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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4 01:54
목회지도력과 성례전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01  
목회지도력과 성례전
Ministerial Leadership and Sacrament
http://kccs.pe.kr/thesis012.htm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으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귀납적 추리, 합리적 사고, 권위 무시, 전통 무시, 다원화, 다중화, 신사고 등의 분위기 속에서 이동성, 익명성, 실용성, 불경성, 소유보다는 임대개념의 임시성(disposability)과 일회성 문화(throw-away culture)에 익숙해져 가고 있고, 경박한 합리주의, 이성주의, 과학주의, 편의주의, 배금주의, 향락주의, 기술만능주의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다. 이로 인해서 한국 교회는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아주 가까운 장래에 경험하게 될 정보통신과 기술과학의 발전은 그 침체의 속도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필자는 전망되는 미래사회를 간략하게 점검해 보고 교회가 가져야 할 목회지도력을 성례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1. 미래사회에 나타날 현상과 교회에 미칠 충격

학자들은 미래 사회를 종교 없는 사회, 니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없이 사는 초인적 사회, 하나님보다는 컴퓨터나 로보트에 의존하는 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미래사회에 나타날 현상과 교회에 미칠 충격들에 대해서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 미래사회의 현상을 3T로 표현한다. 3T란 Transportation, Telecommunication, Travel의 머릿글자로써 교통, 통신, 관광을 말한다. 교통, 통신, 관광의 발달은 사람들을 교외나 해외로 빠져나가게 하기 때문에 모이는 교회를 위축시킬 전망이다. 또 주거가 일정치 아니한 미래인들의 이동성과 잦은 나들이로 인해서 기존의 목회구조를 무력화시킬 전망이며, 휴양지 신앙인이나 등산객을 위한 편의점식 교회가 등장할 전망이다.


둘째, 미래사회의 현상으로 사이버펑크족의 증가를 들고 있다. 사이버펑크(cyberpunk)란 인공두뇌학이란 뜻을 가진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이상한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을 상징하는 펑크(punk)의 합성어로써 컴퓨터 세대 또는 X세대를 의미한다. 이들을 네티즌(netiz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티즌(netizen)이란 말은 컴퓨터 통신망을 의미하는 net와 시민을 뜻하는 citizen의 합성어이다. 또 네티즌의 특징을 PANTS로 표현한다. PANTS란 Personal, Amusement, Natural, Trans-border, Self-loving의 머릿글자로써 개인주의, 흥미본위, 자유분방, 탈 성별 또는 탈 국경, 그리고 자기 사랑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의 성향이 이렇다보니 모이는 교회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또 사이버펑크족의 증가로 공동체 의식이 약화되고 개인화 고립화가 증대된다. 컴퓨터 오락, PC통신, 인터넷, 뉴 미디어 등을 통해 형성되는 사이버 공간과 다차원 영상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기회를 축소시키고, 공동체 정신을 약화시키게 된다. 또 폭력성 영화나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성인용 프로그램을 컴퓨터, 케이블 TV, 인공위성 매체를 통해서 손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윤리의식이 약화되고 어른에 대한 권위가 떨어지게 된다.


셋째, 미래사회의 현상으로 거미시대의 등장을 말한다.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 교수는 "21세기 정보사회의 마인드"란 주제의 강연에서 근대문명을 가능케 한 개미와 같은 조직중심 시대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며, 앞으로 오는 시대는 거미와 같은 멀티미디어 시대라고 예견했다. 개미처럼 조직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거미처럼 인터넷 망에 걸려드는 정보를 먹이로 외롭게 살아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는 사라지고, '찾는 것이 힘'인 시대가 도래한다. '노우-하우(Know-How)'를 묻던 시대는 사라지고, '노우-훼어(Know-Where)'를 묻는 시대가 도래한다.


