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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10-12 11:34
성령세례에 대한 성서적 고찰2/3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864  
   http://kccs.pe.kr/thesis04.htm [650]

4) 마음 비우기
성령을 받고자 하는 자가 이 모든 능동적인 순종의 과정을 거치고 철저히 성령께 그의 마음을 비운다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저히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며 철저히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성령을 받기 원하는 자는 모든 자신의 의지적 조절을 버려야 한다. 어떠한 현상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더라도 거절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완전히 내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49

그러나 이러한 내맡기기식 가르침이 야기하는 큰 문제는 사탄의 역사에 대한 호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의 가장 큰 결점은 객관성의 결여에 있다. 내가 하는 방언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사탄의 장난인지 또는 단순한 자연의 현상적인 작용인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무의식적으로 마귀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객관적으로 입증이 되었고, 고넬료 가정의 방언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신령한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마음 비우기 식에는 성서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위험한 발상이다. 성서는 방언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하였다. 이는 강권적인 뜻이 내포된 말이다.

5) 성령대망집회
정기적인 집회 후에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특별 기도회로 모이는 집회를 말한다. 이 때 기존의 경험자들이 방언을 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협조한다. 이와 같이 오순절 순복음식 성령체험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기보다는 주로 대중적인 집회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대중적인 집회가 주는 많은 장점도 있겠으나, 빠른 템포의 찬송, 강렬한 손뼉치기, 고성의 기도 등은 일방적이고 이드(Id/原慾) 발산적인 기도이며, 대화적이고 사색적인 기도가 이러한 모임에서는 추방을 당하고 있다.(50 언어학자이며 선교사였던 유진 니다(Eugene A. Nida)는 그의 저서 {문화와 관습}에서 서아프리카의 흑인들도 이와 같은 형태를 통해서 종교적인 무아경에 이른다고 말한다.(51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방언이 결코 기독교의 배타적인 체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대 고린도 인근 지역에는 델포이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의 여사제가 방언을 말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을 신탁 받기 위해 사용하였다.

방언을 말하는 이단 사교들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주의자들도 있고, 인간이 신이며,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몰몬교도들도 있고, 마리아의 몽소승천이나 교황의 무오설을 믿는 천주교회도 방언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운동의 방언이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표본이 됨으로써 교리의 상대성을 지지해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환언하면, 방언 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믿는 교리도 인정되었거나 아니면 교리나 진리가 전혀 중요치 않거나 이다.

6) 믿음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가지 종류의 믿음에 대해서 말한다. 이들이 강조하는 믿음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순종에 보충하는 부가적인 행동으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믿음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동의와 신뢰로서의 믿음과 구분된다. 이를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능력과 성별을 위한 성령께 향한 믿음이 있다고 펄만(Pearlman)은 주장한다.(52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세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과 성령께 향한 믿음을 나눈다면, 에베소서 4장 5절의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한 말씀에 위배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서의 믿음도 따지고 보면, 구원하는 믿음이 성령의 간접사역에 의하는 것이라면, 은사로서의 믿음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이상으로 오순절 운동가들의 성령세례론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약술한 바와 같이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의 외적 역사인 도구화의 사역 즉 성령의 은사들을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고, 중생과 분리하여 후속적으로 체험되어 지며, 그 초기 증거로서 방언 말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성령세례는 충분히 믿음을 소유한 사람, 죄를 완전히 말살시킨 사람, 완벽하게 순종한 사람, 투쟁적으로 기도한 사람, 완전하게 자신을 굴복시킨 사람만이 성령대망집회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개의 믿음과 두 번의 회개, 삼 단계의 구원론을 주장하였으며,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행위의 믿음과 순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의 외적 사역 즉 도구화의 사역을 절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성령의 내적 사역 즉 성화와 구원의 사역을 경시하였다. 심지어 은사를 받지 않으면 완전한 성결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가르쳤으며, 그 반대로 은사를 받은 사람은 완전한 성결에 이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였다. 방언을 말하는 신자들의 삶이 완전한 성결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도,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등감을 갖게 하였으며,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기도 하였다.

오순절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주장들은 전통적인 교리에 위배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믿음, 세 가지 세례는 예배소서 4장 5절의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위배된다.

죄인에게 있어서 구원과 성화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구원과 성화는 본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방언이나 권능의 행함은 구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을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 가르치셨다(마 7:22).

기적적인 권능, 예언, 방언 등의 외적 은사는 결코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며, 무교에서 바알종교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도 이런 것들을 주장하고 있고, 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성서도 이러한 사례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모세의 기적과 바로의 술사들의 것처럼 비교가 안되는 것이기는 하다.

