회자로 이름이 올랐으며, 김은석 목사와 함께 동역자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활동하다가 성령론에 대한 이견 때문에 교단을 옮겨간 대표적인 분들이다.>

한때 미국 선교부로부터 한국의 목사님들에게 재봉틀 10대를 보내왔는데, 당시 목사님들은 25명이었고, 재봉틀은 10대밖에 안되니, 목사님들이 모여 기도하고 제비를 뽑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지께서 당첨되셨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목사님께 양보를 한다고 하셨는데, 다른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냥 쓰시라고 했습니다. 당시 참 필요한 것이고, 동네에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같이 쓰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부흥회 인도차 가시고 어머니께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 5남매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설교 도중에 빨리 사택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나서 예배를 마치고 빨리 들어가 보니, 아이들 자는 방에 도둑이 들어 재봉틀을 훔쳐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경찰에 신고를 하고 각 지역에 연락을 해서 재봉틀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부흥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시는데, 이웃이 먼저 반기며 목사님 엊그제 댁에 도둑이 들어 재봉틀을 훔쳐갔대요 하시니, 아버지는 태연하게 우리만 쓰면 되나요 돌아가면서 써야지요. 우리가 너무 오래 쓴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경찰에 신고할 필요까지 있었느냐며 나무라셨다고 합니다. 얼마 후 도둑은 잡히고 물건을 찾았는데 유치장에 있는 피의자를 면회 가서 사식도 넣어주고 위로해 주며 석방운동을 펼치셨다고 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후 아버지는 신사참배 거부로 매 맞으셨던 것이 병이되어 복막염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순교자 유족회에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충주교회는 아버지 후임으로 총회에서 양찬석 목사님을 보내셨고, 우리 가족은 동네에 셋방을 얻어 나가 살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주님을 위해 일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라며 실망을 했었고, 그 뒤로 식구들이 뿔뿔이 헤어졌으며, 고생이 많았지만 믿음으로 극복하고 잘 견뎠습니다.

더러는 세상 일로 죽어도 순국자로 인정받고 칭송을 듣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를 7-8군데나 개척하시고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신 부친의 노고가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당시, 우리 자녀들이 성인만 되었더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뒤 30년이 지난 1985년경 그 교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등기를 찾아보려고 갔었지만, 아버지가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여러 사람에게 넘어간 뒤였고, 그래도 찾아보려고 했으나 시효가 지나 법적 효력이 없어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아버지의 노고를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이내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눈에 보이는 재산은 단 한 푼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가장 값진 신앙을 유산으로 받아 온 가족이 영적인 복을 충만히 받아 오늘까지 믿음으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1975년 대조동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경기도 금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천국가신 최자실 목사님께서 도와주셔서 1980년 금촌 순복음교회를 설립하여 목회를 하였고, 교회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후 서울에서 3년, 강원도에서 3년, 남미 에쿠아도르에서 선교사로 5년, 충남 공주에서 5년, 지금은 충북 음성에서 7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목회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귀한 딸을 주셨는데, 그 아이가 커서 시집을 갔습니다. 사위는 목사로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2007년 5월 14일 제가 목회 30년 근속패를 받았으며, 마침 제가 60회 생일까지 겹치게 되어 목회 30년 근속 및 회갑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형님 정용기 목사님은 충남 공주에서 탄천 순복음교회에서 목회하고 계시며, 여동생은 일본 고베 순복음교회(한복남 목사)에서 사모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정형기 목사: 예광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요양원 즐거운 우리 집 대표, 월드비전 충북 음성 지부장, 한민족 사명자 연합회 사무총장, 기하성(통합) 부흥사회 자문위원, 기하성(통합) 특재위원장, 경찰청 교경협의회 중앙위원>


스티그마 11-05-03 15:34
답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렇듯 훌륭하신 목사님들의
acts29의 행전이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