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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2-06-24 01:46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영성: 원칙과 적용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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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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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영성: 원칙과 적용에 관한 고찰
On the Interpreting Spirituality of the New Testament Writers: A Study on Their Principles
http://kccs.pe.kr/thesis058.htm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이후 개혁가들은 한결같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주장들을 하였다. 16세기 개혁가들의 이런 주장은 성경이외의 변질된 교회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톨릭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21세기를 시작하는 오늘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심각한 분열에서 그 당위성이 확보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분열은 줄지 않고 있고, 성경해석의 격차도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은 개신교회들이 이미 단단하게 굳어버린 자기 교단의 오랜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과 성경해석의 원칙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기인한다.
성경해석의 원칙이 통일되지 못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성경만을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 성경뿐 아니라, 삶의 정황과 인간의 이성까지도 포함시킬 것인가; 둘째, 신구약 성경전체를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 신약성경만 규범으로 삼을 것인가; 셋째,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사항들을 자유로 볼 것인가, 금지로 볼 것인가; 넷째, 특정 사항을 본질로 볼 것인가, 비본질로 볼 것인가가 그것들이다. 이밖에도 특정 성구나 어휘의 뜻풀이 그리고 신학방법론에도 문제는 있다. 이런 점들로 인해서 성경해석과 적용원칙은 오늘날 그 무엇보다도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가장 바람직한 성경해석원칙들과 방법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해답으로 사도전승을 신약성경에 남긴 저자들의 해석의 영성, 즉 그들의 원칙들과 적용방법을 찾아 제시하는데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통과 비정통을 가리는 잣대는 유명한 신학자의 신학체계도 아니고, 교단 총회가 승인한 신앙고백서나 교리도 아니다. 그 잣대는 언제나 사도들의 전통과 그들의 전통이 남아있는 신약성경이었다. 사도들의 전통은 초대교회 당시 정통과 이단을 가리는 잣대였을 뿐 아니라, 정경여부를 결정짓는 잣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성경해석의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는 오늘날에도 문제해결의 키는 유명신학자들의 성경해석법에 있지 아니하고, 사도들의 성경해석의 전통에 있다고 할 것이다.
성경에는 해석에 관한 말씀들이 나온다. 특히 신약성경에 그와 같은 말씀들이 많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해석한 글들이 있을 뿐 아니라, 해석에 관련된 경고의 말씀도 있어서 해석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신약성경 저자들의 성경해석의 원칙과 방법들을 살펴볼 수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구약성경의 해석자들이자, 가장 뛰어나고 완벽한 하나님의 뜻의 전달자들이었으며,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사도전승의 전달자들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뛰어난 깨달음의 영성과 일관된 신앙과 신실함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가장 훌륭한 성경해석의 모범이자 스승들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저자들의 성경해석의 원칙과 방법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패러다임(paradigm)과 해석의 목표(목적) 등을 통해서 해석의 영성을 알아보는 일은 오늘의 해석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어진다.
역사에는 순수역사(historie)와 해석의 역사(geschichte)가 있다. 순수역사는 사건그대로의 보도 즉 역사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조사탐구해서 보도한 사실적 기록을 말하고, 해석의 역사는 사건이 주는 교훈과 뜻, 또는 의미와 해석을 가미한 기록을 말한다.
함석헌은 해석의 역사를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여기"와 관련해서 골라진 사실들에 대한 뜻풀이라고 했고, 그 뜻풀이에 역사는 생명을 갖는다고 했으며, 역사가의 능력은 해석하는 힘에 있다고 하였다. 역사가는 사진사와 같지 않고 훌륭한 화가나 요리사와 같다 하였다. 따라서 잘된 역사책은 정신을 밝혀주는 글이요, 잘하는 역사독법(歷史讀法)도 정신을 읽어내는 해석에 있다고 하면서 "이 해석하는 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역사를 아는데 깊고 얕은 차이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해석의 역사이다. 성경에 실린 사실들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기 위해서 골라진 사실들(요 20:30, 21:25)이며, 이 사실들이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 즉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이 성경저자들의 고백이다. 또 성경은 이들 구원사건들과 하나님을 믿고 영생하는 길을 밝힌 저자들의 해석이자 설교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저자들의 성경해석의 원칙과 방법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한 원칙과 방법들을 말하는 것이고, 만일 이들의 원칙과 방법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만 있다면, 구약의 예언을 해석하는데서 빚어지는 이견을 좁힐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성경 해석자들의 패러다임은 그들이 역사를 보고, 문제삼고, 해결해 나간 방법을 말하며, 그들의 소명감, 역사관, 세계관, 비전 등에 제한되는 것이어서 그들의 해석하는 힘의 많고 적음이 그들의 패러다임에서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해석의 영성은 대신(對神) 대인관계(對人關係)에서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는 해석하는 힘을 말하며, 이 해석하는 힘의 많고 적음은 그들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에 의해서 제한되었다.