넷째, 미래사회의 현상으로 사이버 스페이스를 말한다. 인터넷 통신망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인터넷 통신망을 통해서 세계 어느 곳이든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국경을 넘나들 수 있고, 필요한 정보를 얻고 홍보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이버 스페이스를 이용한 전자교회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텔레비전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되어왔고, 최근에 와서는 인터넷을 통한 전자교회가 늘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사이버 그리스도의 교회도 발견이 된다. 심지어 영국의 성공회는 전자우편을 통해서 고해성사를 받고 사죄의 은총을 베풀고 있다고 95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교회는 국경을 초월한 국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재택 산업이 발달하여 재택 근무나 재택 수업 등이 일반화되는 때가 오면 모이는 교회의 누수현상은 더욱 두드려질 전망이다.


다섯째, 미래사회의 현상으로 정보통신의 가속도(speed)를 말한다. 현재 전화선과 28,800 bps 모뎀을 통해서 제공되고 있는 인터넷 서비스보다 300배 빠른 인터넷 서비스가 케이블 TV선을 이용해서 시범실시되고 있다. 이쯤 되면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각종 정보를 모뎀이나 초고속 광통신 케이블을 통해서 문자뿐 아니라, 소리와 그림까지도 자기 방에 앉아서 책장 넘겨보듯 살펴볼 수 있게 된다. 필요하다면 언제 어느 때든지 자기가 원하는 목사의 설교를 국내외를 막론하고 컴퓨터를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된다. 아직 통신이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듣지는 못하지만, 읽어보거나 받아 볼 수는 있다. 현재도 Streamworks Player와 Real Audio라는 소프트웨어를 인터넷에서 다운(down) 받아 설치하면 인터넷을 통해서 제공되는 각종 텔레비전 방송이나 라디오 방송을 보기도 하고 청취할 수도 있다. 또 한번 듣고 흘려 버릴 수밖에 없던 방송 내용을 문자로 제공받아 사용할 수 있고, 다양한 종류의 신문 및 잡지의 기사 내용을 그림까지 포함해서 컴퓨터로 불러와 사용할 수 있다.


요즘 미국 대학은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고, 필기도 노트북에 집적한다고 한다. 한편, 미국의 법학대학들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Lexis-Westlaw라는 법률정보 시스템으로부터 무료로 모든 판례, 정부 간행물, 신문, 잡지, 학술지 등을 24시간 온라인으로 공급받고 있어서 교수들과 학생들이 판례집을 뒤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다. 컴퓨터를 통해서 집에서도 얼마든지 필요한 자료를 뽑아 볼 수 있기 때문에 공부는 도서관에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교수의 권위가 이전처럼 유지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교회에서의 목회자의 권위도 그 만큼 상실될 전망이다.

2. 목회 지도력과 성례전

지금까지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미래사회가 모이는 교회에 몰고 올 충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교회는 지난 2,000 동안 정치 사회 문화의 충격들에도 불구하고 잘 적응해 온 것처럼 미래사회의 충격에도 잘 적응하게 되리라 보지만, 교회가 이를 충분히 검토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벼랑으로 몰리고 말 것이다.
과학기술사회 건설 이면에는 '신 없이도 완벽한 사회'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메시아주의의 투쟁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를 대응하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미래의 교회는 이농현상과 같은 충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목회지도력과 관련된 목회자의 사역은 설교, 성례전, 상담, 돌봄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설교와 성례전은 모이는 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개신교 목회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예닮교회 김호식 목사의 말을 빌리면, 70 퍼센트 이상이다. 반면 침례 성만찬은 일 년에 그저 한 두 차례 정도하고말고, 그나마 중요하다는 인식도 부족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앞으로 교인을 교회에 붙잡아 두기가 어렵게 된다. 앞으로 설교는 케이블 TV나 PC통신 또는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인사의 설교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일이 음성과 화상서비스로 제공되는 때가 되면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유명인사의 설교를 듣거나 읽을 수가 있게 된다. 이렇게 앞으로의 시대는 일방적으로 차례진 밥상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 자기 입맛 따라 골라 먹는 시대가 된다. 방송의 경우에도 몇 시에 무슨 프로그램이 방영된다는 식의 개념은 사라진다. 다양하고 특화된 장르의 예비된 프로그램들을 메뉴판에서 골라 보는 시대가 된다. 특정한 프로그램이 특정한 시간에 방영된다 하더라도 시청자가 이를 반드시 방영되는 시간에 시청할 필요가 없게 된다. 편리한 시간에 메뉴판에서 불러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텔레비죤 교회나 인터넷 상에 설치된 사이버 교회들도 보다 다양한 설교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설교만을 듣기 위해서 시간에 쫓겨가면서 교통체증과 주차난에 시달려 가면서 교회당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 하나만으로는 미래사회에서 목회지도력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런 이유로 해서 미래사회에서는 말씀 중심만의 교회가 퇴보하고, 성례전적인 교회가 약진 할 것으로 전망된다.


