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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11 08:08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서(요 1:18)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477  
삼위일체 교리에 관해서(요 1:18)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분이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신가에 관한 것들입니다.
신의 존재여부를 밝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proof)입니다. 우주론적 증명은 보통 네 가지로 나뉘어 설명됩니다. 이 우주를 태업시계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우주시계가 움직이는 것은 누군가 최초로 그 시계를 움직이게 한 힘, 곧 자기는 태업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태업을 감아 우주시계의 바늘을 움직이게 한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존재가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이 우주시계가 움직이는 것은 어떤 원인(原因)에 의해서 생겨난 결과(結果)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는 최초원인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최초원인이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이 우주시계는 움직일 수는 어떤 가능성 혹은 우연성의 존재에 불과했지만, 이 시계를 움직이게 한 것은 어떤 필연성의 존재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 필연성의 존재를 추적해 올라가다보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는 필연성의 존재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필연성의 존재가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것은 톱니바퀴 때문에 가능하고,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태업입니다. 그러나 태업의 존재는 그보다 더 큰 궁극적 존재 또는 최고 존재에서 비롯됩니다. 이 궁극적 존재가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네 가지가 신(神)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증명이란 것입니다. 이 우주론적 증명방법 말고도 목적론적 증명, 존재론적 증명, 도덕론적 증명이란 것이 더 있습니다. 시계가 존재하는 것은 시간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반드시 목적하는바가 있는데, 반드시 더 높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목적을 추적해 가다보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목적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최고목적이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이것이 목적론적 증명입니다.
시계는 우리의 머리 속에 개념으로 존재합니다. 이렇듯 머리 속에 있는 시계란 개념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神)이란 개념도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존재론적 증명입니다.
인간이 행복하고자 할 때, 도덕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설명입니다. 행복과 도덕은 갈등관계지만, 행복과 도덕이 완전히 일치할 때에만 최고선(最高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최고선이 바로 신(神)이란 것입니다.
이런 다양한 신(神) 존재증명방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神)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해도, 이 신(神)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신이 우주를 만들고 나를 만들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다할지라도, 나와 갖는 인격적 관계를 과연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아름다운 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에 경탄해마지않는다고 해서 그분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구원을 위해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게 해주는가?
위와 같은 질문들에 적절한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삼위일체교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교리를 부정해 버린다면 위와 같은 질문들에 적절한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이 없는 유대교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입니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여호와증인은 명백한 이단입니다.
그러면 삼위일체교리란 어떤 것인가? 삼위일체란 한 분 하나님 속에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 그리고 성령님의 인격이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뿐인 태양이 광선과 빛과 열을 함께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광선의 특징은 불가시성과 직진성에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광선을 보이게 하는 것이 빛인데 빛은 직진만하는 광선(입사광)이 불투명한 물체에 닿아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져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반사광이라고 합니다. 이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무지개와 같이 여러 색의 띠가 나타나는데 빨간색 광선의 바깥쪽에는 적외선이 있고, 보라색 광선의 바깥쪽에는 자외선이 있습니다. 이 적외선과 자외선은 프리즘을 통해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열은 광선이 물체를 통과할 때 경계면에서 꺾이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굴절이라고 하는데,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생기는 무지갯빛도 굴절현상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을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태양광선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계시, 곧 계시 중의 계시는 예수님이신데, 이 예수님은 태양광선의 반사광에 해당됩니다. 보이지 않던 광선이 물체에 반사될 때 빛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모든 인간이 서야 할 죽음과 저주의 자리에 대신 설 자로 선택된 인간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저주와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축복과 생명을 예정하시고, 자신에게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와 죽음을 대신 받기로 결정하신 분입니다.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인간을 높이기로 결정하신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봄볕처럼 따스하게 내재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는 굴절의 빛이십니다. 성서는 성령님을 ‘호흡,’ ‘생수,’ ‘비둘기,’ ‘불꽃,’ ‘기름,’ ‘도장,’ ‘보증금’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령님이 호흡이거나 생수이거나 비둘기이거나 불꽃이거나 기름이거나 도장이거나 보증금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들 표현은 단지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오아시스의 물이 갈증을 풀어주듯이 삶의 답답증을 풀어주며, 온유하며, 타오르는 불꽃처럼 정열과 온기를 느끼게 하며, 기름처럼 윤기 나게 하며, 계약서에 도장 찍고 보증금 주어 약정을 맺듯이 신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보증한다는 뜻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영으로 존재 하시면서 아들과 성령님과 함께 혼연일체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희생과 관심에 관해서 전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다 해도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이런 특별한 은총을 누린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동등하게 이 특별한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린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왜 하나님은 한분이면서 한분 인격체로 존재하실 수 없고 세분 인격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해봐야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에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성령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모든 신앙고백서들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삼등분되어 있습니다. 