오순절 운동의 또 한 가지 특색은 교리적 가르침이나 신학적 바탕 위에 둔 신앙과 실천을 중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체험 신앙을 강조하고 있고, 신앙적 혼합주의로 기독교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자칫 잘못하면 방언만 말하면 누구라도 방언 안에서 한 형제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으며, 방언을 통해서 이단 사설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교리적 상대론도 나올 수 있다. 현대 은사운동에 우려할 만한 점에 대해서 류제창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궤도를 이탈하는 동차와 같이 공포스러운 말기 현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의 은사운동은 개인 신앙이 얼마나 좋으냐에 기준 하였으나 오늘의 은사운동은 누가 얼마나 잘 풀리고 성공하는가 라는데 기준 하는 것 같다. 예나 오늘이나 은사운동은 성경(교리)보다 체험을 앞세워 체험을 중생과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삼는데 특징이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 신적 역사가 얼마나 일어났느냐를 중시하다 보니 성령세례나 기적적 사건들로부터 연고한 축복론 형통론을 앞세우기 마련이다. 그리고 편협한 종말론이나 위기의식을 조장하기도 하여 저주나 형벌, 축복과 칭찬을 자유자제로 구사한다.
차라리 과거(1960년대까지)의 간증자들이나 부흥사의 말속에는 중생과 변화가 중심이었는데, 오늘의 중심은 이러 이러 했더니 이렇게 잘 되었다는 평신도, 기고 만장한 자기 자랑 일관의 부흥사,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란 전도 표어가 예수 믿고 축복 받읍시다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나는 X X X 교회에 나가서 병도 낫고 축복도 받아서 아들 낳고, 집 사고, 시동생 서울대학에, 친동생 미국 유학, 아빠는 전무로 승진, 나는 이렇게 날씬하게 됐어요. 당신도 예수 믿고 축복 받아요." 이 말은 내가 꾸민 것이다.

그러나 웃지마는 못할 이런 전도 용어가 교회에서 칭찬 받고 이웃에게 어필한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더욱 가공할 것은 성령체험이 없는 신자는 '쭉정이'이고 성령의 열매(여기서는 방언, 신유, 특수체험)만 있으면 교리나 종교를 초월해서 한 형제란 신앙적 혼합주의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곳에는 회개보다 많은 양의 기도가, 변화보다 금식, 철야, 산기도가, 전도보다 헌금, 헌물이 강조되어 자기 비만하고, 배금주의, 기복 사상을 배양하고 조장한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 현대 은사운동이라고 한다면 혹평이 되겠는가? 거두절미하고 현대 은사의 어떤 곳에도 은사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방편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동서양의 공통점이다.(53

나. 성령세례는 사도시대 이후 종결되었다는 견해

일부 학자들은 오순절 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를 외적인 은사들의 부어 주심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은사들은 오순절 사건과 고넬료 가정의 사건에서 끝났다고 보며, 이 두 사건은 유대인 교회 창립과 이방인 교회 창립의 목적을 갖는다고 본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오순절날과 고넬료 가정에 내린 단 두 번의 사건 속에서 소멸된다. 이런 주장을 단회설이라고 한다. 단회설을 주장하는 유명한 학자들로는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안토니 후크마(A. A. Hoekema), 던(J. DG. Dunn), 고재수(N. H. Gootjes), 개핀(R. B. Gaffin) 등이 있다.(54

리즈(Gareth L. Reese)는 누가복음 24장 49절의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의 말씀을 성령세례의 동의어로 보고 성령세례가 단지 두 번의 사건에만 제한된다고 보았다.(55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만 약속하신 것으로 믿어 오순절 성령체험을 사도들에게만 제한시킨다(마 10:19-20; 눅 21:13-14; 24:49; 요 14:26; 16:13; 행 1:8). 그리고 이방인 교회의 창립의 뜻을 갖는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이 "위로부터" 내린 성령강림이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일한 차원에서 성령세례로 본다. 만일 오순절 운동가들이나 리즈의 견해처럼 성령세례의 경험을 능력이나 은사로 본다면, 성서의 성령강림에 대한 상당수의 약속들이 특히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약속들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제한된다고 볼 수도 있다. 맥가비(J. W. McGarvey)는 사도들의 권위와 권능이 다른 사역자들의 경우보다도 현저하게 크고 놀랍기 때문에 이 견해에 찬성하고 있다.(56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른 선지자들보다 크고 뛰어난 권능을 부여하셨다. 한번은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하였을 때,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였다가 그 벌로 문둥병자가 된 사례가 민수기 12장에 기록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을 세워 놓고 꾸중하시기를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이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셨으나 모세에게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시고 은밀한 말씀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도 사도들의 권능과 다른 종들의 권능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들의 권능과 빌립의 권능의 차이이다. 칠인 중 한 사람인 빌립은 능력과 권능의 종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내리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할 수 있었다.

