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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1-11 10:49
[은혜 13강]제2장 공정성보다 큰 은혜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861  
   http://kccs.info/gracejc_ch02.htm [1657]

13 LESSONS ON GRACE Written by Jack Cottrell
Wipf and Stock Publishers: 150 West Broadway, Eugene OR 97401
1999

Translated by Dong Ho Cho
Christian Church Studies, 2011
℡(042)841-9697

제2장 공정성보다 큰 은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 왜 이것이 그렇게도 좋은 소식인가? 무엇이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우리가 그것을 대안과 단지 비교만 해도 우리는 이 물음에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以信稱義)의 대안은 행위에 의한 의롭다하심이다. 복음은 단지 우리가 상실되지 않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갈 2:16, 롬 3:28, 엡 2:8-10을 보라.)

예를 들어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논할 때 (1:16-17을 보라), 그의 주된 관심은 죄와 구원의 차이점이 아니다. 그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구원의 두 가지 가능한 방법들, 즉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와 ‘율법을 인하여 행위로 말미암아’를 대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두 개의 길이 있다.

그러나 바울의 요점은 이 길들 중의 하나 (율법의 행위)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철저히 영원히 막혀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노력해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개인의 의로움이나 율법준수로는 결코 하나님의 입장에서 의로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비롭게도 다른 루트, 즉 믿음을 예비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참 길이며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이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속자들”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이 두 가지 가능한 구원의 길들의 차이점을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율법은혜로 불릴는지 모른다.

1. 율법의 길

성경은 율법과 은혜의 두 체제를 서로에 대한 날카로운 대조 안에 놓는다. 요한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6-17). 바울은 경고한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법 아래에”는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이 처하는 상태를 기술하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법과 질서”의 신이시다. 그분은 우주를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되도록 만드셨고, 사람을 도덕법칙에 따라 살도록 만드셨다. 사람이 태어나면 그는 이미 율법의 틀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단 도덕의식이 발전하면, 사람은, 일반(자연)계시(롬 1:18-32, 2:14-15)나 특별(성경)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도덕법에 직면한다.

만약에 사람이 율법체제나 틀 안에 남는다면, 그는 심판 날에 율법규정들과 어구들에 따라서 판결 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특정한 율법들은 어느 정도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구원을 받기 위한 기본적인 근거규정들로 된 율법체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이들 규정들은 아주 간결하고 단순하게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을 지켜라. 그리고 형벌을 면하라. 율법을 범하라. 그리고 형벌을 받으라.”

이것이 율법이 작용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한 우리는 이것들이 우리에게 적용하는 규정들이란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게 그다지 나쁘지는 않는데 라고 당신은 말할는지 모른다. 결국 이 체제 아래서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면, 우리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죄가 없다면,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셔야만 할 것이다. (우리에게 “무죄”라고 선언하셔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함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율법의 행위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 만약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벽하게 지킨다면. 문제는 단 한 개의 죄가 우리를 율법을 범한 자로 만들며, 따라서 우리가 형벌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듯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약 2:10. 갈 3:10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시작하는 곳인) 율법 아래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사람은 절대적으로 죄가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제 끔찍한 소식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롬 3:23)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머무는 한, 우리는 상실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되는 선함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죄를 지었고,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2. 은혜의 길

하나님께서 율법을 대신할 대안, 즉 구원 받을 또 다른 길을 마련하셨다는 복음이 선포되는 것은 틀림없이 이 지점이다. 그것은 은혜의 길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체제이며, 완전히 다른 일련의 근거규정들에 따라서 작용한다. 은혜 아래서 사람은 다음의 간단한 진술에 따라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다가간다.

“율법을 지켜라. 그러나 형벌을 받으라. 율법을 범하라. 그러나 형벌을 면하라.”

할렐루야! 은혜 아래에서, 범법자(죄인)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잠깐만요, 이들 진술에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지 않나요? 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하고, 범법자는 형벌을 면해야 하죠? 이건 정당한 것 같지가 않아요!”라고 당신은 말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것은 공정하지가 않다. 그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것이 공정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다! 율법은 공정하다. 은혜는 공정성 이상의 것이다.

“좋아요, 하지만 잠깐만요. 나는 그 체제의 두 번째 부분 즉 ‘율법을 범하라. 그러나 형벌을 면하라.'는 수용할 수 있어요. 그건 아주 좋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니까요. 하지만 ‘율법을 지켜라. 그러나 형벌을 받으라.’는 그 첫 번째 규정은 어떻게 된 것이죠? 이건 분명히 정도를 벗어났는데요. 그게 어떻게 은혜일 수 있지요? 도대체 누가 그것에 동의하겠어요?”라고 당신은 말한다.

