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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4 01:52
현대신학의 유형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849  
현대신학의 유형
Types of Modern Theology
http://kccs.pe.kr/thesis03.htm

현대신학의 유형에는 복음화 유형, 대화 유형, 상황화 유형이 있다. 이들의 내용을 살펴보기 위해서 각 유형별로 대표적인 인물들의 저서를 세 권씩 모두 아홉 권의 책을 선택하여 그 내용들을 검토하였다.


복음화의 유형으로서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보문출판사), 존 스토트의 {현대 기독교 선교}(성광문화사), 그리고 올랜도 코스타스의 {성문 밖의 그리스도}(한국신학연구소), 대화의 유형으로서 웨슬리 아리아라자의 {성서와 종교간의 대화}(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R. 파니카의 {종교간의 대화}(서광사), 그리고 존 힉의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도서출판 창), 그리고 상황화 유형으로서 J. C. 호켄다익의 {흩어지는 교회}(대한기독교서회), 알로이스 피어리스의 {아시아의 해방신학}(분도출판사), 그리고 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을 읽고 검토하였다.


이들 서적들은 현대신학의 다양한 유형을 제시해 주는 매우 훌륭한 책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책들을 더 뒤적일 필요 없이 이들 아홉 권의 책만으로도 현대신학의 유형이 무엇인지 어떠한 입장에 서 있는지를 찾아 정리하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또 현대신학의 입장을 정리하다 보면, 이전에 읽고 배웠던 책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던 자신이 이들 책들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많이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존 힉이 고백한 영적 순례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공통적인 체험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의 내용도 결국 순례의 길을 걷는 자의 잠정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밝혀 둔다.


현대신학의 세 가지 유형이 공통적으로 관심하는 주제는 선교(宣敎)이다. 그러므로 이 글도 선교신학의 범위 내에서 정리가 될 것 같다.


선교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에 의해서 인간의 삶 속에서 선취된다. 이러한 생각이 선교철학이라고 해야 할지, 선교신학이라고 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으나 선교에 대한 통합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앞에서 언급한 아홉 권의 책의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평가하고 입장을 정리해 가면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해 보고자 한다.

1. 福音化 類型


맥가브란의 복음화는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전도를 통한 교회 성장에 초점을 두었고, 스토트는 개인구원과 사회활동의 균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코스타스는 개인구원의 필요성은 물론이요, 주변부 민중을 위한 사회구원을 역사의 지금 곧 역사적 현실인 구체적인 삶의 자리의 관심 속에서 주장하였다.


도날드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학은 사회적, 정치적, 인종적, 계급적 변화나 개혁 없이 동질 집단에 초점을 맞춘 종교적 변화만을 추구함으로서 물량적 사업적 값싼 은혜의 전도학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또 성장 제일주의라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형성시킬 뿐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형적인 교회들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질적 성장이 따르지 않는 양적 성장으로는 사회변화 혹은 개혁이 일어날 수 없다. 국민 대다수가 카톨릭신자인 필리핀이나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고, 인구의 사분의 일이 그리스도인인 한국도 그렇고, 전체 국민이 나면서부터 교인이었던 중세기가 그랬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되어야만 기독교적 가치, 경제적 정의, 인종적 형제애, 사회적 개선, 혹은 민주주의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한 맥가브란의 말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이는 현실성이 없다.