현대 오순절 운동가들이 아무리 오순절 성령강림을 재현코자 하여도 불가능한 것은 하늘로부터 직접 내린 성령강림은 단지 두 번뿐이 였으며, 사도행전에 실린 나머지 두 사례는 사도들의 안수에 의해서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성서시대에는 병자가 낫기를 원하여서 주님께나 사도들에게 찾아와 낫지 않고 돌아간 사례가 없었으며, 단계적으로 치유되지 않고, 즉각 완치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러한 신유의 역사가 없음을 볼 때, 현대 오순절 운동가들의 신유 은사는 성서시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성령세례를 은사에 국한하고 역사적인 두 사례에 제한시키는 것은 성령의 내주 동거를 현시점의 성령의 유일한 역사로 보고, 모든 성령의 은사가 끊겠다고 믿는데서 온 해석일 뿐이다. 이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성령세례와 성령의 내주 동거로 국한하고, 성령세례는 역사적인 두 번의 사건으로 끝났고, 현재는 성령의 내주 동거의 역사만 남았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인 기도의 응답이나 신병으로부터의 치유 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강하게 믿고 기도한다. 그들은 다만 성령은 어느 특정인에게 더 이상의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를 허락지 않는다고 믿을 따름이다.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끊겠느냐 아니면 계속 주어지느냐하는 문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논제이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능력을 제한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본다. 또 그가 하시고자 하시면 아무도 그것을 인간으로서는 막을 수 없다.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신학적으로 막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 천년 전에 큰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같은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역사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특별한 은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2. 성령세례에 대한 성서적 이해

성령세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순절의 축복이 오순절 운동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의 은사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본질을 캐봄으로서 오순절의 축복에 대한 핵심을 바로 잡고 오순절 운동가들이나 일부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기적적 권능을 성령세례로 동등시하는 해석을 성서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가. 성령의 내주 동거로서의 오순절의 축복

(1) 약속

오순절 성령강림이 성령의 내주 동거의 축복인지, 아니면 외적인 은사의 축복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 먼저 성령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버지의 약속'이란 바로 구약성서에 예언된 성령에 관한 약속을 말한다.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바로 이 약속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는 세 분 예언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이사야는 성령에 오심을 가장 먼저 예언한 선지자이다. 다음은 44장 3절의 말씀이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에스겔도 36장 25-27절에서 성령이 주어질 것에 대해서 예언하였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요엘도 2장 28-29절에서 성령에 관한 놀라운 예언을 하였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성령에 관한 같은 주제가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에 세례 요한이나 예수의 말씀들을 통해서 재확인되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보도하고 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도 예수의 말씀을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신약성서에서 성령의 오심에 관한 이들 예언의 말씀들은 사도행전 1장 4-5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말씀에서 재확인되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에서의 성령강림에 관한 예언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에 관한 예언과 동시에 주어진 아버지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포로 이전 시대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유다의 회복을 예언하셨고, 메시아 출현과 성령 강림도 예언하셨다(사 44:3; 32:15).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메시아 출현, 그리고 성령강림을 재차 확인하셨다(겔 26:27; 39:29). 이 세 가지 예언의 특징은 그 효과가 전체적이며, 내적이며, 종말론적이다. 이는 마지막 시대에 주어질 성령세례가 내적이며, 총체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과 직결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2) 성취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이 예언의 말씀들은 주후 30년 5월 28일 오전 9시경에 오순절날에 말씀대로 성취되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후 30년 4월 9일 일요일로 보고 있다.(57 그리고 성령이 강림하신 오순절날은 유월절 안식일 다음날로부터 50일째 날이므로 이 날은 주후 30년 5월 28일 일요일이 된다(레 23:15-22). 성령께서 강림하신 시간은 사도행전 2장 15절에 유대시간으로 '제 삼시'라고 했다.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해당된다. 이 날의 성취로 최초의 교회가 창립되었고, 구약 시대와 신약시대,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로 갈라지게 되었다.

(3) 성령을 선물로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다. 모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의 종이었다.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의 종들이었으며, 모세를 도와 이스라엘을 지도할 70명의 장로와 유사들(민 11장), 사무엘의 선지생도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 왕, 심지어 미물인 당나귀와 바알 선지자 발람조차도 예언과 방언을 하였다(민 22-24장; 삼상 19:18-24).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활동하셨던 예수 때에도 신유, 예언, 방언과 같은 성령의 은사가 이미 존재했었고, 제자들도 이와 같은 체험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 혹은 특별한 것이 틀림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신자들이 누렸던 축복과 누리지 못했던 축복을 구분해야 한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생하면서부터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신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교육되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이 필요치 않았다. 오직 성령의 외적인 사역만이 있었다. 이 성령의 외적인 사역은 증거적이며, 공적이며, 제한적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역의 특징은 첫째, 외적인 도구(봉사)의 역사뿐이었다. 둘째, 특정인에게만 주어졌다. 셋째, 내적인 구원과 성화의 역사가 없었다. 넷째,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적이 없었다. 다섯째, 언제나 임시적이었다. 여섯째, 표적이 따랐다. 일곱째, 신자가 아닌 자에게도 주어졌다(삼상 10:10; 16:13-14; 19:20- 23; 민 11:25; 24:2).

