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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5-28 20:48
히브리서의 유대교 이해에 관한 고찰(Part I)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5,421  
히브리서의 유대교 이해에 관한 고찰
A Study on Hebrews‘ Understandings about Judaism


조동호(한민대학교 부교수)

목차
들어가는 말
I. 총론
1. ‘희망’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2. ‘언약,’ ‘약속,’ ‘예언’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3. 히브리서의 모형론
4. ‘안식’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5. 히브리서의 권면
II. 히브리서의 장별 해설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2. 각 장(章)에 나타난 차이점
나오는 말
참고자료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의 목적은 히브리서 저자가 유대교를 이해한 방법과 해석의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고,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다른 점,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유대교와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데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이들이 구약성서를 신약성서와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으로 알고, 그 차이점을 모르고 있어서 신약성서의 기독교가 구약성서의 기독교로 변질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현실에서 현대 기독교에 시급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일은 신약성서 기독교회를 회복하는 일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면, 21세기의 종교개혁은 ‘신약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어야 한다.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한 방법을 밝힘으로써 신약성서 기독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작은 힘이라도 보탰으면 하는 것이 본 논문을 쓰는 동기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유대교인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한 방법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또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서는 ‘약속의 땅,’ ‘본향,’ ‘예루살렘과 시온,’ '안식,‘ ‘모쉬아크’ 등에 대한 유대인들의 입장을 히브리서의 입장과 비교함으로써 그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I. 총론

히브리서는 장별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1장과 3장에서 각각 천사보다(1장) 또는 모세보다 뛰어난 예수님(3장)을 소개하였고, 이어서 2장부터는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형님과 오빠이신 예수님’(2장),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4장),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5장), ‘우리를 위해 앞서가신 예수님’(6장),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님’(7장),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8장)을 소개하였으며, 계속해서 ‘구약예법과 성막’의 한계점과 문제점을 지적한 후에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9장),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님’(10장), 그리고 ‘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님’(11장)을 소개하였으며, ‘오름의 행진의 방향’과 ‘장차올 좋은 것’(11장)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12장), ‘영원히 한결같으신 예수님’(13:8),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13:12),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13:20)을 차례로 소개하였다.

1. ‘희망’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이러한 예수님 소개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처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과 바벨론유배 전후에 예언된 메시아와 신정국가 도래에 대한 오래 묵은 희망 때문이다. 유대교인들은 그 희망을 ‘하티크바’(Ha-Tikvah)라 부른다.[각주1] 그리고 그 희망을 이룰 불세출의 지도자, 제2의 모세를 ‘모쉬아크’(Moshiach)[각주2]라 부른다. 그리고 그가 장차 예루살렘 시온성에 세울 신정국가를 ‘올람 하바(Olam Ha-Ba)’[각주3]라 부른다. 유대교인들은 이 때 흩여졌던 모든 유대인들이 본향에 돌아오게 되고, 토라(Torah)[각주4]와 성전중심의 유대교예배가 재건되며,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던 안식을 얻게 된다고 믿는다.[각주5]
히브리서는 이런 유대교인들의 숙원을 기독교의 독특한 희망에로 재해석하고 있다. 히브리서 이해의 핵심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실체와 그림자,’ 혹은 ‘원형과 모형’으로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것이다. 유대교인들이 바라는 ‘그 희망’의 내용들은 땅의 것이고, 유한한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고, 장차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한 것이며, 기독교인들의 희망은 하늘의 것이고, 무한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고, 장차올 좋은 것들의 실체와 원형임을 밝힌다. 이 땅에는 우리가 찾는 진정한 안식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이 땅에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쟁취해야할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따라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땅의 것을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것을 바라볼 것인가, 유한한 것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무한한 것을 추구할 것인가, 일시적인 것에 착념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것에 착념할 것인가, 그림자와 모형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실체와 원형을 쫓을 것인가를 바르게 생각하고 선택할 것을 힘줘서 권면한다. 한번 잘못 선택하면 회복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한다. 그 예로써 에서가 땅의 것, 유한한 것, 일시적인 것의 상징인 팥죽 한 그릇에 하늘의 것, 무한한 것, 영원한 것의 상징인 장자축복의 상속권을 포기한 후에 크게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던 점을 소개한다.
