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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6-13 08:27
침례에 관한 설교(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901  
침례에 관한 설교(1)
Sermon on Christian Baptism(1)
http://kccs.pe.kr/thesis065.htm

침례는 구원의 표지다(벧전 3:21)

침례는 교인이 되기 위한 예식입니다. 교인이 되기 위한 예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침례와 견진례입니다. 견진례는 침례를 받고난 직후에 올리브기름을 손에 찍어 이마에 십자가를 그어주는 예식인데요, 성령의 인침 또는 도장 찍음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신자의 침례나 세례를 행하는 개신교회들에서는 보통 생략하고 하지 않습니다. 더러 유아세례를 주는 교회들에서는 유아세례를 받은 자들이 청소년기 곧 13세 이상이 되는 틴에이지(teenage) 시기부터 입교식을 거쳐 교인으로 등록시킵니다.
침례를 받기까지의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증인들 앞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고백을 통해서 피침례자의 자격여부를 결정지을 믿음의 상태를 점검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신앙고백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족도 재산도 한 순간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뤄지는 침례는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한 신앙고백의 내용을 행동으로 확정짓고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1명의 청년동지들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죽음으로써 조국독립에 투신할 것을 시퍼런 단도로 소지(새끼손가락)를 끊어 맹세한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안중근과 그의 열명의 동지들이 새끼손가락을 절단함으로써 입으로 맹세한 결연한 의지를 행동으로써 보인 것처럼, 침례도 입으로써 고백한 믿음을 행동으로써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고백과 침례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신앙고백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행위가 더 중요할까요? 바꿔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안중근의 맹세가 더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단지행위가 더 중요한 것이었을까요? 혼인서약이 더 중요할까요, 아니면 결혼예식이 더 중요할까요? 답은 이렇습니다. 신앙고백과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행위는 연결된 한 행위이지, 두 가지 가각 다른 행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식에서 신앙고백 곧 침례서약이 빠져버리면 침례예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맹세가 없으면 손가락을 절단하는 단지의식이 무의미하고, 결혼서약이 없으면 결혼식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침례식과 결혼식이 겉껍데기라면, 침례서약과 결혼서약은 알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침례의 효능은 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백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침례를 통해서 받는 죄 사함이나 구원은 물이나 침수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침례자가 고백하고 소유한 믿음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침례는 그 자체가 죄 사함이나 구원이 아니고, 죄 사함에 대한 표지요, 상징입니다. 물이나 침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무엇을 얼마만큼 고백해야 만족할만한 신앙고백이 되겠는가, 침례를 줘서 교인으로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공동체의 회원으로 받아드릴 만큼의 적당한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등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16장 16절의 말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만 고백하면 된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을 고백하면 된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 곧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고백해야할 내용이 너무 단순하고 포괄적이면 수많은 이단자들까지도 회원으로 인정해야하는 문제점이 생기고, 너무 자세하고 구체적이면 그것으로 인해서 이단자들이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그것도 문제입니다. 따라서 적정한 선에서 고백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을 텐데요, 제 소견으로는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경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가지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100퍼센트 완벽한 진리에 도달할 때에만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한 평생 침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쳤던 알렉산더 캠벨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오른쪽 손과 오른쪽 눈은 나의 소용과 행복에 대단히 본질적이다. 그러나 나의 생명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 없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침수의 진실 되고 성경적인 의미와 목적대로 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수용함이 없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침수세례자 이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추측하는 사람은 분명하고 온전한 시력을 가진 자 이외에는 산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만큼이나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여기서 알렉산더 캠벨의 주장은, 비록 침수세례가 성서적인 방법이라 할지라도, 약식세례를 받은 신자들을 향하여 “약식세례는 무효이니 다시 침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라는 식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캠벨의 주장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는 “우리만이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일 뿐이다.”는 ‘오직 그리스도인!’ 운동을 펼칩니다.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아누스 시대에 죽어가는 환자에게 병상에 누인 채 물을 부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 노바티아누스(Novatianus)가 죽지 않고 살아서 로마교회의 감독선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주후 251년이었는데, 감독에 선출된 코넬리우스(Cornelius)가 노바티아누스의 감독자격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거진 부분이 바로 이 병상침례였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세례를 정당하다고 보았으면서도 "약식"(abridgement)란 말을 붙인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후 313년 서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해 준 이후로 교회는 빠르게 발전하였으며, 예배당이 장엄하게 건축되고, 예배의식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 침례탕을 만드는 일도 쉽지 않고, 물의 관리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다가 장엄하게 발전한 예배예식을 물가로 옮겨가서 집례하는 일이 쉽지 않았으며, 필요gks 때마다 자주 행할 수 없고, 병상의 환자에게도 쉽게 침례 할 수 없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약식세례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에 냉온수 및 정화설비가 갖춰진 침례탕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므로 많은 교회들이 침례탕을 설비하여 예배 중에 아무 때라도 시행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그와 같은 시설을 갖출 수도 없고, 또 사도들의 전통대로 행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부득이 불편을 무릅쓰고 시냇가로 나가서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쳐다보는데서 침례를 거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침례는 교인이 되기 위해서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는 비록 불완전한 공동체이긴 하지만,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보이는 나라도 있고,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으며, 또 미래에 나타날 나라도 있습니다. 