1996년 10월 11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세미나 안내 기사에 따르면, "세례-성만찬 바른 이해 미래 목회갱신 이끈다."로 되어 있었다. 10월 15일 이종윤 목사, 미국 보스턴 대학의 호레스 알렌박사, 감신대 김외식 교수가 강사로 나서서 "개신교회가 갖는 두 개의 성례전인 세례와 성찬식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예배와 설교의 갱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는 내용이었다. 미래 교회에서의 침례와 성만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세미나라 생각된다.


미래사회에서 모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무엇으로 가르칠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 목회지도력을 유지하며 교회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겠는가? 필자의 소견으로는 성서적인 성례전의 회복이야말로 목회지도력의 회복과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례전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야 하며, 성만찬은 매주 행해야 하며, 침례 성만찬은 반드시 목사가 집례해야 한다.


그러면,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례전의 중요성을 교육해야 하며, 성만찬을 매주 행해야 하며, 반드시 목사가 집례해야 하는가? 그 이유와 함께 성례전이 목회지도력에 미치는 영향을 성서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성례전은 미래교회에서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다. 물론 성례전 말고도 목회지도력의 향상이나 유지와 관련된 요건들이 있겠지만,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들이 대단히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것이 성례전이란 점과 현대교회의 누수현상 그리고 목회자의 지도력 상실이 이것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신 대학교의 박근원 교수는 {기독교사상} 1991년 8월호에 실린 그의 "세례와 견신례의 의식적 가치"라는 글에서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유아세례야말로 서방교회 전통이 만들어 낸 최대의 과오라고 지적한 바 있고, 에밀 부르너와 위르겐 몰트만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그는 유아세례 제도야 말로 서방 기독교가 몰락하는 주요원인이며, 누수의 진원일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고, 이런 서구교회의 모순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에도 전수되어 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누수현상의 전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유아세례 하나만을 문제시 한 것이 아니라, 성례전 자체를 보다 중요하게 인식하고 다루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정확한 교육이 필요하다. 성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 받는, 이 다섯 가지 과정은 하나로 연결된 과정이다. 중간에 어느 것 하나가 빠져도 좋고 있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듣고, 믿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 받는, 이 다섯 가지 과정은 구원의 열차를 달리게 하는 다섯 가지 중요한 부품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빠져도 기차는 달리지 못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값싼 믿음만을 강조해서는 미래 교회의 누수현상을 막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과정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죄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며, 구원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하며, 침례를 통해서만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침례론과 교회 공동체에 소속을 두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없다는 교회론의 인식이 없고서는 누수현상을 줄일 수가 없다.


둘째, 성례전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야 한다. 설교는 다른 매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듣고 볼 수 있겠지만, 성만찬만큼은 교회로 가야 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매주 성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제대로 교육이 되면, 예배에 빠지는 사람의 수를 줄일 수 있다. 들로 산으로 가서 말씀만 들어서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또 교회는 매주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를 감사예배, 기념예배, 기원예배, 친교예배, 그리고 종말론적인 축제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예식이기 때문에 성만찬을 재고하지 않고서는 사이버펑크족들이나 여행족들을 교회로 끌어드릴 수가 없다. 교회는 무엇인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자주 주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바로 성만찬이라고 생각된다.