Ⅰ. 신약성경에는 해석이 있는가?
기독교는 신약성경 저자들의 성령의 영감에 의한 구약성경과 사도전승의 해석에서 비롯되었으며, 피할 수 없는 신학의 과제였고, 이미 초기부터 해석의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하는 해석에 관한 말씀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말 성경에 '설명하다'(explain)["설명하다"와 관련된 다양한 헬라어 어휘들은 대부분 영어의 경우 "explain"(NIV)으로 옮길 수 있다.]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는데, 그 몇 가지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마가복음 4장 34절]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expound)하시더라.<개역한글>
[누가복음 24장 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interpret)하시니라.<개역한글>
[누가복음 24장 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open)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한글개역>
[사도행전 17장 3절] 뜻을 풀어(explain)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한글개역>
[사도행전 18장 26절]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explain) 이르더라.<한글개역>
[히브리서 5장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hard to explain)<개역한글>
[베드로후서 1장 20절]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마음대로 해석(interpretation)되어서는 안 됩니다.<표준새번역>
[베드로후서 3장 16절] 바울은 모든 편지에서 이런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무식하거나 믿음이 굳세지 못한 사람은 다른 성경을 잘못 해석하듯이 그것을 잘못 해석해서(twist) 마침내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표준새번역>
[고린도전서 4장 6절]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모든 일을 나 스스로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apply)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라".<표준새번역>
이들 해석에 관한 말씀들에 나타난 교훈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말씀을 해석한 사례들이 있다(눅 24:27, 32; 행 17:3, 18:26).
둘째,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전 4:6).
셋째, 성경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들도 있다(히 5:11; 벧후 3:16).
넷째,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벧후 1:20).
다섯째,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벧후 3:16).
이들 말씀들은 "해석" 또는 그와 유사한 어휘가 나타난 구절들에 불과할 뿐, 실제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해석으로 가득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나 대제사장으로 설명해야할 경우 구약 예언의 해석은 불가피하다. 복음서들이나 히브리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구체적인 사례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의 구약성경 해석 부분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Ⅱ. 신약성경 저자들은 누구인가?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하는 힘은 어디에서 왔는가? 성경저자들의 해석하는 힘은 그들의 소명감, 역사관, 세계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믿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환상(vision)에서 왔다. 이와 같은 요소들은 신약성경 저자들의 패러다임(paradigm), 즉 그들이 역사를 보고, 문제삼고, 해결해 나간 방법과 그들의 해석하는 힘의 많고 적음을 결정하는 요인이었다. 계시록 저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창조신앙의 소유자였고, 환상을 보는 묵시문학자였으며, 역사의식이 뚜렷한 신학자였고, 소명의식을 가진 목회자였다.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숭배 강요에 맞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사건들을 성찰하면서 배교의 위협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실한 믿음을 강조하였다.
소명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백성에게 전할 종으로 불렀다(called)는 자의식이다. 이 의식이 강할수록 박해나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게 된다.