한편,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론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장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성장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효과적인 성장론을 연구, 학습, 실천하게 하는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양적인 성장도 물론 중요하지만, 질적인 성장도 역시 가볍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선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업이라면, 이 사업은 영적, 육적, 질적, 양적인 모든 면에서 균형 있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존 스토트는 맥가브란보다는 공평성을 유지한 포괄적이고, 양면적이며, 균형 잡힌 이론가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입장이 복음주의 노선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선교에 관해서 그는 언제나 두개의 상반된 견해를 소개하고 나서 변증법적인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스토트는 복음전도와 사회활동의 관계를 동반자의 관계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이 사회적 관심을 제쳐놓고 전도에만 집중할 자유도, 사회활동을 전도의 대치물로 삼을 자유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사회 속의 영혼과 육체적인 존재로 본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체적인 행복, 즉 영혼과 육체와 사회적인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진정한 선교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속사적 입장에 서서, 구원은 정신적, 신체적 건강도, 사회 정치적 해방도 아니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선교는 혁명운동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사회개혁과 동일시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사회구원을 개인구원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스토트의 사회봉사 활동은 말세론적인 미래종말의 바탕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구원을 막연히 미래에 주어질 약속으로서 치부(置簿)해 버림으로서 성령의 능력으로서 역사의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앞당겨져 미리 맛보아 지고 체험되어 지고 누려져야 할 성질의 현재종말이 결여되어 있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의 출범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시작되었음을 선포했고, 완성을 향해 가는 도상의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회참여는 단순한 봉사 이상의 것이 되도록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영혼구원은 성서가 말하는 온전한 구원이 아니다. 오히려 온전한 구원은 몸의 구속과 우주의 회복에 있다. 영혼구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회복,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회복,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화목의 그릇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삶의 존재 방식으로 십자가의 방법을 우리 인간들에게 친히 실천해 보이셨다. 몸의 구속과 우주의 회복이 미래종말의 희망이라 할지라도 이 희망은 영혼구원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고 발전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인간이 희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방법으로 이 지상에서 만들어져 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구원이 없는 육체구원과 사회구원은 인간의 죄성을 망각한 비성서적이고 비합리적인 유토피아론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 육체구원과 사회구원이 없는 영혼구원은 현세를 죄악시하여 이 세상을 잠시 거처 가는 나그네길로 여기는 염세적이고 가현설적(gnosticism) 말세론에 빠지게 함으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잃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구원과 육체구원 또는 사회구원은 동등하게 중요하며 선교의 목적이 된다.


스토트는 비기독교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활동하시며, 자신을 자연 속에 계시하신다고 믿는다. 비기독교 체계들 속에도 진리의 요소들, 즉 자연 속에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흔적들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구원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며,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 신앙들이 상호 교체적으로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와의 대화는 비기독교적 종교의 부적합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적합성과 진리성, 절대성과 최종성을 논증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배타주의 입장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확신과 선교열정은 가지고 있으나, 타종교에 대한 이해의 결여와 교조주의적 독선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종교다원주의는 세계 고등종교들은 객관적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다양한 인간적 반응이며, 모두가 다 계시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만큼 모든 종교는 같은 진지성을 갖고 대해야 하며 상호대화를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종교를 성숙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하나, 기독교 복음의 특수성이 상실됨으로 스토트는 이들 입장에 반대한다. 여기서 스토트는 타종교 속에 내포된 진리와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마음을 여는 자세로 타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배우며 수용하는 입장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안에서 타종교가 궁극적으로 성취되고 완성된다는 포용주의 입장을 어느 정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가 포괄적으로 영혼의 구원은 물론,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즉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고뇌로부터의 탈출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이고 사회적인 구원과 우주의 회복에까지 포함한다면, 스토트는 이 모든 것이 선교라고 할지라도 전도가 최우선이라고 고집하며, 사회구원을 궁극적으로 성취될 미래종말에 한정시키려 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 선교가 역사성을 무시한 채, 민중의 고난을 도외시해서도 안되지만, 민중을 위해 싸우면서도 교회로부터 소외되어서도 안 된다는 포용적인 입장과 미래종말의 선취적(先取的) 입장에서 변화에 혁명적으로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물론, 변화에 현존하는 교회로서의 입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수적 입장이다. 이는 스토트가 타종교 혹은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의 특수성을 보수하려는 강한 의지의 소산이라고 보아진다. 특수성과 보편성은 평형저울에 놓인 긴장관계와 같은 것이어서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랜도 코스타스는 복음화에 중심을 둔 상황 신학자이다. 주변부 민중의 관점에서 신학을 성찰한 제 3세계를 위한 신학자이다. 그러면서도 해방신학과 같은 극단적인 진보신학을 지양하면서 존 스토트의 부족한 부분인 사회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문 밖의 그리스도}에 비친 코스타스의 상황신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필연적인 것이며, 성서적으로 인정된다고 보아진다. 성서는 성서시대의 상황적 산물이다. 시대의 요구 없는 메시지가 있을 수 없고, 신앙교육의 목적 없이 성서가 기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의 상황을 알지 못하고서는 글의 목적과 뜻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 성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역사 속에서 발생된 사건 사고들을 신앙적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였으며, 이들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오늘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이 있어야겠고, 그 신학작업이 바로 상황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코스타스의 신학작업은 성서에 바탕을 둔 복음주의적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그의 신학작업은 죄와 구원에 대한 그의 포괄적인 입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죄와 구원을 총체적 관계성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죄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순종, 불의와 소외, 불신앙과 우상숭배, 개인의 범죄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죄, 즉 구조악에서 나오는 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구원도 영혼과 육체, 개인과 사회, 모든 피조물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포괄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순종, 칭의와 죄로부터의 해방, 착취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 화해와 친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설명되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론은 하나의 잠정적 목표에 불과한 것이며, 선교의 궁극적 목표는 사랑과 자유, 정의와 평화로 특징 지워지는 새로운 삶의 질서, 즉 메시아 왕국의 성취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개념의 전도와 하나님의 선교가 구분이 되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맥가브란과 스토트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미래 종말에 둔 반면에, 코스타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 종말의 입장에 서서 미래 종말의 선취(先取)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선포하고 실현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속으로 돌아오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성장은 반드시 새로운 질서의 삶의 질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교회성장이란 모든 민족에게 용서의 경험을 가져다주어, 믿음의 공동체에 통합되어, 유기적인 반성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갈등이 효과적으로 해결되는 데 있다고 본다.


