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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4 01:50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침례론과 한국교회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044  
마르틴 루터의 침례론과 한국교회
Martin Luther, Baptism and Korean Churches
http://kccs.pe.kr/thesis015.htm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나라의 모습은 정치 사회 경제 종교적인 면에서 볼 때, 사치와 향락과 부정과 부패와 이기심과 욕심으로 속은 썩어가나 허세만 부리고 있는 중증의 환자나 다름없다. 인간 공동체로서의 가정이나 교회나 각종 단체들은 팽배한 배금주의와 성공주의와 물량주의로 인해서 윤리와 도덕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자신과 집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가득한 통제불능의 괴물로 변해 가고 있다. 또 인간의 절제 없는 욕심으로 인간공동체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 역시도 죽음을 눈앞에 둔 중증의 환자로 변모해 가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개인의 구원은 물론 사회의 변혁과 개혁에도 관심을 갖고 누룩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기보다는 안일과 이기주의에 빠져 교회 본래의 선교적 사명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종교개혁가들의 사상과 정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16세기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인 상황은 오늘 우리의 상황과 흡사하였다. 증산층의 증가로 정치 사회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착취로 신음하고 있었고, 교회는 성직매매와 면죄부 판매 및 사제들의 직무유기로 도덕성이 몹시 타락한 매우 혼탁한 시대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역사가 필립 샤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의 농민들은 사회를 위해 짐을 진 짐승들이었으며, 결코 노예들 보다 더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보상도 없는 노동, 노동, 노동은 그들의 매일의 몫이었으며, 심지어 주일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합법적이든지 불법적이든지 세금으로 착취되었다. 아메리카의 발견 후에 부와 사치와 쾌락의 급작스런 증가는 그들의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켰다. 기사들과 귀족들은 그들의 세입과 면죄부 구입비를 늘리기 위해서 농민들을 전보다 더욱 더 잔인하게 쥐어짰다.[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7, Mordern Christianity: The German Reformation(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 ing Co., 1985), p. 441.]

이러한 때에 마르틴 루터는 의연히 일어서 개혁을 요구하였고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하였다. 물론 루터는 급진적인 혁명의 성격을 띤 사회 변혁이나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그의 관심은 정치 사회적인 혁명보다는 종교개혁이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종교개혁은 좀더 위험한 정치 사회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상당부분의 독일이 혼란에 빠졌으며, 피를 흘려야만 했다. 때문에 그는 농민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 루터에게 관심 하는 것도 토마스 뮨처가 주도하였던 것과 같은 농민전쟁이나 이상사회의 건설이나 혁명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의 개혁사상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갈 길이 어느 길인지를 묻고자 한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침례론에서 그의 개혁정신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은 중세 천주교회의 종교적 상황과 당시의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상황에서 절실히 요구되었고 또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침례론이 오늘 우리 시대의 요구는 무엇이며, 또 우리 한국교회가 관심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1982년 1월 페루의 리마에서 모인 WCC의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채택한 침례, 성만찬, 교역에 관한 합의문서를 '리마문서' 혹은 'BEM문서'라 한다. 이 문서가 천주교회, 동방교회, 성공회 및 개신교회의 공동합의에 의해서 채택된 이후 성례전에 대한 인식은 그 어느 때 보다 새로와 지고 있고 그 의미도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침례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박종화,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pp. 57-66. 박근원, "리마예식서의 새로운 평가,"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pp. 44-56.]


예수의 요단강에서의 침례는 죄인과의 연대(in solidarity with sinners)속에서 회개와 사죄의 표시로 시작되었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하심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사죄와 구원의 채널로서의 침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표지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에로 편입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맺어진 새 계약에로의 유입을 뜻한다. 따라서 죄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에 동참한 자는 사죄함을 받고 새로 거듭나며, 성령으로 새로워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며,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성별, 인종, 사회적 신분의 분단의 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 회복된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치시고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현세에서 미리 맛보게 하시며 그 나라를 완전하게 소유할 자로 보증하신다. 이런 뜻에서 침례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이며 침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자는 항상 종말의 완성을 향해 갱신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새로운 윤리적 의지(a new ethical orientation)를 부여받는다. 이 새로운 윤리적 의지는 순간적인 경험으로서 끊이지 않고 평생토록 지속되어야할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며 책임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자는 여기와 현재에 공동책임을 가지며, 인류의 해방자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증거 한다. 이 공동증거의 현장은 교회요 세상이다. 마지막으로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의 몸 즉 그분의 공동체의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성도 상호간의 결속과 일치를 도모한다.[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Paper No. 111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2), pp. 2-7.]