둘째는 장차 나타날 구원자 제2의 모세에 대한 이해의 차이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모쉬아크’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써 마지막 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자를 뜻한다. 그러나 모쉬아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救世主)가 아니고, 죄가 없으신 신적(神的) 존재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쉬아크가 다윗 왕의 후손인 위대한 정치 지도자일 것이고, 유대법에 정통하여 그것의 계명들을 지킬 것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본보기를 따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위대한 군사 지도자일 것이고, 의로운 결정을 내릴 위대한 재판관일 것이지만, 이 모든 것 위에 그는 인간일 것이고, 신적 혹은 반신적 존재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각주6]
그러나 히브리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면서 그분의 우월성이 천사보다, 모세보다, 또는 아론계열의 그 어떤 대제사장들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다. 특히 7장에서는 예수님을 아론계열의 대제사장들과는 별다른 대제사장으로, 육신에 속한 연약하고 무익하며 폐지된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의 맹세로 된 대제사장으로, 그 직분이 영원히 보장되어 인류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하늘보다 높이 되신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고, 바벨론유배 전후에 예언자들이 메시아와 신정국가 도래를 예언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진정한 의미와 뜻이 문자적인 가나안 땅, 문자적인 제2의 모세, 문자적인 유대왕국회복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장차올 더 좋은 것, 영적이고 영원한 것, 이 땅의 것보다 더 좋은 저 하늘의 것,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뛰어나시고, 다윗과 알렉산더보다 더 훌륭하시고, 아론계열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월등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선지자와 만왕의 왕이 되시고, 영원한 멜기세덱계열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하늘의 성막과 하늘의 왕국과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은 이방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의 백성이 되는 것, 유대민족과 유대왕국의 경계를 뛰어넘는 세계적이고 우주적이며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것으로 재해석한다.

2. ‘언약,’ ‘약속,’ ‘예언’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유대교인들의 희망, ‘하티크바’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는 세 가지 단어들, ‘언약,’ ‘약속,’ ‘예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언약’(covenant)이란 말은 출애굽기 24장에 기록된 ‘시내산 언약’을 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유대교인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토라’(torah)는 시내산 언약의 내용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 언약을 자기 민족의 판단잣대로 삼아 활동한 예언자들의 글이 예언서들이기 때문에 시내산 언약은 구약성서 39권의 핵심이자 이해의 중심이다.[각주7]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시내산 언약’을 짐승의 피로 맺은 흠 있는 ‘옛 언약’으로 단정 짓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영원하고 무흠한 ‘새 언약’을 소개한다.
‘약속’(promise)이란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을 말한다. 물론 성서에는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 말고도 다른 약속들이 많지만, 신구약성서이해의 중심을 차지하는 약속개념은 가나안 땅이다.[각주8]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고, 떠돌이였다는 것과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고, 노예와 떠돌이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안식을 얻게 하셨다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각주9]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떠돌이와 유배의 삶은 지금까지도 수천 년에 걸쳐서 지속되고 있어서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은 한 맺힌 것이자, 안식의 상징이며, 문자적으로 팔레스타인 땅, 예루살렘 시온에 제한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시온에로 오름’(ascension to Zion)은 지금도 계속 추진되고 있다. 여전히 유대인들의 3분의 2정도가 그들이 ‘유배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땅이 아닌 이국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0] 신약성서도 ‘약속’의 개념을 자주 언급하였다. 구원의 내용으로 약속되어지고, 그 약속의 보증금과 인감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 ‘기업’(땅)[각주11]과 ‘후사’(상속자)[각주12]만하더라도, 약속의 땅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 약속의 땅을 팔레스타인 땅[각주13], 예루살렘 시온으로 보지 않고, 하늘 가나안 땅, 하늘 예루살렘 시온에로 오름을 강조한다. 지상의 가나안 땅에서는, 비록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일지라도, 인간에게 안식과 평강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prophecy)은, 물론 다른 예언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바벨론 유배이후에 발전된 ‘장차올 메시아’와 ‘장차올 세상’(올람하바) 곧 ‘회복될 이스라엘 나라’에 관한 것이다. 이 시대의 예언자들은 두 가지 내용으로 활동하였다. 첫째가 회개운동이고, 둘째가 회복운동이었다.[각주14] 예언은 이 두 번째 회복운동에 관련된 것이고, 이 운동의 내용 속에 메시아가 세울 신정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고, 당연히 이 예언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믿는다.[각주15]

3. 히브리서의 모형론
그러나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였고,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론에서는 구약성서내용을 신약성서내용의 모형과 그림자로, 신약성서내용을 구약성서내용의 실체와 원형으로 설명하였다.