주후 70년과 135년의 유대전쟁의 패배로 인한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신약시대의 삶의 무대는 이교 문화권이며, 신자들은 이교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교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모른다.

이교 문화 시대에는 성령의 증거적이며, 공적이며, 제한적이며, 일시적이며, 외적인 사역만으로는 신자들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대에도 물론 외적이며 은사적인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구약시대에 성도들에게 주시지 않았던 내적이며, 개인적이며, 우주적이며, 항구적이며, 구원과 성화에 필요한 '성령으로의 세례'를 선물로 주셨다.

이로써 이 시대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 맛보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시대로, 은혜시대와 교회시대로 특징 지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중생과 성화를 이루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구원의 완성 또는 예수 재림시의 부활을 보증 받고 인침 받고 약속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물붓드시 부어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성령으로의 세례'를 말한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종말을 선취하는 시대로,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로, 종말론적인 메시아 시대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시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교회시대로 만든다. 그리고 성령으로의 세례는 믿는 자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진다.(58

오순절날 사도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와 '성령의 은사'를 함께 체험하고 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으로의 세례가 주어짐으로서 이 시대가 우주적인 구원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 은총이 사도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이 특별한 것은 오순절날에 이들이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으로의 세례를 성령의 은사와 크게 구별 없이 초대 교회의 시작과 발전이라는 사건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을 마치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로 오해하고 있다.

성령으로의 세례는 바울서신에서 더욱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 서신이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의 사건 보도와 바울의 해석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우주적인 만인 구원의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지는 교회 시대를 시작한 사건이었다는 점과 사도들에게 특별하게 내리신 성령의 외적인 은사를 통해서 교회를 창립하고 성경을 쓰도록 하였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성령의 외적인 은사는 전달자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적인 역사이다. 교회와 성서는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의 사역과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신자 개개인의 구원과 성화는 성령이 친히 신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거하시면서 이루신 축복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이 축복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의 특징이다.(59

나. 성령세례의 정의

이제까지는 '아버지의 약속'으로서의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그 뜻대로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이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며, 신자들의 마음속에 내주 동거하시는 인격신이신 성령이란 사실을 강조하였다. 지금부터는 무엇이 성령세례이고 무엇이 성령세례가 아닌지를 박스터(Ronald E. Baxter)의 도움을 받아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부정적인 면에서 본 성령세례

먼저 성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성령세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성령세례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2장 13절의 말씀이나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 또는 로마서 5장 5절과 8장 15절의 말씀 등은 모두가 성령세례가 단회적이고 과거적이며, 계속적으로 내주 하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주후 30년 오순절날에 강림하신 성령은 그 후 영구히 교회에 거하시며, 성도들은 그들의 중생의 때에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에로 세례를 받는다. 성도들은 '한 몸으로', 한 성령 안에서, 한 주님에 의해서, 한 믿음을 통해서, 한 세례로, 한 하나님이시며, 만인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다(엡 4:4-5).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라, 단회적이며 영구적인 성령의 내주의 축복을 구원받을 때에 선물로서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을 의미한다.

박스터는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이 단회적인 성령세례의 특징을 오순절 성령강림에까지 소급하고 있으면서, 오순절 성령강림 자체를 역사적으로 단회적인 사건으로 본다.(60

(나) 성령세례는 회심후의 경험이 아니다.

우리는 중생의 때에 성령세례를 받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합되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한 몸'이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말한다. 신자가 '한 몸', 교회에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물로 세례를 받은 자만이 입교인이 된다. 그리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란 말씀은 물로 받는 세례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딛 3:5) 이루어지는 성례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간임을 말한다(고전 6:11).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이로써 우리는 구원을 받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일원이 되는 시간과 침례를 받는 시간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시간과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선취하는 시간이 동시적이며 일시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레는 회심후에 일정 기간이 지나서 받는 경험이 아니다.

박스터와 모울(Moule)도 이 점에 동의한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칭의와 중생을 체험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61

(다) 성령세례는 성령충만과 같지 않다.

사도행전 2장 4절의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의 말씀 때문에, 토리(R. A. Torrey)와 같은 이들은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을 같은 것으로 본다. 토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성령의 은사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세례는 중생과는 다르다. 성령세례는 중생이후에 첨가되는 성령의 사역이다.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62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몇 가지 내용만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동사 '세례 받다(baptistheto)' 라는 말은 계속적인 동작의 뜻이 없다. 그러나 동사 '충만(plerousthe)'은 계속적인 뜻이 담겨 있다.