역사관은 과거와 현재의 정황에 대한 철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먼저 자기 주변에서 발생되고 있는 역사적 정황에 대한 성찰이다. 현재 겪고 있는 이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이 사건과 관련해서 과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어떤 계약을 맺으셨는가, 현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으며, 그들에게 잘못은 없는가 등의 반성에서 비롯된다.[김정준, op. cit., 115-120쪽.] 성경학자들은 이 역사성찰의 전거(典據)를, 구약예언자들의 경우, 시내산 계약,[장일선, {구약신학의 주제}(대한기독교서회, 1991), 253-319쪽; {이스라엘 포로기 신학}(대한기독교서회, 1990).] 복음서 저자들의 경우,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관한 구전전승(AD 30-70), 바울의 경우, 사도전승(안디옥 교회의 전통 포함),[크리스천 베커의 {사도 바울} 장상 역(한국신학연구소, 1991), 147-175쪽.] 히브리서 저자와 계시록 저자의 경우, 구약성경[조동호, {요한계시록의 새로운 이해와 말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예수}(도서출판 가나다, 1998), 70-72쪽.]이라고 말한다. 성경저자들은 이런 전승들에 대한 철저한 해석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오늘의 역사의식의 전거는 성경저자들이 남긴 성경 66권이 된다. 특히 교회의 기초인 사도전승이 담긴 신약성경이 그렇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믿음과 미래를 내다보는 환상(vision)은 소명감이나 역사관에 못지 않게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해석하는 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해석하는 힘을 해석의 영성(interpreting spirituality)이라 부른 것인데, 이 영성의 깊고 얕은 차이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에 좌우된다는 것이 성경저자들의 주장이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는 깨달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막 8:14-38). 성경 저자들의 깨달음은 대체적으로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미쁘시다"(고전 1:9, 히 10:23),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자가 없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등이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trust)하는 믿음과 죽음을 무릅쓴 신실(faithfulness)한 믿음이 비롯되었다.
세계관은 성경저자들의 신앙관과 다름없는 것인데, 그들의 신앙관은 그들의 패러다임을 파악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들의 신앙관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이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성자 하나님을 부활의 주 하나님으로, 성령을 피조물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을 피조물 또는 부족한 죄인으로 고백하였다.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에서 성경저자들은 이 물질세계가 본래 좋은 것임을 믿었고,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질과의 관계를 계약과 책임에서 보았으며, 이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삶에 목적과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을 통해서 과학과 학문이 가능성을 보았고, 윤리적 기초를 확인하였으며, 청지기로써의 인간의 사명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을 능히 당할 자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며, 승리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은 고난에서의 승리, 십자가의 죽음에서의 부활을 말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며, 시련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시련은 있어도 결코 실패는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시련은 짧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영광은 영원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세상의 일과 빵의 문제를 걱정하기보다는 복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충성(=신실)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바로 그 해석의 영성이었던 것이다.[마가복음 8장 14-38절(요 3:1-7과 마 12:38-39 참고). 유대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세상의 일과 빵의 문제, 즉 이스라엘의 문자적 회복과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은 복음의 일과 하나님의 일, 즉 인류의 구원과 십자가를 지심에 있었다. 복음서 저자들의 영성은 유대인들의 세상의 일과 빵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예수의 복음의 일과 하나님의 일에 대한 관심의 차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이를 기술한데서 발견된다.]
Ⅲ. 신약성경 저자들은 무엇을 해석하였는가?
이 부분에서 다루고자하는 주제는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자료와 선별에 관한 것이다. 먼저 자료에 관한 부분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성경저자들이 역사성찰의 전거(典據)로 삼았던 것은, 구약예언자들의 경우, 계약전승, 복음서 저자들의 경우, 교회 안에서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구전되어진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관한 전승, 바울의 경우, 사도전승, 히브리서 저자와 계시록 저자의 경우, 구약성경이었다.
성경저자들은 이런 전승들(구전과 문서를 다 포함)에 대한 철저한 해석자들이었다. 더러는 외경을 사용한 흔적이 있지만, 이 때는 아직 정경이 형성되기 이전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와 영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석에 관한 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주된 해석의 자료는 사도전승과 구약성경이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장 1-3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개역한글>
[갈라디아서 1장 8-9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개역한글>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개역한글>
[계시록 22장 18-19절] . . . .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개역한글>
신약성경 저자들의 이런 엄격한 해석전통으로 보아 오늘의 성경해석의 자료는 성경저자들의 문서인 성경 66권이다. 특히 교회의 기초인 사도전승이 담긴 신약성경이 그렇다.