이런 포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마르틴 루터의 침례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비교 검토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사용된 자료는 루터의 세 가지 논문으로서 1519년 11월 9일에 쓴 "거룩하고 축복된 침례에 관한 설교(Eyn Sermon von dem heyligen Hochwirdigen Sacrament der Tauffe)[지원용 편, {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서울: 컨콜디아사, 1986), pp. 33-50.]"와 1520년 10월 6일에 쓴 "교회의 바벨론 감금(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John Dillenberger ed., Martin Luther: Selections From His Writings(Garden City, NY: Anchor Book Doubleday & Company, Inc., 1961, pp. 291-314. See also Martin Luther, Three Treatises(Phil.: Fortress Press, 1982). 지원용 편, {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서울: 컨콜디아사, 1986), pp. 171-193 참고.] 그리고 1528년에 쓴 "교리문답에 관한 설교들(Sermons on the Catechism)"[John Dillenberger, pp. 228-233.]을 포함한다.


먼저 "거룩하고 축복된 침례에 관한 설교"를 살펴보자. 루터의 침례는 침수를 의미한다. 이 침례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외적 표지이다. 따라서 신자는 죄악에 대항하여 부단히 싸워야 할 십자군의 군사들이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침례의 표지와 의의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첫째, 침례의 표지는 물 속에 잠기는 행위를 말한다.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서 루터는 말하기를 "침례는 오히려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다. 이러므로 나는 침례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물 속에 잠기게 하고 싶다. 이것은 그 낱말이 나타내고 그 비밀이 표시해 주는 것과 갖다. 그 이유는 내가 이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철저하고 완전한 것에 완전하고 철저한 표징을 주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 181.]


둘째, 침례의 의의는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義)에 대하여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침례의  의의가 이 현세적 삶 속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영적구원의 미완성성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회적으로 물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는 육체가 무덤에 갈 때까지 지속적으로 죄와 싸워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침례로부터 시작하여 무덤에까지 이르는 신앙인의 삶의 여정은 축복된 죽음을 향한 시작에 불과하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침례 받은 모든 신앙인을 온전히 새롭게 하여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 35.] 이는 영적으로 구원을 받았다할지라도 죄된 인간의 본성이 육체와 함께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죄성을 사멸시키기 위한 노력을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루터는 그의 특유한 인간론을 펼친다. 즉 침례를 받은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간주된 의인이지 실질적인 의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그가 침례를 받고 구원을 얻었다할지라도 아직 완성에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발전과 자기 개혁 및 성화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루터는 침례를 통한 '이미' 이루어진 칭의의 문제와 '아직' 이루어져야 할 성화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함으로서 시작된 종말과 미래 종말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루터는 미래 종말의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희망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희망이란 죄로부터 해방되고, 죽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므로 우리의 침례가 성취되는 희망이다"라고 하였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 38.]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말론적 역사이해는 불트만의 역사이해를 비판하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지향한다.


불트만의 역사는 개인 실존의 역사이며, 그의 종말론은 언제나 현재적이다. 성서가 말하는 미래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인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개인 실존의 삶속에서 현재적인 사건으로 언제나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묵시문학적인 미래종말은 비신화화 되어 실존론적으로 재해석된다. 이는 기복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말세론적 신앙에 빠지기 쉬운 신앙인들에게 복음의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신앙을 개인의 실존과 관련시켜 자기실현을 위한 부단한 노력과 결단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또 미래종말적 인간의 기대를 실존적 삶 속에서 미리 맛보고 누리고 체험할 수 있도록 현재화 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으나, 미래종말론의 실존론적 비신화화로 인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음으로 보고 듣고 해석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적인 많은 요소들을 미신화 시키고 제거함으로서 기독교를 가현설적으로 만들고 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신화적 진술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미래종말에 대한 진정한 기대가 없이는 실존론적 현재적 의미란 철학적 인식이상의 신앙적인 큰 힘을 가져올 수 없다. 따라서 가능성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결단은 그 윤리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종말론은 종말론적 지금 또는 종말론적 현재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의 내면적인 실존적 결단에 불과하며, 또 종말론적 미래란 인간존재의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종말론은 미래에 실현될 역사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의 존재의 목표일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차원을 상실하게 되고, 종말론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도 간과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침례의 미래성 역시도 비신화화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김균진,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p. 191-213. R. Bultmann, Geschichte und Eschatologie, Tbingen, 2. Aufl., 1964 참고.]