히브리서에는 영원한 천상의 세계와 일시적인 지상세계로 되어 있는 수직적 이원론과 현세와 내세로 된 종말론적 이원론이 드러나 있다. 이 가운데 수직 또는 공간적 이원론은 참 이데아의 세계와 그림자의 세계라는 플라톤 사상이 반영된 것이며, 히브리서 신학사상의 핵심이다. 신약성서의 대표적인 해석인 모형론(또는 유형론, typology)이 여기서 나온다. 먼저 있는 것은 나중 있을 더 좋은 것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며, 나중 있을 것은 먼저 있는 것의 원형이며 실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예법과 성막’(9:1)은 신약의 가르침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요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구약의 예법과 성막의 원형이요 실체인 것이다.
히브리서가 구약의 예법과 성막을 “모형”(ὑπόδειγμα, 8:5; 10:1), “그림자”(σκιά, 8:5; 10:1), “비유”(παραβολή, 9:9), “표”(ἀντίτυπος, 9:23, cf. 벧전 3:21)라고 하였을 만큼 신약성서 저자들 사이에서 모형론은 일반적인 구약해석의 한 방법이었다.[각주16] “모형"(ὑπόδειγμα=copy)은 표시(sign), 형상(figure), 본(example)을 의미하고, ”그림자“(σκιά=shade)는 스케치, 윤곽(outline), 예시(例示)를 의미한다. “비유”(παραβολή)는 옆에 놓는다는 뜻으로 대조, 닮음, 유사함을 의미하고, “표”(ἀντίτυπος)는 모양 따라 조성된 것, 사본, 예표(豫表)를 의미한다. 이밖에도 “아이콘”(εἰκών, 계 15:2)은 이미지, 형상을 의미하고, “본”(τύπος, 살전 1:7)은 도장 같은 것으로 찍은 표시(mark)나 형상(figure), 형태(form), 글자(letter), 모양(pattern), 활자(type)를 의미한다.[각주17] 신약성서에서 모형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며, 그 대상들로는 최초의 범죄자 아담, 율법의 전달자 모세, 예언자 엘리야, 성막과 제사와 안식일 제도, 아론계열의 대제사장, 출애굽사건, 광야 40년 유랑, 놋뱀 등이다.[각주18] 이상의 차이점들을 구분할 수 있을 때, 히브리서가 유대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했는가를 알 수 있다.

4. ‘안식’에 관한 히브리서의 이해
유대교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이다. 유대교인들에게 안식은 특별한 개념이다. 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엄하게 지킨 이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가 넘는 상식을 초월한 안식일 법들을 만들어서 지킨 이유가 그들의 오랜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절실하게 안식이 필요했다.
유대교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이 오랜 유랑 끝에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다. 홍해를 건넌 후 사막에서 40년을 살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기나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얻게 되는 가나안 땅, 나라 없이 떠돌던 서러움을 한 순간에 씻어버린 가나안 땅의 진입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진입은 오랜 고난과 시련에 종지부를 찍고 얻는 안식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희망(하티크바)의 땅이요, 하나님이 점지하신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이다. 이 가나안 땅에 오름(aliyah)[각주19],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이다.
그러나 유대교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땅 중심적이었다. 그것은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었고, 육체노동의 쉼과 모든 창조활동의 중지를 의미하였다.[각주20] 그래서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의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중심적인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승화시켰고,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켰다. 또 무덤상황 곧 흑암과 혼돈과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활의 삶을 안식의 개념으로 취했다. 일하지 않는 육체의 쉼보다는 참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쉼을 의미하였다.
인간에게 참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막힌 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의 길과 오직 믿음과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육적인 복은 물론, 더 좋은 영적인 복까지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이시며, 참 안식을 주시며,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나타나실 분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장래에 좋은 일들을 엮어 주시는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도들의 꿈과 희망을 이뤄주실 분도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체가 되고, 실상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것들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의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상이 된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비록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르는 무모한 것일지라도, 끝내 이기고 약속의 증거를 손에 넣게 할 것이고,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할 능력이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할 지혜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나아가 도달할 곳은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도들의 오름의 행진과 방향은 저 팔레스타인 땅의 시온산과 예루살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또 성도들이 도달할 곳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보좌하는 네 케루빔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과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도열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을(계 9:12) 쉼 없이 돌려보내는 곳이다. 또 그곳은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그곳에 오르는 날,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천사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승리자로서 월계관을 받아쓰게 될 곳이다.