매주 행하는 성만찬 예배는 사도들의 전통이다. 성만찬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부탁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출발된다. 이 명령을 따라 베드로 중심의 예루살렘교회는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 모여 성만찬을 행하였다(행 2:42,46; 3:11; 5:12,42; 20:7; 눅 24:53). 바울이 세운 유럽의 교회들도 "떡을 떼기 위해서"(행 20:7) 또는 "먹기 위해서"(고전 11:33) 주일 날 교회에 모였다.


매주 행하는 성만찬 예배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전통이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예배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 {디다케} 14장 1절은 주일마다 성만찬을 행할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과실을 회개함으로써 여러분의 봉헌물을 정결케 하시오."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시우스는 주후 107년경에 로마로 끌려가는 도중에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만찬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게 할 불사의 영약이오 해독제" 라고 말하면서, 주일 날 모이지 아니 하면, "하나님의 빵을 빼앗긴다."고 말했고, "한 자리에 자주 모이면, 사탄의 권세는 파괴된다."고 했다. 이그나시우스는 주일 날 자주 모여야 할 당위성을 불사의 영약이며, 죽음의 해독제인 성만찬에서 찾고 있다. 그의 서신 5장, 13장, 2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장: 아무도 속지 말라. 사람이 제단의 경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빵을 빼앗긴다. 한 두 사람의 기도가 그토록 역사하는 힘이 크다면, 목사와 전체 교회가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더 역사하는 힘이 크겠는가? 집회에 참석치 않는 자는 이미 바람에 까불리는 것이며, 심판을 받은 것이다. . .
13장: 그러므로 열심을 내어 더욱 자주 모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 여러분이 한 자리에 자주 모이면, 사탄의 권세는 파괴되는 것이며, 여러분이 믿음으로 화합하면, 사탄의 파괴성은 무너지는 것이다. . .
20장: 공동으로 함께 모이라. 여러분 모두가 은혜 가운데서 한 믿음과 육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동요없이 목사(the biship and the presbytery)에게 복종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살게 할 불사의 영약이요, 해독제인 빵을 떼도록 하라.

주후 112년경에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로마 지방장관이었던 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트라잔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지역의 교회가 정한 날 새벽 미명에 모여 연도형식(alternate verses)의 찬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며, 십계명과 같은 엄숙한 맹세를 했으며, 흩어졌다가 저녁에 다시 모여 "보통의 흠없는 음식에 참여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그가 쓴 {첫 번째 변증서} 65-67장에서 2세기 중반의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성서를 봉독하고, 목사(the president of brethren)로부터 설교를 듣고, 모두 일어서서 기도한 후에, 목사에 의해서 빵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례와 헌금과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분병례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은 물론 침례를 받는 자이다.


교회는 처음 4세기까지 신자들이 참여하는 매주일 성만찬을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3세기 초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의 논문 "기도에 관해서"(On Prayer) 19장에서 말하기를, 금식 중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만찬을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동방교회의 교회법(Canon) 28조에 의하면, 성만찬을 "삼 주간을 거른 자는 파문 당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주후 341년에 열린 안디옥 공의회에서는 "교회에 출석해서 봉독된 성경말씀을 듣고, 기도와 성만찬에 참여치 않는 자들은 그들의 회개가 공개적으로 입증될 때까지 교회로부터 파문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주후 400년에 열린 제1차 토로우제 공의회(Council of Tholouse)에서도 "설교를 들은 후에 성만찬에 참여하지 않는 자가 발견되면 경고해 줄 것이요, 만일 경고를 받고도 그래도 받지 않으면 그들은 출교당할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이런 몇 가지 사례들을 볼 때, 성만찬이 초기 교회들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출교나 파문까지는 못시킨다 하더라도 성만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해서 신자들이 매주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면 누수현상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설교만 강조되니까 설교에 식상한 신자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교회를 빠져나가는 것이다. 설교 듣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교만으로는 들로 산으로 볼링장으로 기원으로 극장으로 빠져나가는 신자들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다. 교회는 사람들이 설교뿐 아니라 성만찬을 통해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도록 해주기 위해서 성서적인 교회 모델로 환원해야 한다.