해방신학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코스타스는 매우 날카롭게 지적해 주고 있다. 그가 지적한대로, 해방신학에서는 인간의 죄성이 망각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해방신학에서는 신앙의 정치적 차원이 최우선적으로 취급됨으로서 개인적인 신앙이나 변화의 중요성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개인의 변화 없는 진정한 해방이 역사 속에서 있을 수 있는가의 문제점과 새로운 인간 없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과연 가능한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와 은총에 관한 문제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인간본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점이다. 셋째, 해방신학에 있어서 성서가 차지하는 역할의 문제점이다. 해방신학에서 성서는 역사적 실천에 대한 판단자료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행동의 이론을 어디서 얻는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해방신학에 있어서 역사적인 기독교적 실천이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혁명적 행동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실천이론을 세움에 있어서 성서의 특권적 위치를 부정한 반면, 마르크스주의에는 특권적 위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성서는 신앙과 실천의 규범이 된다는 점을 인정치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분명히 사회적 변혁, 삶의 변화, 공동체의 갱신, 제도적 해방의 중요성을 망각한 신앙인들에게 올바른 교리도 중요할 뿐 아니라, 올바른 실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즉 말씀의 실천과 순종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해방신학은 강단신학의 비생산성에 대해서 꼬집고 있고, 불의한 세계 속에서 제도교회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점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망실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코스타스는 1970년대를 복음화에 있어서 통전성을 추구한 시기로 평가한다. 60년대의 사회적 행동주의에서 상실된 복음화의 중심성이 70년대에 와서 새롭게 회복되었다고 본다. 이 때에 세계 교회는 복음화 없는 사회적 행동은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사회적 고통과 민중의 투쟁에 육화되지 않은 복음주의적 행동은 성서적 관점에서 보든지, 신학적 역사적 관점에서 보든지, 복음에 대한 배신이며 우리를 소외시키는 마약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코스타스는 히브리서 13장 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구체적인 사회 종교적 상황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예수가 성문 밖에서 죽었다는 의미는 구원의 새로운 장소, 즉 중심부에서 주변부에로의 전환과, 구원의 개념에 대한 보다 넓고 근본적인 이해와, 구원은 종교적 울타리밖에, 즉 신앙 공동체의 안락과 안전밖에 존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선교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촉구하며, 구원의 장소인 주변부에로의 이동,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은 행동주의를 선동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통합 세계인 장차 도래할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에 근거하는 것이다. 주변부는 영원한 처소가 될 수 없으며, 그 속에서의 봉사는 새 예루살렘을 향한 도상의 변혁적 상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전이 없이는 구원과 선교가 좌절에 이르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코스타스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성서적이다. 누가문서는 예수와 바울의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와 입성을 변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낮아짐과 고난으로 묘사하고 있고, 요한이 계시록에서 적고 있는 그리스도의 새 예루살렘의 입성은 높아짐과 승리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루살렘에서의 봉사는 새 예루살렘에 대한 비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복음화의 유형으로서 세 가지 케이스를 살펴보았다. 맥가브란의 성장론은 신자들로 하여금 영적 회심 말고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 정치 경제적 분야에서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토트의 선교론은 개인전도와 사회봉사에서 그 균형을 이루고자 하나 맥가브란과 마찬가지로 사회 정치 경제적 분야에서의 근본적인 변혁은 미래종말에다 그 희망을 둔다. 그러나 코스타스는 개인구원은 물론 사회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는다. 사회구원은 미래의 희망일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선취되어 맛보아지고, 경험되어 져야 할 선교과제로 주장한다. 특히 주변부 민중을 위한 육화(肉化)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코스타스의 입장은 더욱 현실적이고 성서적이다.

