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들, 장로직 (Elders, Eldership)
번역과 해설: 조동호 교수(한민대학교 신학부)
출처: Peter M. Morgan, "Elders, Eldership," in the The Encyclopedia of the Stone-Campbell Movement.
개 교회에서의 감독 사역(목회)직은 스톤-캠벨운동에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들의 비교해석을 통해서 ‘감독’직과 하나이며 동일한 것으로써 역사적으로 이해하였다.
하나의 독특한 역사는 스톤-캠벨운동의 교회들에서 장로 사역(목회)을 다듬어왔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가 택한 미국에서 개신교 교회들을 개혁하고 연합시키려 하였다. 극복해야할 장애들 가운데 하나는 사제들의 지도력에 의존하는 사역(목회)체제였다. 그는 너무 쉽게 풍자될 수 있는 개인들을 양산하는 사제 체제를 자기본위의 파벌적 권위주의로 보았다. 그는 이 체제가 전체 그리스도의 몸의 사역(목회)을 좌절시켰다고 믿었다. 캠벨의 개혁은 그것의 지도력을 포함해서 신약성서의 숙독을 통해서 정의되었고, 방향과 에너지가 주어졌다. 그는 또한 스코틀랜드의 로버트와 제임스 할데인(Robert and James Haldane)으로부터 공중 예배(social worship)에 대해서 그리고 윌리엄 밸런타인(William Ballantine)으로부터 장로직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알렉산더는, 그의 저서 <<크리스천 시스템>>(Christian System)의 사역(목회)에 관한 장(章)에서 언급한 대로, “감독들, 집사들, 전도자들로 구성된 ....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불변의 사역(목회)”을 회복하려고 힘썼다.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목회)은 왕의(만인) 제사장직과 신자들의 공동체에 맡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행하거나 사역(목회)자의 지도력의 위치들에서 섬길 적임자가 되거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전도자들은 회중(교회)들을 직접적으로 섬기지는 않았지만, 초대교회에서처럼, 순회(목회)자들로서 복음 선포, 새 신자 양성, 교회 개척을 위해서 회중(교회)들에 의해서 파송되었다. 집사들은 장로들처럼 그들의 사역(목회)들을 주어진 회중(교회) 안에서 집중하였다. 그들은 회중(교회)의 부름을 받았고, 회중(교회)에게 책임을 졌다. 그들은 회계담당자들, 자선담당자들, 청지기들, 안내자들, 전달자들의 기능들을 맡았다.
장로들(presbyteroi)은 또한 신약성서에서 주교들 혹은 감독들(episkopoi)로 불렸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회계보고를 해야 할 자들로서, 회중(교회)에 의해서 권위를 부여받아 공동체를 이끌고, 가르치고, 덕을 쌓게 하고 - 지식과 이해로써 주님의 교회를 먹이고 - 그들의 영혼들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각 교회(회중)는 장로로서 섬길 성서적 표준들에 맞는 자격을 갖춘 지역 교인들을 갖거나 갖추도록 하였다. 가르침, 목양, 감독 그리고 인도의 결합된 은사들은 어느 개인의 자격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회중(교회)들은 각 교회의 감독들의 그룹, 곧 ‘복수’ 장로들에 의해서 인도될 필요가 있었다. 캠벨에 의하면, 이들 직책들은 안수를 받고 보상을 받도록 되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에 관해서 회중(교회)들은 캠벨의 가르침이 부족하다고 정형적으로 느꼈다.
장로직에 대한 알렉산더 캠벨의 견해는 ‘항구적인’ 사역(목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증거를 좀 더 세밀하게 연구했고, 장로들과 감독들이 동일한 신분임을 반복해서 설명한 제2세대인 로버트 밀리건(Robert Milligan)에 의해서 좀 더 명확해졌다. 밀리건은 장로와 전도자의 개별 직책들에 대한 어떤 혼동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장로들은 원칙적으로 회중(교회)의 영적 관심들과 목양적 요구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직책에 대한 제한이다. 이것이 그들의 적절한 활동(노동) 영역이다. 그들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할 것에 대한 어떤 위임도 받은 것이 없다.”
한편 캠벨의 견해들에 대한 초기 전용은 새로운 쟁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함으로써 다소간 재고와 조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같은 쟁점의 하나가 지역 회중(교회)들 속에 ‘정착한’ 설교자들의 직무상 목회자의 지위였다. 1840년대 무렵 일부 회중(교회)들은 젊은 대학 졸업자들을 초빙하기 시작하여 그들 공동체들 속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더 이른 시기에 발전된 장로직 형태와는 대조적으로 이들 개인들은 목회자적 임무 수행에 따른 보수를 지급토록 되었다. 1865년까지 켄터키 주 렉싱턴 시에 하나의 특화된 ‘성서대학’이 회중(교회)에게 목회자의 일을 하게 할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정착하여 보수를 받는 전문 사역(목회)의 등장은 스톤-캠벨운동의 사역(목회) ‘체제’(조직)에 근본적인 변화들을 가져왔다.