셋째, 성례전은 반드시 목사가 집례해야 한다. 성만찬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해도 아무나 집례할 수 있다면 굳이 교회에 모일 필요가 없게 된다. 교회가 가지 않더라도 인터넷이나 텔레비죤을 통해서 가정에서도 좋은 설교를 접할 수 있고 성만찬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지도력은 성례전의 집례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주후 90년경 로마교회의 감독 클레멘트(Clement)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 40-44장에서 모든 일을 질서 있게 바르게 행할 것을 책망하면서 목사직을 사도직의 계승으로 강조하였다. 대제사장과 제사장과 레위인과 평신도의 직책이 각각 다르게 정해져 있고, 매일의 희생제사가 아무 곳에서나 바쳐지지 않고 오직 성전에서만 바쳐졌듯이,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책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레위인 가운데 고라와 다단과 온이 당을 짓고 모세와 아론에 대항했다가 멸절당한 일(민 16-17장)을 상기시키면서 목사직의 권위를 내세웠다.


장로나 집사나 평신도가 침해할 수 없는 목사의 고유한 직무 가운데 하나가 성만찬을 집례하는 일이란 점을 안디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시우스는 서머나교회에 보낸 107년경의 편지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느 누구도 목사의 허락없이 교회에 속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 목사나 목사가 위임한 자의 집례로 정당한 절차를 따른 성만찬이 되게 하라. 예수가 계신 곳에 우주교회가 있는 것처럼, 목사가 있는 곳에 성도가 있게 하라. 목사없이 침례를 베풀거나 애찬을 갖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목사가 인정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이 확실하고 정당할 것이다.

3세기초에 로마의 감독 히폴리투스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도 전승} 3장에서도 성만찬의 집례가 목사의 고유한 직무임을 다음과 같은 목사 안수식 때의 기도문에서 밝히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아버지, 감독직을 위해 간택하신 당신의 이 종으로 하여금 당신의 거룩한 양떼를 보살피며 책잡힐 데 없을 만큼 대사제직을 당신께 수행하게 하시고, 밤낮으로 (당신을) 섬겨 끊임없이 당신 얼굴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당신의 거룩한 교회의 제물을 바치게 하소서.

이 기도문에 언급된 '대사제직'이란 성만찬을 집례할 권한을 말하며, 이를 "당신의 거룩한 교회의 제물을 바치게 하소서"에서 설명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성만찬을 집례하는 것으로 {사도 전승}은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수를 받고 나서 목사가 제일 먼저 하는 일도 성만찬을 집례하는 일이다.


목사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다른 하나는 새신자에게 침례와 견진례와 성만찬을 베푸는 일이다. 침례와 견진례를 받고 나서 새신자가 제일 먼저 하는 일도 성만찬 예배에 참여하여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이며, 신도들과 평화의 입맞춤을 나눌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사도 전승}이 성만찬의 집례를 감독의 고유한 임무로 정한 것은 성만찬이 주일 예배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교회는 성례전을 통해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은총을 성도들에게 베풀 수 있다. 먼저 침례를 통해서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은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침례는 구원을 받는 시간이다.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공동체의 정식회원이 될 수 있고, 교회가 행하는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예식인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또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사에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진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신자가 혼인을 서약하는 시간이다. 결혼하는 커플이 혼인서약을 하듯이 침례를 받는 사람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침례서약을 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는 새 계약, 즉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엄숙한 서약이다.