불트만의 인간이해도 추상적이며 무역사적이다. 왜냐하면, 불트만의 인간은 사회적 상황하에 존재하는 인간 곧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제반 관련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서 분리된 비세계화된 존재이다. 개인과 세계는 분리된 관계이며, 신앙인은 하나님과 세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결단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고독한 존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듭 반복해서 자기를 이 세계로부터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참 신앙이요, 자기존재의 본래성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신앙의 주요 관심사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데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본래성 문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내적 주관성 속에서 찾으려는 근대 신학사조를 반영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이 세계의 현실에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성과 의미를 갖지 못한 개인의 한 내면적 문제와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이 세계로부터 자기를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란 신앙이 도달해야 할 본래성을 방해하는 반대 세력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트만의 인간이해에서는 개인과 세계, 개인의 자기이해와 그 시대의 세계이해의 상관관계가 무시되고 있고, 개인의 본래성의 문제도 단지 개인의 내면성의 문제로 전락되는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이해로 전락하고 있다.[Ibid.]


여기에 반해서 몰트만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와 타당성을 상실한 미래종말이나 불트만의 현재적 종말론을 비판하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성서가 말하는 종말은 개인의 실존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와 관련된 우주적 사건이며, 침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에 동참한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미래가 앞당겨져 시작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미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것은 미래에 완성될 약속으로서 세계사의 목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침례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갖게된 성도들은 구체적인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고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인종 자연 모든 영역에서 추구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현실이 어두운 이 세계 속에서 완성될 그 날을 희망한다. 이 희망은 피안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 현실 속에서 즉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 약속에 동참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역군이며, 하나님의 세계를 지향하여 그 자신을 언제나 새롭게 변화시키고 개혁시켜 나가는 백성이다.[김균진, {헤겔철학과 현대신학}(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p. 214-250.]


셋째, 침례에 있어서 루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세계가 의미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또한 성취될 것임을 믿는 신앙이다. 이 믿음은 또 죄에 대항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신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례는 죽을 때까지 죄에 대하여 싸울 것을 결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는 계약이다.


죄에 대항하여 투쟁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죄를 대항하여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루터는 탄식한다. 성서가 말하는 죄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고 있다. 대신관계에 있어서 인간의 단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분은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화목의 제물로 삼으셨다. 이것이 조건 없는 사랑의 표본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십자가의 정신이다. 우리가 침례를 통해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단순히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신앙에 있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데 있다.[로마서 4:24; 10:9.] 단절된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악들 즉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빚어졌든지, 인간관계와 인간공동체의 구조적인 악에서 빚어졌든지, 또는 자연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빚어지는 생태계의 파괴에서 왔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장사 지내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더불어 새롭게 부활하여 불편한 대신관계, 대인관계 및 대물관계를  십자가의 정신으로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는 일을 죄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침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출발점이 된다. 인간의 구원은 통전적인 관점에서 보아져야 하겠기에 침례를 영적인 구원에만 국한시켜 말할 수 없다. 성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은 물론 몸의 구원과 우주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구원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1520년 10월 6일에 쓴 "교회의 바벨론 감금(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과 1528년에 쓴 "교리문답에 관한 설교들(Sermons on the Catechism)" 을 살펴보자.


여기서 가장 중요한 어휘는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가복음 16:16.] 이 말씀이 모든 구원의 근거이며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는 것이므로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지속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결코 구원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세 천주교회가 행위와 의식에 치중하여 믿음이 없이도 성례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실어온다고(ex opere operato) 주장함으로서 그 제도적 모순성을 들어냈을 때, 마르틴 루터는 과감하게 이것을 교회의 바벨론의 포로상태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성례에 행위만 있고 신앙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이다. 성례가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또 그 약속을 믿는 신앙에 있으며, 그 약속을 실현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은 그 약속을 실현시키는 수단이며 성령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다. 그리고 침례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출발점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침례 속에 구원을 부여하신다"고 말하고 있다.[John Dillenberger, p. 230.] 그가 철저히 침수와 침례의 능력을 믿었지만, 약속과 믿음을 떠나 성례의 효력을 구하는 것은 헛된 수고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침례가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란 점이다. 인간이 침례식을 거행하지만 하나님을 대행할 뿐이다. 따라서 침례는 하나님의 권위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이며, 인간 쪽에서는 헌신과 변혁과 개혁의 의지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침례가 표지 하는 죽음과 부활은 새 창조, 중생 및 영적인 출생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는 이것을 단순히 "우의적으로 죄의 죽음과 은총의 생명으로만 이해 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죽음과 부활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침례가 하나의 거짓된 표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생에서 가지고 다니는 죄된 몸이 파멸되기 전에는 죄가 완전히 죽지 않으며 은총이 완전히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 181.]