둘째, 성령세례는 명령이 아닌 반면, 충만은 명령이다. 모울(Handley Moule)은, "성령충만에 관한 언급은 자주 있는 반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의 경우에서처럼 단지 두 번만 기록되어 있다."(63고 말하면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게 보았으며,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는 달리 신자들이 구해야 할 축복이라고 주장하였다. 성서 어느 곳에도 성령세례를 구하라는 명령이 없는 반면, "성령의 충만(plerousthe en pneumati)을 받으라." 라는 말씀이 에베소서 5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사람의 안수 없이 위로부터 내린 특별한 경우이며,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창립의 의의를 갖는다.

셋째, 성령세례는 배치적이지만, 충만은 경험적이다. 성서에서 성령세례는 역사적인 사건으로써 또는 신자에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으로써 성격상 배치적이다.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는 것이 배치적인 것처럼 성령세례도 배치적이다(빌 4:3). 그러나 충만은 성령의 능력이 경험적으로 유입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개인의 생활에서 우러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 . .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 . .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엡 5:19-21) 하는 경험이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의 열매를 맺는 생활이다. 또 충만은 성화와도 직결된다.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갈 5:24), 성령으로 행하며,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니 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는 생활이다(갈 5:25-26).(64

(라) 성령세례는 선택된 집단의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다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하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비록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두가 방언을 하지는 못하였지만(고전 12:30),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고전 3:16; 6:19; 12:13; 고후 6:16).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은 사도행전 2장 39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65

(마) 성령세례는 고통스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66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성령세례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고통스런 기도나 성령대망집회 등을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4절에서도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14절에 의하면,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말씀들 때문에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사도들의 '성령 대망 기간'은 10일간이었다. 유월절 안식일 다음 날부터(주일) 50일째 날(주일)을 오순절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안식일 다음 날에 부활하셔서 40일간 보이셨으므로 승천 후 성령 강림까지는 10일간이다. 이 기간이 성령 대망 기간이었다. 사도들은 이 기간에 기도에 힘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기도에 힘쓰다'(proskartepeo)는 이 말은 꾸준하고 지속적인 기도를 말한다. 유대인의 기도 습관은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였다. 특히 오후 3시는 저녁 희생제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유대인의 하루는 저녁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말한다(시 55:17; 119: 164; 단 6:10; 행 2:15; 3:1; 10:9).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한 때는 오전 9시 기도 시간이었다. 사도들이 성전에 올라가기도 하던 중에 성령강림을 체험하였다. 이렇게 보면, 사도들이 기도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은 것처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은 사도들의 고통스런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창립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큰 명절이며, 오전 9시는 기도 시간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때다(눅 24:53; 3:11; 5:12). 이런 시간에 성령이 강림하시고 여러 나라의 방언을 말하는 역사가 있었던 것은 교회창립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바) 성령세례는 영성에 대한 어떤 증거도 아니다.

성령에 관한 언급이 가장 많은 고린도전후서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에 쓰여졌다. 고린도 교인들은 분파적이었고(1-2장), 육체적이었으며(3-4장), 부도덕하였고(5장), 사랑이 없었으며(6장), 결혼 파괴자들이었으며(7장), 성별 되지못했으며(8-10장), 주의 만찬을 경홀히 여기는 자들이었으며(11장), 예배가 훈련되지 못하였으며(12-14장),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다(15-1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씻음 받고, 성결되고, 칭의 함을 받은 성도들이었다(고전 6:11). 게다가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전 12:13). 거기에다가 그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자들"(고전 1:7)이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로 볼 때 확실한 것은 성령세례가 영성에 대한 어떤 증거도 아니라는 점이다.(67

(2) 긍정적인 면에서 본 성령세례

이제까지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성령세례가 아닌 것을 설명했지만, 이제부터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가) 성령세례는 성령의 요소 안에 있는 세례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한 성령으로'(en eni pneumati)에서 전치사 'en'이 여격과 함께 쓰이고 있기 때문에 'en eni pneumati'를 지역적 의미로 해석하느냐, 도구적 의미로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은 도구적 의미로(by one Spirit) 번역하고 있다. 엉거(Unger)는 "헬라어 전치사 이 도구적 의미인 by를 의미하든, 영역의 위치를 설명하는 in을 의미하든 관계없이 '한 성령으로'는 성령세례를 말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의 정확한 헬라어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성령의 영역 안에서의 세례(in- the-sphere-of-the-Spirit baptism)로서 표현할 수 있다"(68고 하였다.

by는 성령이 세례의 주체자가 되며, in은 세례가 성령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지역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행사로서 물의 영역 속에서 침수된다. 이는 물이 세례가 일어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도 성령의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이 요소가 되는 세례로 볼 수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례를 보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게"(행 2:2) 성령이 내리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 속에 푹 담가짐을 의미한다.