다음이 자료 선별에 관한 부분이다. 복음서 저자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교회가 설교(kerygma)와 교육(didache)를 통해서 보존해오던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전승이나 단편자료들을 수집하고, 필요에 따라 선별하여 충실하게 해석하였다. 여기서 필요란 초대교회가 내부에서 이단자들의 도전과 외부에서 물리적인 탄압을 받아 배교의 위협에 놓여있었음으로,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과 신실한 믿음을 지켜 나가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었으며, 신생 기독교의 정체성과 성장에 따른 제도 및 질서확립이 필요했던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교회의 필요를 채우는 데 있어서 예수의 말씀과 행동들은 교인들의 신앙교육에 최상의 자료가 되었던 것이다. 사도행전도 마찬가지로 초대교회의 역사전승에 대한 해석으로써 복음서 기록과 동일한 동기와 목적을 갖는다.[김득중, {신약성서 개론}(컨콜디아사, 1986), 242쪽; {복음서신학}(컨콜디아사, 1986), 9-14쪽.]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들이 예수의 어떤 점을 강조하여 부각시킬 것인지는 그들이 관심 하는 교회공동체가 누군가(정황)에 따라 결정되었고, 이 결정에 따라서 수집된 자료의 선별이 이루어졌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기적(표적)이 전반부에 일곱 개밖에 실리지 아니한 이유도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에 따라 예수의 기적들을 선별하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요한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개역한글>
[요한복음 21장 25절]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개역한글>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으로서 뿐만 아니라, 행동(사건)으로서 역사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한 그들 계시적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영감으로 도우셨다(딤후 3:16).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이 성경에 모두 다 기록된 것은 아니다. 주의 종들은 받은 바 계시를 해석하여 설교 또는 기록의 수단으로 제삼자에게 전달하였는데, 이 때 계시의 해석과 자료의 선별은 필수적이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할 점은 성경해석의 뚜렷한 사도전승의 하나는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주어진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성도들의 정황의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의 뜻을 밝혔다는 점이다. 이 점이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영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해석자들 또한 성경 66권, 특히 기독교가 세워진 사도전승이 담긴 신약성경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되며,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정신)을 밝혀내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선별된 본문(text)을 해석하고 상황화(contextualization)시키는 주석과 비평작업이 지속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성경본문(text)과 삶의 정황(Sitz im Leben)이 끊임없는 해석의 과제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Ⅳ. 신약성경 저자들은 어떻게 해석하였는가?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방법과 원칙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철저하게 주어진 말씀에 국한하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중심이었으며, 구약성경을 구속사(salvation of history)의 입장에서 모형적(typological)이고 영적(spiritual)으로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중심이었고, 성령의 영감(감동감화)에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성령중심이었으며, 성도들의 정황에서 나온 필요를 공급하는 맥락적 구약성경과 사도전승의 해석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이었다.
하나님중심과 인간중심에 관한 부분은 앞서 한 설명으로 대신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성령중심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해석의 신빙성으로 계시와 영감을 강조하였고, 기록된 내용(말씀과 사건들)의 신빙성으로 나타난 표적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성구들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개역한글>
[사도행전 2장 22절] . . . .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개역한글>
[로마서 15장 18절]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개역한글>
[히브리서 2장 4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개역한글>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방법과 원칙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구약성경을 구속사(salvation of history)의 입장에서 모형적(typological)이고 영적(spiritual)으로 해석하였다는 것과 그리스도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먼저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중심 해석이었다는 점은 저자들이 자신들의 글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부분이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개역한글>
[마가복음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개역한글>
[로마서 1장 1-4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개역한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개역한글>
[히브리서 1장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개역한글>
그 다음은 구약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중심의 모형적이고 영적인 해석이다.
모형적 해석은 히브리서 저자가 구약을 "모형"(히 8:5; 10:1), "그림자"(히 8:5; 10:1), "비유"(히 9:9), "표"(히 9:23, 벧전 3:21) 등의 어휘를 사용할 정도로 신약성경 저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해석방법의 하나였다. "모형"(copy)은 표시(sign), 형상(figure), 본(example)을 의미하고, "그림자"(shade)는 스케치, 윤곽(outline), 예시(例示)를 의미한다. "비유"는 옆에 놓는다는 뜻으로 대조, 닮음, 유사함을 의미하고, "표"는 모양 따라 조성된 것, 사본, 예표(豫表)를 의미한다. 이밖에도 "아이콘"(계 15:2)은 이미지, 형상을 의미하고, "본"(살전 1:7)은 도장 같은 것으로 찍은 표시(mark)나 형상(figure), 형태(form), 글자(letter), 모양(pattern), 활자(type)를 의미한다.[Bernard Ramm, 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5), pp. 217.]