2. 對話類型


대화유형에서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종교간의 대화의 자세를 다원주의 입장에서 서술하였고, R. 파니카는 종교간의 종교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존 힉은 하나님의 체험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주장하고 있다.


먼저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대화유형을 포괄주의 패러다임(paradigm)에서 다원주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시켰고, 문화와 종교를 초월하여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대화와 이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이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각기 다른 자기 이해 또는 주관적 경험의 소산이며, 하나님은 어느 특정 종교의 사유물이 되거나 그것의 울타리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이유로 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대화란 종교적 증거에 대한 신뢰감과 개방적인 태도이며, 각자가 이해하게 된 종교적 경험과 진리를 진지하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대화는 상대방을 개종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히려 각자가 타종교에서 경험한 종교적 체험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입장에서 성서의 배타적인 특별 계시성이 부정되었고, 신앙인의 신 이해 또는 믿음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구세주로 고백된 그리스도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졌던 신앙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배타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초대교회의 삶의 자리에서 생겨진 부산물이므로 모든 신앙인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이 될 수 없고, 독자의 삶 속에서 재해석되고 상황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아라자는 종교간의 대화에서 타종교인을 개종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한다고 말하였는데, R. 파니카는 한 발 더 나가서 오히려 타종교에 개종 당할 수도 있다는 모험심을 갖자고 말하였다. 비록 모든 종교가 교리적 신념은 다를지라도, 그들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관심하는 것이며, 교리의 상대성의 인정이 교리를 초월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도외시하지 않는 종교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신앙없이 구원이 있을 수는 없지만, 이 구원이 기독교만이 가지는 독점적인 특권이 아니며, 기독교도 종교 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공유할 때에 비로소 종교적 대화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파니카는 신앙과 교리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존 힉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분명한 입장에 서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을 촉구하면서, 종교간에 신뢰할 수 있는 대화를 위해서는 전면적인 개종까지는 못되더라도 작은 변화는 감수해야 하며, 쌍방에서 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는 신앙고백적 자세를 버리고 진리탐구식 태도로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을 촉구하였다.