 침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동참하는 시간이다. 침례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새로 거듭나며,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성별, 인종, 사회적 신분의 분단의 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인간에로 회복되는 엄숙한 기독교 예식이다.


 침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선물로 받는 시간이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성령을 모시게 되는 시간이다. 침례는 성령을 통해서 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시작이며,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부단히 자기 변혁을 꾀하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새로운 힘을 부여받는 시간이다.
 침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받고,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의 삶 속에서 미리 맛보며, 그 나라를 상속받을 자로 보증 받는 시간이다.


 침례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예식이며 죄와 싸우는 십자군에 입단하는 시간이다. 죄된 모든 것을 부단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죽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부단히 사는 작업의 출발선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침례의 중요성과 축복을 가르칠 수 있다. 침례와 관련해서 구원과 성령과 종말을 강조할 뿐 아니라, 모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다.


성만찬을 통해서 성도들이 받을 수 있는 은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응답이다(Eucharistia).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닫게 되며,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다(Anamnesis). 성만찬을 통해서 말씀이 육신이 됨을 체험하게 된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삶의 방식, 곧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을 터득하게 한다. 성만찬을 통해서 십자가의 정신을 배우게 되고, 십자가의 정신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된 삶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과 참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게 된다.
 성만찬은 성령의 임재를 비는 예배이다(Epiklesis). 성만찬을 통해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의 현실을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와 임마누엘을 체험하게 된다.


 성만찬은 수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돌보는 교제의 시간이다(Koinonia). 성만찬은 화해와 나눔의 시간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신앙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조건인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식의 중요성을 터득 할 수 있다. 이 연대의식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평화,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성육신 하심으로서 자기를 포기 하셨고, 인간들과 동일화 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셨다. 그는 또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 시대에 소외당하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과 세리 또는 창녀들과도 함께 밥상공동체를 이루시며, 가난한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셨고 나눔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에 친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본을 보여 성만찬을 제정하셨고, 그 정신을 본받도록 성만찬을 행하여 지킬 것을 부탁하셨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기원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앞당겨 맛보고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이다(Anticipation). 침례가 그리스도와의 혼인식이라면, 성만찬은 그 피로연이다.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 할 수 있다.


 성만찬을 통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성찬을 받지 못한다. 성만찬은 침례를 받고 구원에 동참한 자가 복음의 진수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을 믿고 있는지를 저울질할 수 있는 시험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성만찬은 신앙의 신비를 선포한다. 성찬 때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과 성령의 역사와 성찬을 받는 자의 신앙의 힘이 함께 작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룬다.


 성만찬은 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신비이다. 이 신비는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를 구별하고, 성(聖)과 속(俗) 곧 교회와 세상을 구별한다. 이 엄격한 구별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성만찬의 중요성과 축복을 강조할 수 있다. 침례는 하나님의 나라의 입국절차이고,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갖는 매일의 음식이다. 침례는 하나님과의 혼인식이고, 성만찬은 혼인식 이후에 갖는 매일의 식사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매주일 행해야 하며 참여토록 해야 한다. 

나오는 말

이상으로 '목회지도력과 성례전'이란 주제로 두서없이 논하였다. 교회가 급변하는 미래사회에 적응하여 누수현상을 막고 목회지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각적인 방법들을 연구하고 검토해야 할 것이나 보다 시급한 과제는 초대교회의 모델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래사회에 대응하는 방법이 기술적인 방법에 있다기 보다는 초대교회의 모델로 돌아가는 환원에 있다고 본다. 교회가 바로 설 때 사람들은 교회를 찾게 될 것이고,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할 때 사람들은 교회를 버리게 될 것이다.


목회지도력과 관련해서 초대교회의 모델로 제시해 본 것이 침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매주 성만찬의 시행이었다. 교회의 누수현상을 막고 목회지도력의 회복을 위해서 성례전에 대한 인식의 재고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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