일리가 있다. 이것은 아주 요상하고, 심지어는 반대할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억하라. 은혜는 우리의 보통의 사고방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것은 율법과 정의와 공정성의 틀에 맞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라. 그러나 형벌을 받으라.”는 진술에 대해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을 은혜가 되게 하는 은혜의 바로 그 요소이다. 이 명문이 없다면, 다른 명문은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누구에게 이 명문이 적용되는가? 도대체 누가 율법을 지켰는가? 오직 한분, 죄 없으신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분은 율법을 지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형벌을 받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은혜를 위해서! 은혜를 위해서였다! 오로지 은혜의 요구들만이 우리의 흠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이 죄 없으신 죽음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의 모든 형벌을 받으셨고, 그래서 실제적 범법자들인 우리가 형벌을 면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은혜의 체제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의해서 완전하게 요약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가져가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인처럼 취급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분처럼 대우받을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가 직면한 선택이 있다. 우리는 율법 아래 남아서 어떤 정죄에 이를 수 있고, 혹은 값없이 제공되는 은혜를 수용하여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롬 8:17). 이 복 받은 대안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

3. 은혜의 상속자들

한 가지 것은 분명해져야 한다. 율법과 은혜를 구분함에 있어서 우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차이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에 관하여 여기서 언급된 것은 시대에 상관없이 주어진 모든 형태의 하나님의 율법을 말한다. 모세의 율법이 그 첫 번째 예이다. 아무도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계명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신약성경시대에서 율법, 심지어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조차도, 그것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지 못한다. 일단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어떠한 형태의 율법도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율법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바울은 율법이 “범법함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주어졌다고 말한다(갈 3:19). 이것은 율법이 인간의 죄지을 성질(罪性)을 통제하도록 돕기 위하여, 또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래서 율법을 지킴으로써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다”고 말한다(롬 3:20). 따라서 율법은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교사이거나 가정교사가 된다(갈 3:24). 율법 그 자체는 결코 구원의 수단이 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갈 3:21).

이것은 구약성경의 성도들이 우리와 똑같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은 이 진리에 대한 신약성경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바울은 자신의 주요한 요점, 즉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롬 3:28)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인용한다.

구원과 영생의 충만한 복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에게 주어졌고, 그를 통하여 지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다(창 12:3, 갈 3:8).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 영광스러운 기업을 받았는가? 그밖에 구약성경시대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받았는가? 신약성경시대에서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받는가? 바울은 그 기업이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즉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8)에 의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복을 받았다(롬 4:13을 보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이 구절은 롬 4:3과 갈 3:6에서 인용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이 이 은혜의 기업에 참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누가 아브라함의 가족에 속하는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롬 4:11).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6-29).

4. 은혜 아래서의 삶

여기에 우리의 선택이 있다. 우리는 운명이 분명한 율법 아래 계속남아 있을 수도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상속자가 될 수도 있다. 그 결정은 틀림없이 어렵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육지에서 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배가 난파되고 한 대의 수상비행기가 그의 곁에 착륙한다면, 그는 두 가지 선택권을 갖는다. 그는 해안까지 수영을 해볼 수가 있고, 혹은 비행기에 오를 수도 있다. 그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잠깐이라도 주저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은혜 아래 살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분별력 있고 생명을 주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물음은 이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자애로운 말씀대로 받아들이면서 온전한 신뢰와 확신 속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죄를 지속적으로 덮는 그리스도의 피를 신뢰하면서, 그의 완성된 사역위에 우리의 영생의 소망을 두고 있는가? 그게 아니면,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여전히 살고 있는가? 우리는 마치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매일의 율법준수에 실제로 의존되는 것처럼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함과 순종의 행위들을 실제로 신뢰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바리새인처럼 아직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슬픈가(눅 18:9-14)!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왜 내가 너를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느냐?”고 물으실 때, 그 바리새인은 “제가 당신의 계명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신을 점검해보라. 이것이 당신의 태도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율법적인 면에서 여전히 생각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복을 누릴 수가 없다.

은혜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 그리스도인은 같은 비유에 나오는 세리와 같다. 하나님께서 “내가 왜 너를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느냐?”고 물으실 때, 그는 “저의 죄를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고 말할 것이다. 결국 이것이 그분의 약속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연약함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강하심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자. 우리의 구원은 율법을 지킬 우리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지킬 그분의 능력에 의존한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은혜 아래서 살기를 참으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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