신약성경에서 모형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며, 그 대상들로는 최초의 범죄자 아담, 율법의 전달자 모세, 예언자 엘리야, 제사와 안식일 제도, 대제사장 아론과 멜기세덱, 출애굽사건, 광야40년 유랑, 놋뱀 등이다.[Ibid., pp. 231-232.]
신약성경 저자들의 모형적 해석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마태의 경우, 예수의 생애를 모세의 생애와 모형적으로 비교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대표적인 것이 시내산 십계명과 산상수훈(8복) 그리고 10가지 재앙과 10가지 기적(마 8-9장)인데, 마태복음 전체가 다섯 개의 설교군으로 편집되어 있다. 마태는 AD 30년 예루살렘교회 창립직후부터 교회들을 통해서 설교와 교육의 내용으로 전승되어지던 예수의 어록과 활동들을 수집하고 선별하여 모세를 최고의 선지자로, 토라(율법)를 성경중의 성경으로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향해서 말씀과 행동(기적)에 있어서 모세보다 더 권위 있는 분으로 예수를 소개하였고, 개종자들에게는 복음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박해자들이었던 유대교인들과 개종했다가 유대교에 복귀하려는 자들을 설득하였다.[김득중, {신약성서 개론}(컨콜디아사, 1986), 77-94쪽; {복음서신학}(컨콜디아사, 1986), 15-41쪽.]
요한의 경우도, 모세와 출애굽 사건을 요한복음의 주제로 삼고 있어서 학자들은 요한복음을 모세 모형론(typology), 출애굽 모형론, 신명기 모형론, 유월절 모형론으로 나눈다.
모세 모형론의 경우,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 3:14)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표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인 이야기의 반영이며, 17장의 고별설교는 모세의 최후설교와 기도를 모형으로 하고 있다.[김득중, {요한의 신학}(컨콜디아사, 1994), 30-31쪽.]
출애굽 모형론의 경우,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에 나타난 배척에 관한 구절들(출 2:11, 14; 요 1:11), 뱀의 표적에 관한 구절들(출 4:4-5; 요3:14-15), 표적으로 인해서 믿음이 나타난 사실(출 4:30; 요 2:11) 등이 모형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 또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의 첫 부분이 일련의 표적들로 구성되어 있고, 두 문서가 다같이 첫 번째 표적과 두 번째 표적을 언급하고 있으며(출 4:8, 9; 요 2:11; 4:54), 두 책이 다같이 불신앙이나 완악한 마음(출 14:8; 요 12:37-40), 중재기도(출 32-33장; 요 17장), 떡에 대한 믿음(출 16:4, 15; 요 6:35), 빛에 대한 믿음(출 13:21-22; 14:20; 요 8:12), 선한 목자(출 3:1; 요 10:11)와 정체성에 관한 말씀(출 3:14; 요 6:35; 8:12; 10:9, 11; 11:25; 14:6; 15:1)을 담고 있다. 이는, 마태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세보다, 복음을 율법보다 우위에 놓고 유대인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이 모세가 이집트에서 행한 10가지 표적(재앙)보다 우월한 예수의 표적(살림)들을 7개만 선별하여 소개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요한은 모세의 10가지 재앙 가운데 개구리, 이, 파리 재앙을 제외한 7개의 재앙순서에 따라 예수의 7가지 표적들을 비교시켰다. 비교의 특징은 모세의 표적들이 재앙을 초래한 죽임의 일이었는데 반해서, 예수의 기적은 축복을 가져온 살림의 일이었다는 점에 있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와 은총을 유대교의 창시자 모세와 율법에 비교시킨 것이다. 요한복음에 안식일 논쟁과 같은 긴 주제설교가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Ibid., pp. 31-35.]
모세의 열 가지 재앙과 예수의 기적 대비
모세
예수
비교
1.
피의 재앙(7:14-24)
물로 포도주를 만듬(2:1-11)
물이 피와 포도주로 나타난 표적
2.