힉은 인간을 역사적인 피조물로 보았고, 그 인간은 태어나 구속되는 삶의 상황아래서 제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의 신 인식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과 축적된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종교간의 신 인식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적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이 축적된 전통에서 다양하게 증언되고 있는 신 인식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에로 모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패턴에서 하나님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져야 하며, 신 인식의 다원성과 다양성이 인정될 때에 비로소 종교다원주의도 인정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는 성육신 교리를 포기해야 하며, 매우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성육신의 교리는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으로 아리아라자, 파니카, 힉의 신 인식이나 성서에 관한 입장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며, 지구촌의 평화를 위한 종교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기독교의 배타적 교리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선교의 빛 아래서 신 인식의 다원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후기 기독교 시대를 바라보는 종교다원주의로의 파라다임 전이(轉移)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는 있지만, 몇 가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성서의 권위(계시성)와 기독론의 문제이다. 특히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심지어 타종교에 개종 당할 것조차도 각오하면서 종교간의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분명히 후기 기독교 시대를 바라보는 무종교 시대 혹은 각종 이단 종교의 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포기하고서도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종교체험의 다원성과 다양성의 인정이 곧 바로 자기 종교의 특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교리의 상대성 인정이 곧 바로 신앙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이미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성서가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체험과 그들 공동체가 믿고 행했던 전통과 그들의 설교를 기록으로 남긴 책이라고 보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신앙 안에서 살도록 기록되었다. 비록 성서가 수많은 사람들과 수 세기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앙의 관점에서 보고 수용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념의 체계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증거하는 통일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언어로 된 신앙의 체험적 신앙고백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무대에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그 드라마를 쓴 작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과 같으며, 또 관현악 연주에서 여러 연주자들의 각기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듣게 되지만, 결국 작곡자 자신이 의도한 한가지 주제 음악을 듣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국 성서를 기록한 여러 저자들의 설교와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보게 되며, 그 구원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기독교가 타종교에도 동등한 하나님의 구원의 체험이 있고 그 다양성을 인정한다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의 체험에 의한 신념체계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타종교인의 구원의 체험을 인정하는 것과 기독교인의 구원의 체험을 포기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비록 초대교회가 성서에 기술한 그리스도가 그들이 이미 신앙으로 수용하고 고백한 초월적 특성을 지닌 신적 존재라 할지라도 신앙의 그리스도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인 존재라 하여 재해석을 통한 상황화나 비신화화 될 수 없다고 본다. 이 신앙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믿고 수용하였던 신념이며, 그들의 신학적 체계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 드려야 하느냐의 문제는 선택과 결단의 문제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에 의한 신앙은 곧 그의 삶의 존재양식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믿느냐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살아 갈 것인가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종교간의 대화는, 종교간의 특수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인 선택의 자유는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와 평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간의 불화와 반목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그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류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건강한 삶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종교가 저지른 수많은 해악들을 말해 주고 있다. 종교적인 박해와 전쟁은 중세기의 남미 원주민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야만적인 대량학살, 십자군 전쟁, 마녀 화형, 그리고 지금도 회교 근본주의자들이 저지르고 있는 납치와 살해, 국가와 민족간의 종교전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공동사회를 이루고 종교를 갖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세계 도처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간의 불화와 반목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고, 신앙을 갖는 근본 목적과도 위배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신앙만이 유일무이한 계시적 진리라고 생각하여 남의 신앙을 이단시한다면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신앙체험들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선교는 정복이나 강요이기보다는 대화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3. 狀況化 類型


호켄다이크는 현대사회를 위한 예언적인 선교전략을 강도 있게 제시하였고,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종교심과 가난을 융합하여 해방의 종교사회주의를 표방하였고, 서남동은 70년대 이후의 한국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메아리로서 민중신학을 전개하였다.


호켄다이크의 선교신학적 입장은 흩어지는 교회 또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신자의 사도직 수행에 의해서 선교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와 만남으로서, 구원의 표지 곧 평화, 교제, 정의, 용서, 기쁨 등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친교하며 봉사하는 도구로서의 교회를 말한다. 따라서 흩어지는 교회란 "안전한 교회의 항구를 등지고 다시금 바다로 떠나"(9쪽) 가는 교회요, 흩어짐의 목적은 서구 기독교 문명의 확장이나 개인 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피조물 세계의 구원과 평화수립에 있다. 따라서 이 세계에 요청되는 전도는 개인의 구원에 있지 아니하고 메시아적 평안의 도래를 설교와 친교와 봉사 속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선전이나 교회 확장 또는 교회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 것이다.


호켄다이크는 선교의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나라에 둔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사도직→세상이라는 파라다임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교회 중심의 선교정신은 잘못된 것"(39쪽)으로 본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며,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온 세상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무대이며 목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수단이요 또한 도구인 것이다"(42쪽).