5. 히브리서의 권면
히브리서는 열일곱 차례나 ‘하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4장에서 다섯 번 쓰고 있는데,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1,11절). 신앙을 굳게 지키자(14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자(16절).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자(16절)고 했고, 6장에서 한번 초보단계에서 벗어나자(1절)고 권했다. 10장에서 네 번에 걸쳐 하나님께 나아가자(22절). 신앙을 굳게 잡자(23절). 서로 격려하자(24절). 모이기를 힘쓰자(25절)고 했으며, 12장에서도 네 번에 걸쳐 인내로써 경주하자(1절). 예수님을 바라보자(2절). 감사드리자.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자(28절)고 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3장에서 세 번 예수님이 겪으신 치욕을 짊어지자(13절).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 입술의 열매를 드리자(15절)고 권했다.
히브리서는 믿음과 인내에 관한 글이다. 히브리서 10장 26-39절은 기록목적에 부합한 글이다. 내용은 이렇다. 진리의 지식을 얻은 뒤에 일부러 죄를 지으면, 그 때에는 속죄 제사가 남아 있지 않다. 믿음과 인내를 보이지 못하고 배신했을 때, 남은 것은 무서운 심판과 그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이다. 하나님을 처음 믿고, 구원의 빛을 받은 뒤에 그 숫한 고난의 싸움을 견디고 이긴 첫 사랑의 때를 회고해 보라. 그 시절에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고, 동일한 처지에 놓인 교우들의 동반자가 되며,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재산몰수를 당하고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일을 기쁨으로 당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이다. 믿음이 있는 행동은 한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참고 인내하며 용기 있게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나서, 약속하신 큰 상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수고를 마치고 인내의 결실을 맺을 때가 멀지 않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다. 그분은 결코 지체치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10:35-37). 우리 성도들이 붙들고 놓지 아니한 그 희망과 믿음의 끈이 결국에는 우리를 인생의 미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에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II. 히브리서의 장별 해설

1.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
히브리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교에 관한 해설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양이 매우 많기 때문에 뒷부분으로 옮겨서 살펴보겠고, 본 장(章)에서는 히브리서의 장별 해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만을 우선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라는 유명한 유대인 신학자가 19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를 구원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의 메시아가 분명히 미래에 오실 것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각주21] 또 󰡔두 형태의 신앙󰡕(Two Types of Faith)에서는 기독교가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믿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futuristic eschatology)을 믿고 있다고 했다.[각주22] 부버가 언급한 이 두 개의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민족에게는 영적구원(종말)이 없고, 육적구원(종말)만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구원과 그의 재림 시(時)에 육적 완성이 이뤄질 것을 말하는데, 부버는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대(大) 구원(초기구원)이 이뤄졌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그 구원이 완성된다고 본 것이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이미 실현된 구원의 확신, 곧 종말에 주어질 축복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누리는 영적인 축복이 있는 반면, 유대교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데, 유대교인은 미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유대교인에게는 ‘이미’가 없고, 오직 ‘아직’만이 있을 뿐이다.