개구리 재앙
생략
계시록이 7을 선호하고 있고,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16:13)이 언급되어 있다.
3.
이 재앙
생략
4.
파리 재앙
생략
5.
생축 재앙(9:1-7)
백부장의 아들을 살림(4:46-54)
주인의 소유에 나타난 표적
6.
독종 재앙(9:8-12)
38년 된 병자 치유(5:2-9)
인간의 질병과 관련된 표적
7.
뇌성과우박의 재앙(9:13-35)
풍랑진압(6:16-21)
자연재해와 관련된 표적
8.
메뚜기 재앙(10:1-20)
오병이어의 기적(6:1-15)
음식과 관련된 표적(예수=생명의 떡)
9.
흑암 재앙(10:21-29)
장님 치유(9:1-41)
시력과 관련된 표적(예수=빛)
10.
장자 사망(11:1-12:32)
나사로의 부활(11:1-44)
죽음과 관련된 표적(예수=생명)
신명기 모형론의 경우, 두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그리고 제자들은 교회시대를 눈앞에 두고, 신명기에는 모세의 고별설교가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고별설교가 배치되어 있다.[Ibid., pp. 35-37.]
유월절 모형론의 경우,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어린양(1:29-34), 유월절이 가까워짐(2:13; 6:4), 성전청결(2:13-25), 유월절 희생(19:14), 피를 쏟으심(19:34), 뼈를 꺾지 아니함(19:33-36; cf. 출 12:46; 민 9:12), 히솝(우슬초, 19:29; cf. 출 12:21-22)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요한이 예수를 옛 질서의 완전한 모형이신 완전한 유월절 희생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Ibid., pp. 37-38.]
바울의 경우,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 신령한 반석으로 소개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제2의 아담 그리스도를 제1의 아담이 세상에 들여온 불행들은 바꾸어 놓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의 새로운 삶을 위한 종말론적인 아담으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서 상실된 것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찾게 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10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에, 홍해 건넘을 세례 받음으로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중심의 구약성경해석은 신약성경 저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으며, 그 자체가 바로 해석의 영성이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의 성경해석자들이 그리스도중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을 시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제 구약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에 대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이 부분은 하바드대학교 신학부에서 신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훌러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죠지 E. 라드(미주침례교 목사)가 [역사적 전천년설]에서 "해석법의 문제"를 다룬 글을 편역 하였다. Robert G. Clouse, ed., The Meaning of the Millennium: Four Views(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77), pp. 17-40.] 신약성경 저자들은 메시아 도래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어떻게 해석하였는가,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는가, 아니면, 영적으로 해석하였는가? 이 질문은 세밀하게 검토돼야 할 쟁점이다.
첫째,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자주 구약성경의 문맥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중심으로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장 15절의 호세아 11장 1절의 인용은 예수께서 이집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호세아 11장 1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가 이집트에서 나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세아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이라고 한다. 호세아의 이 말씀은 결코 예언의 말씀이 아니며,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는 역사적 언급에 불과하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를 큰아들로 인정하여, 의도적으로 역사적 진술을 예언으로 바꾸고 있다. 이것이 구약성경예언을 해석하는 하나의 원칙이었다. 구속사(salvation of history)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중심(Christ-center)의 영적해석(spiritual interpretation)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신약성경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사야서 53장에서 메시아가 당한 고난에 관한 예언을 찾고 있다. 마태는 종이 견뎌야할 고난이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이 예언을 예수께 적용하고 있다(마 8:17). 그러나 빌립은 종의 고난을 예수께 관한 것으로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말하고 있다(행 8:30-35).
어느 누가 이사야 53장이 예수께서 겪은 수난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이 말씀이 예수의 고난에 대한 예언인 것이 분명하나, 오직 사건 후에 해석되었을 때에 그러하다. 단순한 사실은 이사야 53장이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는 이것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메시아의 의미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승리자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 왕으로써 내정되어 있다. 이것이 이사야 11장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3-5).