여기서 호켄다이크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다르게 보고 있다. 교회의 사명이 선교에 있고,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분화 시킬 수 없다. 교회는 현재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이며, 미래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도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선교의 도구일 뿐 아니라, 선교의 목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교회론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아진다. 만일에 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시정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흩어지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에 머물러 있는 존재 방식을 떠나 항구적으로 인간의 삶 속에 머물러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켄다이크의 이러한 주장은 자칫 흩어지는 교회가 아니라, 흩어져 버린 교회 즉 무교회주의에 빠지기 쉽다. 흩어져 버린 교회는 분산되어 버린 빛이 열과 밝기를 상실하게 되는 것처럼 강단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재충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인력과 재력의 상실로 인해서 궁극적으로는 사도직 수행을 해 낼 수 없게 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켄다이크는 {흩어지는 교회}에서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예언적인 안목으로 예리하게 분석 통찰하고 있으며, 여기에 걸맞은 선교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모든 신자가 사도직을 수행하는 세계 속에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교회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사도직→세상이라는 선교 패러다임이 정위된다. 그러나 저자는 종교이후 시대를 예견하면서 세상 속에 흩어져 사도직을 수행하는 교회의 중요성을 편파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교회의 조직이나 제도로서의 중요성을 왜곡하는 경향이 있으며,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면서 또한 완성을 향한 도상의 존재라는 점이 교회가 선교의 도구라는 점과 함께 언급되지 못하고 있다.


피어리스는 아시아의 종교심과 가난이 융합하여 생성시키는 해방의 종교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피어리스는 해방신학의 영성을 (1)살과 피를 나누는 성례전적인 삶 속에서 즉 복음에 따라 사는 자기희생의 삶 속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은 "타인들 속에 숨어 계셔서 우리의 활동을 통해 섬김을 받고자 우리를 기다리신다"(27쪽)고 말한다. (2)복음의 힘든 요구 곧 자기 초월에 근거를 둔 자기부정, 비움, 포기, 십자가의 짐에 진정한 영성의 근본을 둔다(24쪽). (3)세속적 투신을 통해서 삶의 순간들을 예배처럼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해방신학의 영성을 찾고 있다(31쪽).


이와 같은 영성은 가난과 관련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영성은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이요, 가난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겠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부와 하나님은 대립의 관계요 적대관계이기 때문에 진정한 영성은 가난해지려는 투쟁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36쪽). 전자는 자발적인 가난이요, 후자는 강요된 가난에 대항하는 영성이다(46쪽). 여기서 펼쳐지는 이론은 "가난은 가난으로 치유된다"는 보프의 말에 근거한다(47쪽).


이러한 영성은 "이성의 남용을 예견하고 경고한다"(59쪽). "기존질서의 합리적 정당화 내지는 부도덕한 행동정식을 배후에 둔 무비판적인 이론"(58쪽)은 종교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이성의 부패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현재가 완전해질 수 있다는 신앙은 완전한 미래를 바라는 희망에 의해서만 유지되며, 동시에 무제한의 사랑에 찬 미래가 아닌 한 어떤 미래도 완전한(계급 없는) 미래일 수는 없다"(65쪽)고 지적한다.


피어리스는 "아시아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심(농민들로 대표된다)과 경건한 아시아인들의 가난(승려들에게서 드러난다)이 합류하는 그 지점에서 아시아의 물길에 교회가 뛰어들어야 한다"(97쪽)고 말하며, "그 지점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종교적 사회주의'가 이루어진다"(98쪽)고 보고 있다.


피어리스는 자발적인 가난이 불교의 영지적 영성 모델이며, 기독교의 아가폐적 영성 모델이라고 말하고, 이 두 영성의 공통점을 금욕수덕(禁慾修德) 즉 가난해 지는 투쟁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투쟁에서 찾고 있다(166-167쪽). 따라서 올바른 아시아의 신학방법은 (1)불의의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며, (2)이론보다 실천에 우위성을 두는 것이며, (3)십자가의 길이며, (4)"'소유'문화를 정당화하고 영속시키는 '개발신학'이 아니고 '포기의 고행'이며, '자발적인 가난'을 요구하는 '해방의 신학'"(199쪽) 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피어리스는 아시아인의 가난과 종교심에서 아시아의 해방신학을 정위하려 하였고, 아시아의 종교심 속에서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역사적 예수의 수행적 삶의 모습을 재발견하였고, 기독교 선교의 방법을 찾았다.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종교들과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소유한 포기와 비움의 신학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현실인 가난을 아시아의 해방의 도구로 삼아 아시아의 종교사회주의 실현의 가능성을 개진하였다. 그러나 피어리스는 마르크스주의적인 혁명이나 허망한 유토피아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의 종교사회주의는 현재종말론의 선취적 사상에 가까운 내용이다.