유대민족의식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구원은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이미 이뤄진 것이고, 이 사건이 대(大) 구원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유대민족이 고대하는 올 세계(‘올람 하바’, Olam Ha-Ba 곧 world to come)의 도래, 곧 이스라엘 국가의 궁극적인 완성이자, 제2의 출애굽사건을 주도할 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왕이 오시면 이스라엘 국가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은 기대하던 메시아가 아직도 오지 않았고, 세상 끝 날에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같은 내용이 포함된 기도문 「쉐모네 에스레이」를 매일 세 차례씩 암송한다.[각주23]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란 말 대신에 ‘모쉬아크’(Moshiach)란 히브리어를 쓴다. ‘메시아’가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각주24]
‘모쉬아크’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써 마지막 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될 자를 뜻한다. 그러나 모쉬아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救世主)가 아니고, 죄가 없으신 신적(神的) 존재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쉬아크가 다윗 왕의 후손인 위대한 정치 지도자일 것이고, 유대법에 정통하여 그것의 계명들을 지킬 것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일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본보기를 따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 위대한 군사 지도자일 것이고, 의로운 결정을 내릴 위대한 재판관일 것이지만, 이 모든 것 위에 그는 인간일 것이고, 신적 혹은 반신적 존재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각주25]
모든 세대에서 사람은 모쉬아크가 될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만약 그 사람이 살아서 활동할 때에 메시아시대에 적절한 때가 도래한다면, 그 사람은 모쉬아크가 될 것이지만, 만약 그 사람이 모쉬아크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 사람은 모쉬아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각주26]
일반적으로 모쉬아크는 (세상이 죄로 넘쳐서) 그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나 (세상이 심히 좋아져서) 가장 합당한 때로 여겨지는 시기에 오시게 될 것이라고 믿어진다. 모쉬아크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킴으로써 정치적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며, 이스라엘에 한 정부를 세울 것이고, 그것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전 세계 정부의 중심에 세울 것이며, 성전을 재건할 것이고, 성전예배를 다시 세울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법정 체계를 회복시킬 것이고, 나라 법으로써 유대법을 세울 것이라고 믿는다.[각주27]
이때의 세계를 유대문학에서 ‘올람 하바’(Olam Ha-Ba), 곧 다가올 세계라 부른다. 올람 하바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이며(사 2:4), 모든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이 유배되었던 나라들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며(사 11:11-12, 렘 23:8, 30:3, 호 3:4-5), 희년법이 다시 효력을 갖게 되고, 전 세계가 유대인의 하나님을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유대종교를 유일하고 참된 종교로 인정하게 될 세계라는 것이다(사 2:3; 11:10; 미가 4:2-3; 슥 14:9). 이 세계에서는 살인, 약탈, 경쟁과 질투는 사라질 것이고, 죄도 없어질 것이다(습 3:13). 희생제물은 성전에서 계속 드려질 것이나 제물들은 감사예물에 국한될 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물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각주28]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유대민족에게는 출애굽사건에서 시작해서 모쉬아크 사건에서 완성되는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과 완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성도들이)가 성령의 능력가운데서 영적으로 시작되는 구원으로 출발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육적으로 완성되는 구원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 능력가운데서 영적으로 시작되는 구원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뤄지는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써 약속과 인침과 보증과 선취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또한 ‘칭의’라 부른다. 약속과 인침과 보증과 선취란 그리스도의 재림 시(時)에 완성될 육적 구원(성도들의 육체부활과 우주의 회복인 새 하늘과 새 땅), 곧 종말에 이뤄질 축복들을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약속받고, 인침(도장) 받고, 보증(선수금) 받고, 맛보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미’ 이뤄진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된 종말론 혹은 시작된 종말론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것들이 유대교에는 없다. 이와 같은 축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인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출애굽사건으로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란 것은 메시아가 가져오실 하나님의 왕국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요, '아직'이라는 말은 완성될 하나님의 왕국이 아직 소망 가운데 있다는 뜻인데, 유대인들은 ‘아직’만 믿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유대인들의 신앙에는 현재구원이 없고, 오직 미래구원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뤄진 구원을 맛보며, '아직' 이뤄지지 아니한 것을 은혜 가운데서 희망하는 것이다.

2. 각 장(章)에 나타난 차이점
히브리서가 기록된 일세기 후반기를 살던 유대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고나서도 유대교와 유대공동체와의 고리를 끊지 못한 자들이 많았고, 그들의 박해를 견디지 못해서 유대교에로 복귀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자들에게 왜 그리스도께서 새롭고 산길인지, 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지, 왜 그리스도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한 존재인지, 그리고 왜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에서 희망하는 그리스도보다 우월한지, 또는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밝혀주려고 하였다. 특히 유대인들이 부정하고 믿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외쳤다.
히브리서는 모형론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신성(神性) 메시아이신 것을 변증한다. 모형론이란 새것을 옛것에 비교하거나 천상의 것을 지상의 것에 비교하는 방법인데, 옛것이나 지상의 것은 새것과 천상의 것의 그림자이거나 모형일 뿐이고, 새것과 천상의 것이 참인 실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구약, 모세, 율법, 성막예배와 같은 옛것들은 실체요 새것인 신약, 예수님, 복음, 기독교예배의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한 것이고, 사라지고 말 것들이란 것이다. 참과 실체와 새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흠 많은 옛것을 버리지 못하고 새것을 거절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란 것이다.