루터에게 있어서 침례는 순간적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영구적인 개혁과 변혁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자가 살아 있는 한 부단히 침례가 의미하는 바를 행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된 모든 것을 부단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나라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부단히 사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다음과 말한다.

이와 같이 일단 성례의 침례를 받았으나, 당신은 부단히 죽고 부단히 살아나기 위하여 믿음으로 늘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침례는 당신의 전신을 완전히 삼켰다가 다시 내놓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례의 뜻이 당신의 전 생명과 몸과 영혼을 완전히 삼켰다가 마지막 날에 영광과 불멸의 옷을 입혀 다시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침례의 표징을 갖지 않고 또 침례가 뜻하는 것을 갖지 않는 때가 없다. 실로 우리는 마지막 날에 그 표징을 완전히 성취할 때까지 계속하여 더욱 더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죽이거나 영을 살리는 이 생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우리의 침례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이 생을 빨리 떠나면 떠날 수록 속히 우리의 침례를 완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쓰라린 고통을 당하면 당할 수록 성공적으로 우리의 침례와 일치시킬 수 있다. 이리하여 교회는 순교자들이 날마다 죽임을 당하고 도살장의 양과 같이 여김을 당하는 때가 전성기였다(시 44:22; 롬 8:36). 왜냐하면 그 때에 침례의 능력이 교회에서 최상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인간의 행위와 가르침 가운데서 이 능력을 잃어 버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 생애는 침례여야 하며, 침례의 표징이나 성례의 성취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홀로 침례, 곧 죽음과 부활에 넘겨졌기 때문이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p. 182-183.]

루터의 침례론을 요약하면, 첫째, 루터는 침례의 표지를 침수행위로 본다. 이는 철저하고 완전한 자기반성과 회개 및 과거의 청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마르틴 루터는 침례를 수세자를 완전히 물속에 집어 넣어 이 물이 수세자를 뒤덮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는 그의 시대에 많은 지역에서 유아 수세자를 침례탕 안으로 밀어 넣어 깊이 잠기게 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탕에서 손으로 물을 떠서 그 물을 수세자의 머리위에 떨구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수세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었다가 다시금 나오는 것이 더 적절한 것으로 믿었다. 침례가 가장 고전적인 의식임에는 틀림없다. 라틴 계통의 교회들에는 12세기가 될 때까지 침례가 널리 유행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침례를 16세기까지 사용하였다. 가장 오래된 뮌스텔 교구의 세례순서는 세 번의 침례를 규정하고 있다(The Catholic Encyclopedia, Ⅱ, pp. 261-262). 루터는 침례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유아수세자를 침례탕 속에 완전히 잠기게 하였다는 규정을 볼 수 있다({루터 선집 제 7권: 은혜의 해설자 루터}, p. 33.]


둘째, 침례의 의의를 새 생명의 부활에서 찾는다. 여기서 부활의 삶은 죄와의 부단한 자기 투쟁을 통해서 완성을 희망하며, 자기 발전과 자기 개혁과 성화를 이루어 가는 새 삶의 의지를 포함한다. 또한 침례를 통한 새 삶의 소유자는 사회의 변혁과 개혁을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희망한다.


셋째, 침례의 능력은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에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침례를 받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구원은 영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육체의 구원과 우주의 회복을 포함한다.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을 소유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 이 약속은 인류 구원의 근원이며, 믿음은 그 약속을 실현시키는 수단이며, 침례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출발점이다.


넷째, 침례는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다. 침례를 통해서 시작된 성령의 부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계속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침례는 순간적인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영구적인 개혁과 변혁의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몹시 암담한 상태에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몹시 불안한 상태에 있고, 인간성은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이다. 또한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으로 중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데 교회는 어떠한가? 기독교 신자 일 천만 명을 자랑하고 있지만  윤리와 도덕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은 어쩐 일인가? 개혁과 변혁이 있기보다는 나날이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교회가 안일과 이기주의에서 탈피하여 새롭게 신앙을 고백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고백했던 신앙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과거를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새롭게 탄생하였던 그 감격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제 우리의 신앙고백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 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통전적으로 또는 전인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를 좀더 넓혀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치 사회적 관계에서 더 나아가서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성례적인 신앙고백이 있어야겠고 우리의 책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누룩이 되고 빛과 소금이 되어 인류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켜 나가야 할 종교 개혁가적 사명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분명히 중세 천주교회와 마찬가지로 성례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성례의 정신을 망각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가 이것을 발견하고 찾아 회복한 것처럼 우리 모두도 성례의 능력과 그 정신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