서남동은 김지하의 다음과 같은 선교철학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민중적 한을 풀어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 그리하여 한으로 인한 폭력의 순환 고리를 끊어야 하는 교회, 순환을 운동으로 바꿔야 하는 교회, 그렇기에 한정된 폭력을 접수 용납해야 할 교회, 모든 진보사상과 어둠속 투사와 레디칼의 지성소(至聖所)이어야 할 교회"(115쪽).


서남동은 이러한 선교철학을 바탕으로 예수를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로 소개한다. 여기서 해방은 개인적 정신적 심령적인 것이기보다는 공동체적 역사적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가난한 자, 눌린 자를 해방하시기 위해서 오셨고, 정치범으로서 십자가형을 받으셨다고 본다.
서남동은 기독교 종말론을 교회사적으로 조명한다. 유대교의 종말론을 메시아 왕국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신국(神國)과 준궁극적인 종말인 천년왕국으로 정형화된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신국은 보다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의 내용으로, 천년왕국은 보다 더 사회적이고 외면적인 신앙의 내용으로 보면서 교회사에 있어서 혁명신앙의 동력으로 나타난 것은 천년왕국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전천년설의 입장의 종말론은 지연된 재림으로 인해서 제도적 교회 속에서 비종말화하였고,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는 교회가 호국종교화 하면서 부유하게 되었고, 교회를 신의 역사경륜의 최종양태로 인식함으로서 종말신앙의 미래적 혁명적 차원은 없어지고 기독교는 헬라화 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사의 유산을 거부하고 신앙을 재종말론화한 사람들로서 요아킴 플로리스와 토마스 뮨쩌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혁명, 정치, 해방의 신학으로 인해서 기독교는 잃었던 복음의 사회적 차원의 구원을 되찾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역사는 기독교 이후의 시대에 돌입했으며, 이 시대에는 교회관이 해체되고 복음의 혁명적인 잠재세력이 발휘되어 가난한 자, 눌린 자, '암하레쯔'의 종교, 민중의 종교가 이루어지는 신국 도래의 종말론적인 지평이 열리고 있다고 전망한다.


서남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 민중 스스로 자기 권익을 찾는 민중의 교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지금은 민중의 시대요,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민중을 섬기는 시대라고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인용하여 말한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악을 한꺼번에 제거하겠다는 전투적 결단"이나 "전쟁을 부르는 열광성" 또는 흑백논리가 아니라 평화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르는 자와 눌린 자와의 화해는 구조악의 회개에서 비롯된다고 말함으로서 한정된 폭력을 인정하고 있다.


서남동은 "한의 사제"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 정치, 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불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 못하는 교권"(43쪽)은 눌린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상실된 주체성을 되찾게 해주고, 가슴속에 쌓인 한을 풀어 주는 사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한(恨)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44쪽) 라고 말하고, "한의 사제는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듣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44쪽) 라고 말한다.