1장 천사보다 뛰어난 예수
히브리서 1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전달코자 하실 때에는 예언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이 달빛처럼 희미하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자기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또 예수님은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던 분이시며, 천사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게 되셨으며, 천사들보다 더 뛰어난 이름을 물려받으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태양빛처럼 밝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전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빛처럼 희미한 율법에 우리가 목숨을 내맡겨야겠는가? 아니면, 태양빛처럼 명확하고 분명한 복음에 목숨을 내맡겨야겠는가? 예언자들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중에 누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전달했겠는가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언급한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뛰어난 예언자란 것이다.
천사들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시중들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도록 파견된 일꾼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그 누구와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뛰어난 분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믿지 않고 다시 옛날의 모습에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일생일대의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2장 형님과 오빠이신 예수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처럼 죽음을 맛보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9절), 예수님은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이 되셨지만, 죽음을 겪으셨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고,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처럼 죽음을 맛보신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동생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10절),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처럼 죽음을 맛보신 목적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많은 남녀 동생들을 영광에 이끌어 들이기 위함이다.
셋째(11-13절),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 모두 한 가족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들을 자기의 남녀동생들로 주신 하나님을 찬미하며, 신뢰할 뿐 아니라, 그의 동생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신다.
넷째(14-15절),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처럼 죽음을 맛보신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들, 곧 예수님의 동생들이 피와 살을 가진 육신들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진 육신이 되실 필요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신 또 다른 이유는 죽음을 경험하심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를 멸하여 평생 죽음의 공포에 눌려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섯째(16-18절),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낮아져 인간처럼 죽음을 맛보신 목적은 천사들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을 도와주시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분의 동생들과 같아져야했고,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 동생들의 죄를 대속시키려 했다. 또 예수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동생들을 넉넉히 도울 수가 있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난 예수
유대인들은 모세의 영도로 이뤄진 이집트 탈출을 대 구원사건이라고 부른다. 가나안 땅에 히브리 민족의 나라가 서게 되고, 다윗왕조가 세워졌지만, 2대만인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게 되고, 이후 대국들의 침략으로 패망의 멍에와 쇠사슬에 묶인 채 또 다시 노예로 끌려가 수백 년이 걸린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모세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이미 이집트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했다는 해석도 있고, 그 절반인 215년간 종살이를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각주29] 아무튼 기나긴 속박의 세월이다.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세월치고 너무나 긴 세월이다. 이집트 탈출 후,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국가를 세운 후에 이스라엘 국가의 영화는 1,000년을 넘지 못한다. 솔로몬 사후에 세워진 북이스라엘은 모세이후 5백여 년 만에 앗수리아의 공격을 받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고(주전 722년), 남유다도 모세이후 7백여 년 만에 바벨론에 패망한 후로(주전 586년) 또 다시 수백 년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으며, 1948년 5월 14일 건국[각주30]을 선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2,500년이나 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집트 탈출과 같은 제2의 대 구원사건을 눈물겹게 기다려왔고, 그 때를 제2의 모세, 곧 메시아가 나타나는 때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같이 왕권과 신권을 가진 예언자가 메시아의 자격을 가진 자로 보게 되었고, 그가 나타나면,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이 세워지고, 성전예배가 재건되며,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세계통합이 이뤄져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세상이 온다고 믿었다. 이것이 히브리서 2장에 언급된 ‘오는 세상’ 곧 ‘올람 하바’(Olam Ha-Ba)이다. 이 새로운 세상은 영적인[각주31] 동시에 물질적인 세상이다. 