여기 분명히 다른 묘사를 보게 된다. 메시아는 다스리고, 악을 파괴하며, 악한 자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그와 같은 승리자인 지배자가 동시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되며,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겠는가?(사 53:12) 이것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사야 53장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리스도는 정복하고 지배하기로 되어있지, 정복되고 고난받기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정복자와 지배자로 오기 전에, 먼저 천한 고난의 종으로 나타나야 할 것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두 번째 사실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고난 받은 자는 결코 그리스도나,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이름 없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문맥으로 볼 때, 수난의 종은 하나님의 종이며, 종종 이스라엘과 동일시된다.[참고. 이사야 52:13; 50:10; 49:3; 49:5; 45:3.]
종은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 모두를 말한다. 종은 이 두 개념 사이에 상호 연관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종은 그리스도나 다윗 왕국의 지배자로 불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인 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이사야서 53장의 종을 정복자 또는 구세주 메시아 왕으로 보지 않고 억눌리고 고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그 역사적 배경으로 볼 때,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아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중심의 사건에 비추어 영적으로 해석될 때에만 비로소 그러하다.
둘째,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자주 문자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문자적 해석이 통하지 않는 원칙을 분명히 세운다. 문자적으로 이사야서 53장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 아니라, 이름 없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예언은 그것들의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좀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신약교회에 적용한다는 결론과,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이 원칙이 가장 생생한 예문은 로마서 9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24절에서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환언하면,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유대인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 이방인 기독교인들이다. 이 부르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호세아에서 두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25-26).
호세아서의 이 두 구절의 말씀은 문자적 국가인 이스라엘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불순종의 백성이 순종하는 미래의 회개의 날을 본다.
그는 바다의 모래 같은 큰 무리의 남은 자를 본다. ". . .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10)고 한다.
이것은 유대인의 미래의 회심을 말한 것이다. 두 번째의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호 2:23)고 한다.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장래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이 백성은 하나님께 한 때 거절당하였다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장래구원에 대한 이 두 구절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취해서 교회에 적용하고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포함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호세아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 이것이 영적 해석이라 할지라도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며, 이것을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어떻게 적용했는가가 자명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롬 4:11). 또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불린다(롬 4:16).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갈 3: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만약 아브라함이 영적 백성의 아버지라면, 그리고 만일 모든 성도가 아브라함의 자녀요, 그의 소산이라면, 그들은 영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이라 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여기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에 대해서 말하기를, 참된 유대인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가 아니라, 오직 심령에 할례를 받은 자라야 참된 유대인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의 말씀 속에서 바울이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대부분이 이방인인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바울은 교회를 이스라엘로 부르는 것을 회피한다. 갈라디아서 6장 16절의 경우, 바울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혹자는 이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국한시키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해석상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구약성경의 배경 속에서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속하는 예언의 말씀들을 교회에 적용하고 있고, 교회를 아브라함의 자녀 또는 씨라고 부른다. 그는 신자들을 참된 할례당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바울이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로 보았다는 결론을 거부하기란 어렵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성구가 있다. 예레미야서 31장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반역자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하시는 한 날을 예언하고 있다. 이 새 언약은 그의 백성의 마음 속에 착수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에 의해서 특징지어질 것이다. ". . .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 .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렘 31:33-34).
히브리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만들어진 새 언약에 적용시키고 있다. 히브리서 8장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소개된 새 질서를 구약의 지나간 질서와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옛 것이 아닌 참된 장막 가운데서 섬기신다. 왜냐하면, 옛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히 8: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히 8:6). 왜냐하면,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히 8:7). 이 말씀들은 결점 있는 옛 언약과 예수께서 세우신 새 언약과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히 8:8). 즉 하나님께서 옛 질서 아래서 이스라엘의 잘못을 찾았고,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언약의 말씀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이 새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8장 8-12절은 예레미야서 31장 31-34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이 그리스도 교회인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새 언약 즉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가능하게된 새 언약을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구약성경에 대해 말하면서 히브리서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며, 첫 것은 낡아지게(희미)하는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고 말씀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존재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66-70년 사이에 유대전쟁으로 파괴되었는데, 히브리서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의 옛 질서는 끝났다고 히브리서는 선포한다.