(나)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물세례를 통해서 물은 신자가 침수되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례자가 있어야 한다. 물은 주례자가 아니며, 세례를 통해서 구성원으로 가입되는 교회도 아니다. 물론 구성원 가운데 주례자가 있지만, 교회 자체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세례도 성령이 요소가 되나 주례자는 아니시다. 삼위일체적인 입장에서 볼 때, 성령께서 세례의 요소도 되시고 주례자도 되실 수 있겠으나, 그 역할로 볼 때, 역시 성령을 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16; 16:7). 또한 세례 요한의 증언대로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다) 성령세례는 근본적으로 지역교회와 연결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서 표현한 한 몸이란 어떤 몸을 지칭하는 것인가? 12장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몸과 지체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27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는 지역교회를 두고 한 말이다. 1장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정의한다.

지역교회를 한 몸으로 보았을 때, 그리스도가 이 몸의 머리 시요(엡 1:22; 4:15; 5:23; 골 1:18), 교회는 그의 몸이다(엡 1:23; 4:12; 5:23; 골 2:24). 그의 몸은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개개인의 구성원을 말하며, 이 구성원들은 그들의 받은바 은사들로 인하여 각각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몸의 지체가 되는 이유는 성령세례때문이다. 구성원의 육체적 의식인 물세례도 성령세례의 근본 위에서 가치가 있다.69)

윌리암즈(John Williams)는 이같은 내용에 동의하며 말하기를, "성령세례의 실제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하고 봉사할 힘을 얻게 하려는 것도, 그들에게 황홀한 언어나 경험을 갖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 몸으로 연대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이 위대한 사건에 의해서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출생이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나가 되었다"(70고 피력하였다.

(라) 성령세례는 보편적이다.

구약에서는 몇 몇 사람만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반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종말론적인 성령세례는 범우주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이는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의 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주장한다. '다'(pantes) 라는 말은 모든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인데,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상태를 고려해 볼 때, 하나의 충격적인 선언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미숙함을 꾸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윌리암즈(John Williams)는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sarkinois/1절)인 것 같이 영적으로 미성숙할 뿐 아니라, '육신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 자'(sarkikoi/3절) 처럼 비난받아 마땅함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흔히 주장되는 것처럼 성령세례가 신령한 사람만의 고유한 영역이며, 축복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어떻게 의도적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분명 바울은 성령세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만큼, 고린도교회의 상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것은 성령세례의 선행조건도 아니오,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도 아니다.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주는 축복이다. 바울의 교훈에 대한 앞서 나온 주석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 받음으로 서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 (그가 '육신적인' 사람이냐, '영적인' 사람이냐 하는 것은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으로 세례 받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71

월부워드(John F. Walvoord)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령세례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그것이 몇 몇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과 세례는 공존하며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72

레네 파치(Rene Pache)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어떤 특권층의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에게만 국한하는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서는 이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에 대한 증거는 성령세례가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도, 그리스도의 몸에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타난다.(73

또한 성서는 성령세례의 보편성에 대해서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성서적 자료들을 찾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예언의 말씀에서 볼 때, 이사야는 기록하기를,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사 32:15),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사 44:3) 라고 하였다. 여기에 쓰인 '우리에게'나 '네 자손에게'는 전체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다.

에스겔도 기록하기를,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겔 36:26),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겔 36:27),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겔 39:29) 고 하였다. '너희'나 '이스라엘 족속에게' 라는 말은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 분명하다.

요엘서의 말씀도 예외는 아니다. 요엘은 기록하기를,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 2:29) 라고 적고 있다. '만민에게'나 '남종과 여종에게'도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뜻을 가진 말씀이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서 뿐 아니라, 신약의 말씀 속에서도 성령세례의 보편성은 강력히 시사되고 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물세례와 비교하여 예수께서 성령으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예수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구원받아 천국갈 사람은 모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란 뜻이다. 박윤선 목사는 이 말씀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신약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시대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 함은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주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말함이라"고 하였다.(74

요한복음 7장 38-39절의 말씀도,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남은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하였고, 믿는 자가 바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하여 보편성을 시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38-39절의 말씀은 회개하여 세례를 받는 자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하였고, 이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하였다. '모든 먼 데 사람'은 이방인을 두고 한 말이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2장 11-13절에서 이방인을 일컬어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또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고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약속은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갈 3:26-27). 이 약속은 우주적이긴 하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이 약속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사도행전 5장 32절은 말씀하고 있다.(75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로마서 8장 9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하였고, 15절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라고 하였다. 또 26절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빌 바를 간구하여 주신다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고 하였고, 3장 16절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하였다(6:19; 고후 6:16; 엡 2:22). 12장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12장 13절은 모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다(5:5).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다(4:30).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요한일서 3장 24절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하였고, 4장 2절은 성육신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영이라고 하였으며, 4장 13-15절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성구들이 성령세례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으며, 모든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을 소유한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쫓아 행하라"(갈 5:16, 25),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고 하였다. 이는 모든 성도가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성령을 심령에 소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말씀들이다.