[해설: 1804년 발톤 스톤의 ‘스프링필드장로회유언서’ 발표, 1809년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 발표이후 꾸준히 발전되어온 스톤-캠벨운동은 1830년 알렉산더 캠벨이 침례교회를 탈퇴함과 동시에 <<크리스천 뱁티스트>>(Christian Baptist)지를 접고, <<밀레니얼 하빈저>>(Millennial Harbinger)지를 새로 시작하면서 오늘의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출범하였다. <<밀레니얼 하빈저>>지의 출범은 ‘그리스도의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시대 곧 기독교의 ‘새천년’ 시대를 알리는 고귀한 출범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10년이 경과된 후에야 비로소 ‘유급 목회’ 혹은 ‘전문 목회’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전문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이 필요로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전문 사역(목회)을 수용하기 위한 기존 사역(목회) 체제를 조정하는 것에 관해서 두 개의 상반된 견해들이 동시에 발전했다. 논의가 1890년대에 뜨겁게 달아올랐고, 지속되었다. J. W. 맥가비(McGarvey)와 L. B. 윌키즈(Wilkes)가 목회자는 원칙적으로 고용된 전도자였다는 견해를 지지하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목회자들은 장로들의 부름을 받고 그들의 엄격한 감독아래서 섬겼던 ‘정착’(붙박이) 전도자들이었다. 전문 목회자는 장로들의 감시와 지배에 분명히 복종하였다.
아이작 에레트(Isaac Errett)와 J. H. 게리슨(Garrison)과 같은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들에 의해서 지지된 반대의 견해는 목회자가 그 자신이 장로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목회자는 주도적인 장로요, 동등한 사람들 가운데서 첫째였다. 장로들은 조언을 하거나 주의 만찬 상을 섬기고 목양을 하곤 하였다. 목회자는 장로로서 일차적으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책임을 수행하곤 하였다.
20세기는 스톤-캠벨운동을 세 개의 별다른 단체들로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은 주로 J. W. 맥가비(J. W. McGarvey)의 입장을 따랐고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목회자는 각 교회 장로들에게 복종한다. 이들 회중(교회)들은 또한 장로들이 성경지식에 충분히 익숙해 있어서 통치하는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시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자격을 갖춘 자들이어야 할 만큼 높은 가치를 둬왔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의 회중(교회)들은 이 두 가지 전통적인 모델들 가운데 한 가지를 채택하였고, 때로는 어느 모델이 더 바람직한가를 놓고 회중(교회) 내에서 긴장이 감돌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20세기 후반에 소위 대형교회들(megachurches)의 발전과 더불어 장로직에서의 변화들을 보았다. 그 같은 사례들에서 목회자는 종종 법인의 CEO(대표자)의 것에 필적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같은 대형 회중(교회)들에서 장로들은 조언과 동의를 구하기위해서 소집된다. 극단의 대립 상황들에서 장로들은 목사의 제안들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단지 소수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만이 각 회중(교회)들에서 여성들을 장로직에 안수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에서나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에서도 여성장로안수가 눈에 띌 만큼 널리 퍼진 경향은 더욱 아니다.
수년간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은 기능성 위원회들(committees)과 임기가 정해진 위원회들(boards)의 도입으로 지배 직책으로써의 장로직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였다. 장로들은 비공식 목자들로서 대체로 존경을 받았던 ‘명예로운’ 인물들이 되었고, 그들이 주의 만찬 상에서 목사들과 함께 사역(목회)을 공유할 때 그들의 초상(icon)적 외모에 대한 가치를 높였다. 역사가 로널드 오스본(Ronald Osborn)는 그리스도의 제자들 장로들의 ‘신비적 분위기’를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교회 사역(목회)과는 매우 다른 직업들을 가지고 삶을 영위한 사람들이 주의 만찬 상에서 드리는 기도들의 신령한 증언과 주의 만찬 때 그들이 하는 봉사에서 특별히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Disciples of Christ)은 20세 후반에 일부 회중(교회)들에서 장로들의 새로운 활력을 보아왔다. 여성들은 진지한 논의 후에 장로들로서 섬기기 시작하였고, 종종 수년이 걸렸다. 그들의 지식, 종종 그들의 선교 열정, 그들의 깊은 영성, 또 그들의 사명감은 장로직 사역(목회)의 갱신에 공헌하였다. 또한 제자들 신학대학원 재단(Disciples Seminary Foundation)과 국내선교국(Division of Homeland Ministries)은 회중(교회) 통치에서 교사들로서, 목자들로서 또 ‘지혜자들’(wisdom figures)로서 장로들의 권리 재 신장에 지대한 일을 하였다.
종종 그 전통 밖의 교회들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인지된 스톤-캠벨 장로직은 살아남았고, 종종 성공하였으며, 알렉산더 캠벨에 의해서 추천된 목회(자의) 체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명시적 융통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