세례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세 번 시행하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대해 신앙고백을 한 후에 물 속에 잠겼고, 아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후에 다시 물 속에 잠겼으며,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후에 세 번째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이 삼위일체 신앙이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만의 독특한 내용이자 특색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증인은 하나님의 신성만을 인정한 채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령님의 인성을 부정합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은 한분뿐이고,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례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양자가 된 출생신분이 인간이었던 분이고, 성령님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큰 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단일신론은 지난 이천년 기독교역사 속에서 이단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런 이단사설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점은, 유일신 사상을 고취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왕권이나 일인독재체제를 신성시한다는데 있습니다. 권력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보다는 그 권력이 신성시될 때, 그것이 민중억압의 수단으로 이용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력(權力)과 권위(權威)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또는 서기관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권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권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만물의 절대주권자란 사실 말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만들어진 존재로 보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건이란 사실 말고도 정치권력의 신성화나 절대화에 대항하여 싸운 사건으로 보게 합니다. ‘우상숭배 말라’는 십계명의 제1,2계명은 이 땅의 그 어떤 가치도 하나님 한분 말고는 신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신성하고 거룩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절대주권을 혼자서만 누리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주권을 성자 하나님과 함께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십니다. 여기에 삼위일체교리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주권을 피조물인 인간과도 나눠서 누리십니다. 인간에게 자유결정권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자유결정권은 본래 하나님만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 주권을 혼자서만 누리지 않고 함께 나누기로 결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인 동시에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천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아들 하나님인 동시에 지금도 우리 가운데 오셔서 아들 하나님이 이루신 그 구속사역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신 초월적인 분이라면, 예수님은 과거에 이 땅에 오셨던 분이고, 성령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오셔서 늘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 곁에로 찾아오고 계신 분이십니다. 마치 태양이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지만, 빛으로 우리에게 왔고, 생명에 필요한 에너지를 줄 뿐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 곁에로 다가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삼위 하나님은 역할을 나눠 갖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창조를, 예수님은 구원의 일을, 성령님은 재창조의 일을 나눠서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부가 하시는 일에 성자와 성령님이 참여하고 있고, 성자가 하시는 일에 성부와 성령님이 참여하고 있으며,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성부와 성자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도 예수님 안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예수님의 고뇌와 고통을 함께 당하셨습니다. 물론 실제로 고통을 당한 것은 예수님이었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은 이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고통을 함께 당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 홀로 당한 사건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한 사건이요, 충만한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아버지 하나님이 단순히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내어 준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님 가운데서 아들과 함께 당한 사건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은 한 몸이지만,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로 구성됩니다. 남편은 남편이고, 아내는 아내이며, 자녀는 자녀들이지, 남편이 아내가 되거나 아내가 남편이 되지는 않습니다. 또 자녀가 그 가정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가정도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인격적인 고유성과 독자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룹니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함께 나눕니다. 아버지의 기쁨과 슬픔은 어머니와 자녀들이 기쁨과 슬픔이요, 어머니의 기쁨과 슬픔은 아버지와 자녀들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또 자녀들의 기쁨과 슬픔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쁨과 슬픔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한 몸이지만, 목회자와 제직과 성도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이들 가정이나 교회는 이익공동체(Gesellschaft)가 아니라, 운명공동체(Gemeinschaft)입니다. 이 운명공동체는 일인독재체제나 상하계급체제가 아니라, 사랑공동체입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안에는 서열이나 지배가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은 서열이나 지배대신에 사랑의 사귐 속에 계십니다. 성삼위하나님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경험하며, 함께 행하십니다. 성삼위하나님은 언제나 상호 연관되어 계시며 상대방 안에 계십니다. 성부는 언제나 성자와 성령님과 함께 또 그분들 안에 계시며, 성자는 성부와 성령님과 함께 또 그분들 안에 계시며,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시며 또 그분들 안에 계십니다. 성삼위하나님은 결코 혼자 고립되어 계시지 않습니다. 성삼위하나님은 모든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이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명령과 복종과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평등과 일치 속에 있는 운명공동체, 곧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가 되어야 합니다. 빛과 생명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삼위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진정한 게마인샤프트가 되기를 소원해 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