비록 팔레스타인에 세속주의 이스라엘 국가가 건국된 지 60여년이나 되었지만, 정통 보수주의 유대교인들은 메시아가 출현할 때까지는 진정한 이스라엘 국가, 곧 영적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이스라엘 국가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각주32] 이토록 ‘오는 세상’에 대한 유대인들의 희망 곧 ‘하티크바’가 뼛속깊이에까지 사무치다보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에 입문했다가도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고, 더 큰 이유는 예수님이 세운 나라가 물질세계가 아니라 영적세계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메시아관과 메시아가 세울 나라의 성격만 바꿔 생각하면 쉽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을 수 있지만, 현세에서는 물론이고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도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혜택과 역할이 주어지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방인들과 전혀 차별이 없다는 점에 이르게 되면, 심하게 흔들리게 되어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주장이 그만큼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드리기 힘든 부분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죄수가 메시아라고 하니까, 수용하기가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선민의식, 특권의식,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 그들의 유익을 빼앗아 이방인들에게 고르게 나눠주는 식의 기독교만인평등사상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주장을 퍼뜨리고 다니던 바울이 죽이도록 미웠고, 그의 만인평등설에 자극되어 썰물 빠지듯이 기독교로 옮겨간 헬라인 개종자들이[각주33]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바울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자였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유대사상 중의 하나가 안식이다. 유대인들은 오랜 노예생활에 지쳐있던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그들에게 가정과 나라는 안식처이다. 따라서 가나안 땅은 안식처의 상징이다. 비록 그 땅이 쓸모가 많지 않은 버려진 땅들이고, 산악지역들이고, 사막지역들일지라도, 그곳이 내 땅이고, 내 조국이고, 노예상태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 살 수 있는 나라란 점에서는 명백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런데 그들의 꿈이 결코 지중해 연안의 불모지 같은 곳에 토지 장만하고 집짓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유대인들의 꿈은 그보다 훨씬 원대하고 커서 세계를 다윗의 깃발아래 두고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 꿈의 소유자들에게 히브리서 3장은 그 꿈을 포기하고,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편협한 민족주의와 배타적 선민사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없다. 오히려 끊임없이 갈등과 분쟁과 전쟁만을 촉발시킬 뿐이다.
유대인들이 땅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자기 집 없이 너무 오랜 세월동안 셋방살이 전세살이 한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그곳이 불모의 땅일지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소중한 땅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땅이 그들에게 행복을 주고, 평화를 주고, 기쁨을 주고, 안식을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땅에 대한 집착은 과거 60년[각주34] 동안 그들에게 끊임없는 분쟁과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3장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과 감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집중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수박겉핥기 식으로 생각지 말고 정말 진지하게 한번쯤 깊이 심사숙고해 보라는 것이다.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4장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
유대사상 가운데 중요한 테마가 안식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은 특별한 개념이다. 그들이 그토록 안식일을 엄하게 지킨 이유, 상황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가 넘는 상식을 초월한 안식일 법들을 만들어서 지킨 이유가 그들의 오랜 유배생활과 무관하지 않다.[각주35] 그들에게는 그 어떤 사람,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절실하게 안식이 필요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안식의 원형(prototype)은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이 오랜 유랑 끝에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다가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다. 홍해를 건넌 후 사막에서 40년을 살다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한다. 기나긴 세월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얻게 되는 가나안 땅, 나라 없이 떠돌던 서러움을 한 순간에 씻어버린 가나안 땅의 진입이었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진입은 오랜 고난과 시련에 종지부를 찍고 얻는 안식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흩여져 사는 유대인들의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은 이방인들의 눈으로 볼 때, 불모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젖과 꿀이 흐를 수 있는 희망(하티크바)의 땅이요, 하나님이 점지하신 땅이요, 약속의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영원한 안식처이다. 이 가나안 땅에 오름, 이것은 분명 유대인들의 집단무의식이자 원형이며, 끈질긴 집념이면서 절대 신앙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이 원형에, 그들의 집단 무의식에, 그들의 끈질긴 집념에, 그들의 절대 신앙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 기독교이다. 유대인들의 안식개념은 지나치게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땅 중심적이었다. 그것은 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이었다. 유대인들의 민족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중심적인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 기독교이다. 유대인들의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안식개념을 내세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집트 탈출, 홍해도하, 광야생활, 요단강도하, 가나안정복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영토 중심적이고, 지나치게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집트 탈출을 죄악과 사단의 억압에서의 탈출로, 홍해도하를 침례 받음으로, 광야생활을 지상에서의 교회생활로, 요단강도하를 육체의 죽음으로, 가나안 땅의 진입을 천국에 들어감으로 내세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승화시켜 안식개념을 우주적이고 탈민족적인 포용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육체노동을 마치고 잠시 쉬는 일시적인 유대교적 안식개념을 버리고, 무덤(흑암, 혼돈, 죽음)의 상황을 박차고 일어나는 부활정신, 부활신앙, 부활의 삶을 안식의 개념으로 취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노동으로부터의 쉼을 강조하는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나오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제칠 안식일 즉 토요일 안식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 안식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진정한 쉼을 주는 참 안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안식은 '일하지 않는다.'는 육체의 쉼보다는 '참 평안을 누린다.' '해방을 만끽한다.' '자유를 누린다.'와 같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쉼을 의미한다.