성서적 전거(典據)에서 저자는 출애굽사건과 십자가형 사건을 민중구원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이들 두 사건을 철저하게 사회경제사의 차원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본다. 이들 두 사건의 차이점이 있다면, 모세가 해방자라면, 예수는 저항적인 동행자였고, 출애굽사건이 일회적인 사건이라면, 십자가형 사건은 영구적 혁명의 첫 시발점이 된다. 일회적 혁명은 민중이 구원의 대상이 되지만(타력구원), 영구적 혁명은 민중이 구원의 주체가 된다(자력구원).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태도가 지금 억눌리고 소외된 민중이 내일의 자기운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민중신학의 전거가 되는 것이다"(54쪽) 고 말한다. 또한 저항적 동행자의 생은 십자가형을 각오하지 아니할 수 없고, 십자가형은 민중이 자기운명의 주인이 되는 투쟁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대가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서남동이 말하는 선교는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며, 민중의 소리 즉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듣고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심이 천심이요, 유언비어가 민중의 신음소리라고 말한다. 또 이 한의 소리는 이 세속시대에 오신 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고난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혹은 "한의 속죄적인 성격"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고난받는 민중의 신음소리, 한의 소리를 타고 오시기 때문이다(119쪽). 그러므로 선교는 노농자 농민들의 아픔에 함께 연대함으로서 그들의 인간화에 힘쓰는 일이며, "민중적 한을 풀어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 그리하여 한으로 인한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어야 하는 교회, 순환을 (전진)운동으로 바꿔야 하는 교회, 그러기 위해서는 한정된 폭력을 접수 용납해야 할 교회, 모든 진보사상과 어둠 속 투사와 레디칼들의 성소(santuary)이어야 할 교회"(101쪽)가 되는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민중신학이 교회론에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고, 영혼구원을 소홀히 하고, 사회구원에 전념함으로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교회가 신음하는 민중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은 백번 들어도 옳은 말이다. 한국 강토에 민중과 연대하여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위로자로서의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민중신학의 공헌일 것이다. 이상으로 복음화유형과 대화유형 그리고 상황화 유형으로 나누어 각각 세 권씩의 총 아홉 권의 책을 중심으로 현대 신학의 유형을 살펴보았고, 비평도 하였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삶의 방식에 의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선취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는 미래종말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독교적 인간관과 역사관에 근거한다.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으로 시작되었고, 죄인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간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인의 삶 속에서 미리 맛보아지고 누려진다. 또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종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완성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 질 것이다.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평안과 행복이 있는 개인구원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나라,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에서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영적인 구원에서 출발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구원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영혼구원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가 말하는 온전한 구원은 몸의 구속과 우주의 회복에 있다.


영혼구원은 사회구원을 위한 도구이다. 영혼구원은 신인(神人)관계의 회복, 대인(對人)관계의 회복, 대자연(對自然)관계의 회복을 위한 평화의 도구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화평케 할 자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실천해 보이신 십자가의 방법이다. 그리고 인간이 희망하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이 십자가의 삶의 방식으로 완성될 것이다. 영혼구원은 사회구원을 위한 도구이며, 영혼구원이 없는 사회구원은 인간의 죄성을 망각한 비성서적이고 비합리적인 유토피아론에 지나지 않는다. 또 사회구원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영혼구원은 현세를 죄악시하여 이 세상을 잠시 거처 가는 나그네길로 여기는 염세적이고 가현설적 말세론에 빠지게 함으로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잃게 된다. 따라서 선교는 영혼구원은 물론,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고뇌로부터의 탈출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이고 사회적인 구원과 우주의 회복에까지 그 관심의 폭을 넓혀야 한다.


선교는 정복이나 강요이기보다는 대화와 선택의 문제이다. 영혼구원 혹은 개인구원은 신앙인의 삶의 존재방식 즉 가치관과 세계관에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신인식의 다양성과 종교들의 역할과 기능의 다양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통일종교를 꿈꾸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이 개종을 통한 것이든지 통합에 의한 것이든지 통일종교는 인류사회에 건전하지 못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는 언제나 불건전할 수밖에 없다. 신앙의 선택은 각자의 삶의 존재방식에 관련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선택해서 믿느냐의 문제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서 살아 갈 것인가와 관련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화 사회 속에서의 종교간의 문제는 종교간의 특수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인간의 종교적인 선택의 자유는 그것이 건전한 것이라면 언제든지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의와 평화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간의 불화와 반목은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며, 그 속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류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건강한 삶이다. 여기에 선교의 당위성이 있고, 삶의 활력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러 회사들이 구간을 나누어 도로를 건설하여 개통하는 것과 같을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선교는 개인구원을 위한 선의의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평화와 정의사회의 구현을 위해서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지닌 분이시다.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은 물론 분배와 보복의 정의를 위해 몸으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 앞당겨 오는 일이 선교의 과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기독교인이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