보이는 나라는 교회를 말하고, 보이지 않는 나라는 낙원을 말하며, 또 미래에 나타날 나라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부활 후에 나타날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교회와 낙원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 두 나라는 다 영적인 나라요, 약속만 받고 아직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아니한 나라입니다. 교회와 낙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원토록 살게 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을 약속받고, 성령님으로 보증과 인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재림의 날까지는 단지 그 나라를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와는 달리 낙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낙원에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부활하지 못한 영혼상태에 있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낙원의 성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태어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침례는 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한 중요한 절차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받는 것과 같으며, 비로소 교회의 모든 행사에 참여할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침례나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만찬예식에 참여할 수 있고, 집사나 권사 또는 장로가 될 수 있으며,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은 일군들을 뽑는 일에 참여해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침례나 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교회공동체의 정식회원이 되기 위해서 학습을 받는 예비회원이기 때문에 투표권도 없고 피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물 속에 들어가 세례를 받습니까? 물은 죄 씻음을 의미하고,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며, 물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침례의 모형으로 설명하였는데, 세례나 침례식에서의 물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넜다는 것은 죽음의 바다를 건넜다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물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물에서 건짐을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요나도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수차례 건짐을 받고 있고, 계시록 15장에 언급된 하늘 보좌 앞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선 성도들도 소돔과 고모라를 삼켰던 불바다 또는 박해로 상징되는 죽음의 바다를 건넌 후에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은 생수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생명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침례에서의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스신화에서도 죽음의 세계인 하데스에 이르는 길을 아케루시아(Acherousia)호수와 아케론(Acheron)강으로 표현하고 있고, 지하세계에 도달해서는 다시 스튁스(Styx) 강을 건너야 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처럼 물은 흑암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반대로 해변은 빛과 구원을, 바꿔서 말씀드리면, 해변은 흑암과 죽음의 터널을 벗어나 부활한 자들이 밝고 안전한 곳에 도달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상징되는 물은 빛과 환희의 세계인 구원의 해변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세례 또는 침례를 받는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이 어둠의 터널이요 흑암과 죽음의 바다라면, 그것은 새생명을 위한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마치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빛과 환희의 세계에 도달한 것과 같고, 태아가 출산됨으로 어둡고 출렁이는 파도의 세계를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부활은 요나가 어둡고 무덤과 속 같은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와 빛의 세계 해변에 이른 것과 같고, 칠흑처럼 캄캄한 밤에 폭풍을 만나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동터오는 미명에 갈릴리 해변에 다다른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침례식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혼인을 서약하는 시간입니다. 결혼하는 커플이 혼인서약을 하듯이 침례를 받는 사람도 그리스도 앞에서 서약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남녀는 혼인을 결정하기까지 많은 만남과 사귐의 시간들을 가졌을 것이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간들 즉 남녀가 서로 사랑했던 시간들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부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연인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혼례식을 마친 후에는 당당한 부부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침례식도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고, 그에게 평생을 맡기기로 결단한 다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거룩한 예식인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임산부의 뱃속에 있는 태아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혹은 세 명이든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분명히 생명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름도 없고, 생년월일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인구 조사 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수록되지 않습니다. 임산부의 몸에서 양수를 터뜨리고 나와야 비로소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침례식은 학습교인이 정식교인이 되는 시간이며, 교회등록부에 이름이 올라가는 시간입니다. 
이렇듯 중요한 침례의 의미를 기억하시고, 침례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기도로서 준비하시기를 바라며, 이미 침례나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침례가 갖는 의미와 축복들을 새롭게 인식하시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