(마) 성령세례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이다.

성령세례가 성령의 은사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은혜시대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중생한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인격체로서 그들의 심령 속에 내주 동거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의 보편성과 성령의 내주 동거는 거의 같은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예언의 말씀인 에스겔 36장 26-27절은 메시아 시대로서 성령시대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 동거하실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이러한 약속은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와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에 잘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7장 38-39절의 말씀은 사람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에 비교하여 성령의 내주를 시사하였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10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11절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여 성령의 내주를 입증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 6장 19절, 고린도후서 6장 16절, 에베소서 2장 22절은 믿는 성도의 심령이 성령의 성전임을 힘있게 입증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과 5장 5절은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 30절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갈 5:16, 25),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엡 4:30) 등의 말씀은 성령의 내주 동거를 생각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씀들이다.

(3) 성령세례의 근원, 수단, 시간, 목적

많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관련된 시간이나 목적에 대해서는 연구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근원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막연하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2장 8-10절과 골로새서 2장 11-13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 가운데서,'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세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중생과 별개의 시간에 후속적으로 많은 기도의 대가로 받는 방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성서적인 가르침에 관심을 갖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 38절과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성령은 '선물로,' '믿음으로,' '세례 가운데서,' '성화'를 위해서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은혜요, 수단이 믿음이요, 시간이 세례요, 목적이 선행인 것 같이, 성령세례도 그 바탕이 은혜의 선물이요, 믿음을 수단으로, 세례 가운데서 수여되며, 성화를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가) 성령세례의 근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 된 것이다. 인간의 의로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충족시킬 수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원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율법의 완성으로 획득되는 구원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폐쇄되었다(롬 1:18-3:20).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는 법을 어긴 인간의 무력성과 소망 없는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율법을 준수하고 형벌을 피할 길이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법을 어기고 징벌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무서운 대용책일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무서운 현실이다. 우리의 힘과 의로움을 의지할 때는 저주밖에 받을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처절한 현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 다른 한 방법을 주시는 데, 그것이 로마서 3장 21절부터 5장 21절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받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의 구원에 바탕이 된다(사 61:10; 롬 3:21; 10:3; 고후 5:21; 빌 3:9).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고 간주되고 우리의 것으로 인정된 의이다. 이를 칭의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때문에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를 충족시키시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셨고, 수동적으로 인간의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상에서 형벌을 받으셨다. 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이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율법의 요구 충족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두 속성인 사랑과 공의가 다 함께 충족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즉 그 크신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선물이다(롬 6:23).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고 성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중적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가진 문제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범죄로 인해서 유죄하며, 유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타고난 죄성에 의해서 인간은 부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치 사고를 저지른 과속 차량의 운전자가 법의 처벌과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듯, 우리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법적 문제의 처리와 부패된 인간성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법적 문제를 처리 받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의 전가에 의한 칭의이다. 이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선포에 의한 의이며, 하나님의 의가 전가된 것이다. 이는 죄인이 무죄자가 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죄인이 재판장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무죄로 선포 될 때, 그 동안의 부패된 인간의 상태도 치료자이신 성령에 의해서 초기적으로 치유된다. 이를 초기 성화라고 한다. 그러나 칭의와 초기성화 후에도 인간은 죄성의 잔존 때문에(롬 7:15-25) 계속해서 치유되어 져야 하는데 이를 점진성화라고 부른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속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의이며, 만들어진 의이다. 이는 내적이며, 개인적인 의이다. 성령은 치료자가 되시며, 우리의 부패를 치료하시고 감싸신다.