시대구분론자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예수의 지상재림과 동시에 유대인들의 왕국인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며, 그 때에 유대인의 성전이 재건되며, 전체 희생제사 체제가 다시 제정된다고 에스겔서 40-48장의 예언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이 희생제사가 그리스도께서 드린 희생제사를 회고하고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John Walvoord, The Millennial Kingdom, p. 312.] 그러나 기념적이던 실질적 재건이던 어떠한 형태의 구약의 희생제사 체제의 재건도 히브리서 8장 13절의 말씀과는 반대된다. 히브리서 8장 13절의 말씀은 "옛 것은 낡아지고 없어져 가는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8장 8-13절의 말씀은 구약예언의 문자적 해석을 두 가지 점에서 반박한다.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예언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한다는 것과 없어져야 할 운명의 구약의 희생제사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는 주장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의 주요한 요점은 구약시대에 역사적으로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많은 예언의 말씀들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리스도의 초림이 구약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의해서 예견한 방법으로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약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성취된다는 피할 수 없는 지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방법과 원칙의 핵심은 구약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중심의 모형적이고 영적인 해석이었다.[이런 맥락에서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구약성경이 탄생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지를 제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이 말하는 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르게 읽는다면, 그는 구약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정훈택, {신약개론}(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15쪽>].
Ⅴ. 그들은 왜 해석하였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신약성경저자들의 해석의 목표(목적)를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성경 저자들의 목표는 분명하고 뚜렷하다. 예수 믿고(trust), 인내하며, 신실하게(faithful) 믿음을 지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누가는 복음서 1장 4절에서,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요한은 복음서 20장 30-31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으며,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함이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저자는 6장 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저자는 기독교에 개종했던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후퇴하는 상황에서 구약성경을 풀어 신뢰와 신실함으로의 "믿음과 인내"(6:12; 10:36)를 강조하였는데, 11장에서 구약의 인물들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지 못하고, 고난을 당하여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을 버리는 성도들을 향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에게 닥치는 문제는 그들의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리고 바라는 바를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지 못할 때에 믿음을 버리고 배교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바라던 바를 이루었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는가, 또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바를 성취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엄청난 극형을 받고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신실하였는가를 구약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계시록의 저자도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의 강요 속에서 고난받고 고통 당하는 당대의 신앙인들에게 "믿음과 인내"(계 13:10; 14:12)[계시록은 2-3장에서 "이기는 자"에 대한 강조를 일곱 교회들에 하고 있고, 그 밖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를 촉구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충실하게 해석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던 구원의 하나님, 보응의 하나님,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보다 큰 뜻과 섭리 속에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trust)와 신실함(faithfulness)을 성도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신약성경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성경 해석자들도 동일한 해석의 목표(목적)을 갖는다. 그것은 사도전승이 담긴 신약성경을 규범으로 삼고, 구약성경과 다른 보충자료들의 도움을 받아 주어진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이 해석의 말씀은 해석자의 자의적인 것이 아닌, 섬기는 공동체의 필요와 정황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어떤 점을 강조하여 부각시킬 것인가는 해석자가 관심 하는 교회공동체가 누군가(정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성경해석의 근본목적은 말씀을 듣는 자들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으며, 신실한 믿음을 갖게 하는데 있어야 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결어
이제까지 우리는 기독교가 신약성경 저자들의 성령의 영감에 의한 구약성경과 사도전승의 해석에서 비롯되었으며, 피할 수 없는 신학의 과제였고, 이미 초기부터 해석의 문제가 있었다는 근거에서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영성을 살펴볼 수 있었고,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첫째,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하는 힘은 그들의 소명감, 역사관, 세계관,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믿음,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환상(vision)에서 왔다. 여기서 해석하는 힘은 세상의 일과 빵의 문제를 걱정하기보다는 복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충성(=신실)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해석의 영성을 말한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와 영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해석에 관한 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주된 해석의 자료는 사도전승(예수의 말씀과 행동들)과 구약성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주어진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였으며, 성도들의 삶의 정황에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혔다.
셋째,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방법과 원칙은 철저하게 주어진 말씀에 국한하였다는 점에서 하나님중심이었으며, 구약성경을 구속사의 입장에서 모형적이고 영적으로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중심이었고, 성령의 영감에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성령중심이었으며, 성도들의 정황에서 나온 필요를 공급하는 맥락적 구약성경과 사도전승의 해석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이었다.
넷째, 신약성경 저자들의 해석의 목표(목적)는 예수 믿고, 인내하며, 신실한 믿음을 지켜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가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어떤 방향지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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