칭의가 죄인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점진 성화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겉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어 가는 생활이 속 사람이 살아가는 성화의 생활이다. 바로 이 점진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성령이시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은 성도의 심령에 내주 하신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치 못했던 이 쓰라림을 다시 반복치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구원받을 때에 함께 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신의 노력만으로 살지 아니 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죄성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 이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롬 8:37).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로마서 6-8장의 말씀이다. 6장은 신자의 이상적인 삶에 대해서 즉 성화의 삶에 대해서 이성적인 이론을 성립시키고 있고, 7장은 순종의 어려움에 대한 슬픔을 다루고 있으며, 8장은 성령의 내주 하심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하였고(엡 1:14),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고후 5:5), 인 치심의 보증이라고 하였다(고후 1:21-22). 우리의 구원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분리할 수 없으며, 성령 없는 성화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다. 만일 칭의가 선물이라면, 마땅히 성령세례도 선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초기 성화의 다른 신학적 술어는 중생이다. 중생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사역이다. 육체의 질병은 약으로 치유되지 자신의 믿음만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령은 죄인의 무의식과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양약이시다. 그러나 그 역사는 효력이 강하여서 그의 부패함을 치료하시고 그의 죄를 사하신다. 비록 죄인이 이 사실을 의식치 못한다 할지라도 성령은 그에게 생명 즉 중생을 부여하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령은 중생의 시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은 구하여서 얻는 것이 아니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서 각양 은사를 나누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에(고전 12:11) 성령세례를 은사로 볼 수 없다. 어찌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성령의 내주보다 더 큰 것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는 은사를 주시는 이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이다.

성령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은사 또는 선물로서 언급되고 있다(요 7:37-39; 행11:17; 롬 5:5; 고전 2:12; 고후 5:5). 은사는 성격상 공로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선물로서의 성령은 결코 보상으로서 언급된 일이 없다.(76

사도행전 2장 38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했는 데, 이것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에게까지 주시겠다는 약속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령을 선물로"(dorean tou hagiou pneumatos)란 말은 선물이 곧 성령이라는 뜻이다.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그의 {언어 사전}(Word Pictures)에서 'tou hagiou pneumatos'를 동일성 소유격으로 보고, 이를 '성령의 선물'로 해석치 아니하고 '성령을 선물'로 풀이하고 있으며, 터너(N. Turner) 역시도 소유격을 물질 소유격으로 보고, 이를 '성령을 선물'로 풀이하고 있다고 배일즈(James D. Bales)는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배일즈는 사도행전 2장 39절에 언급된 '약속'(epanggelia)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란 점을 지적하면서 죄사함과 성령세례가 동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77

로버트 밀리간(Robert Milligan)도 '성령을 선물로'란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에 사용된 '선물'(dorean)이 단수로 사용되었으며, '은사'(karismata)는 복수라고 지적하였다. 이 선물의 특색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지만, 은사는 때때로 비신자들에게도 주어진다고 하였고, 이 선물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약속된 반면(행 2:39), 은사는 일부 성도들에게 제한되고 있다(겔 36:25-27; 요 7:37-39; 롬 5:5; 8:9-11; 고후 1:22; 갈 4:6; 엡 4:30; 5:18)고 하였다.(78

키텔(Kittel)의 사전에도 사도행전 2장 38과 8장 20절의 dorean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성령을 말한다고 하였고, 이 단어의 뜻은 '값없이' '무상으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79

전경연외 4명의 학자들은 교회가 이방사회와 다른 것은 교회가 바로 성령을 선물로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 8:9; 갈 3:2; 고후 12:13; 13:13). 또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인에게 준 선물이라고 했고(살전 1:5; 고후 1:6; 롬 9:1; 15:13, 16; 엡 1:13),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 때문에 성전이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80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성서적인 가르침이며, 성령세례를 고행스런 기도와 헌금 그리고 믿음 이상의 것으로 받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받은 바 성령을 깨닫지 못한 처사에서 나오는 어리석은 짓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자전하는 지상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듯이 성령을 모시고 살고 있으면서도 성령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성령을 모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이 귀한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값진 복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이 귀한 사실은 우리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원하신다면 귀하고 신령한 은사도 주실 것을 믿는 것이며, 그 은사들은 멀리서 구할 것이 아니오,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신의 심령 속에 계시는 성령께 구해야 할 것이다.

(나) 성령세례를 받는 수단

우리가 구원을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하신다(롬 3:21-23).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을 받는 통로이며 수단이다.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의 근원일 수는 없다.

칭의와 중생 그리고 초기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동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 구원 또는 칭의 함을 받는다는 말은 곧 믿음을 통하여 중생과 초기성화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화는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므로 결국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말씀은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 . .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오순절 운동가들은 성령세례의 조건으로 죄의 완전자복과 백퍼센트 순종, 철저한 굴복, 완전한 믿음, 꾸준한 기도 등을 들고 있으나, 성서적인 조건은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과 성령세례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동시적인 사건이며, 한 믿음을 통하여 두 가지를 다 받는 것이다. 성령이 없이는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성령세례와 구원은 하나인 것이다. 에베소서 4장 5절은 한 믿음, 한 세례, 한 주, 한 소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 운동가들은 두 가지 회개, 두 가지 순종, 두 가지 믿음, 세 가지 세례 등을 가르침으로서 성서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레네 파치(Rene Pache)도 구원과 성령세례가 동시적인 것으로 믿어서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였다.(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