5장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뒤를 돌아본다는데 있었다. 과거 모세시대에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간을 사막에서 머물렀는데, 그 기간이 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그리워하였고, 참혹했던 그 때의 생활을 동경하여 되돌아가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이 사막에서 겪었던 생활은 잠시 받는 고난이었지, 억압을 당하는 생활은 아니었다. 현재보다 더 잘살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 잠시 받는 시련이었지, 그것이 결코 불행이거나 재앙은 아니었는데도, 히브리인들은 당대의 고난이 장차 올 영광에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를 탈출하여 긍정과 가능의 밝고 환한 동굴바깥 세계를 맛보았던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삶을 동경하여 부정과 불가능의 동굴 속 어두운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과 같았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이런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떠나온 유대교를 못내 잊지 못하고 자꾸만 그곳을 향해서 뒤돌아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불행인가를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 불행은 마치 롯의 아내가 떠나온 소돔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당부를 잊고 뒤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던 것과 같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12:1)해야 할 성도에게 당부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뒤를 돌아보지 마라. 떠나온 세계, 떠나온 놀이와 문화, 떠나온 습관, 떠나온 지식과 종교에 대한 향수를 버려라. 그것들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다. 그 길을 돌아보지 마라.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라. 그는 우리를 영원히 살릴 새롭고 산길이다. 그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하실 하늘에 오르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5장 11-14절에서 뒤를 돌아다보는 자들을 일컬어 ‘듣는 것이 둔한 자들’ 곧 ‘더디 배우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배움의 시간으로 봐서는 뒤를 돌아보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할 자들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할 자들이 되었고, 갓난아이처럼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6장 우리를 위해 앞서가신 예수
히브리서 6장 9-20절에는 행위, 사랑, 믿음, 오래 참음, 약속, 맹세, 영혼의 닻과 같은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을 하실 때, 히브리서 6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했다. ‘맹세’란 것이 무엇인가? 16절에서 ‘맹세’는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확정이다.”고 하였다. 18절을 보면,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도 없고, 변할 수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반드시 성취된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6장에 ‘소망’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아브라함의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겠는가?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이 아니겠는가? 맹세로써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인들의 소망의 근거도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9절을 보면, 우리 가운데 있는 소망은 안전하고 확실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다. 닻은 바다에 떠있는 배가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소망들은 ‘영혼의 닻’처럼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앞서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확고히 신뢰하자고 말한다. 18절에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변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한다면, 큰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7장 하늘보다 높이 되신 예수
멜기세덱이 레위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멜기세덱은 히브리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의와 평강의 왕’이신 메시아의 모형이다. 둘째, 멜기세덱은 그의 직책이 ‘의와 평강의 왕’이란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와 방불한 자였다. 셋째, 멜기세덱은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모형이다. 히브리인들은 족보를 중시했지만, 멜기세덱의 족보는 언급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는, 3절처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었던” 자였다. 넷째, 멜기세덱은 히브리인의 시조인 아브라함한테서 십일조를 받았고, 그를 위해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그를 위해 복을 빌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보다 또 백성들한테서 십일조를 받았던 레위인 출신의 제사장들보다도 우월하였다. 다섯째, 멜기세덱은, 8절처럼, 십일조를 받았으나 죽을 운명을 타고난 레위인과 달리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레위인 제사장들보다 우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님이 레위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은 레위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한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제사장이다. 둘째, 예수님은 육신에 속한 법, 곧 연약하고 무익하고 폐지된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된 대제사장이다. 셋째, 예수님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다. 넷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이다. 다섯째, 예수님은 영원히 그 직분이 보장된 제사장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제사장이다. 일곱째, 예수님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제사장이다. 여덟째, 예수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제사장이다. 아홉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합당하신, 곧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제사장이다. 열째, 예수님은 하늘보다 높이 되신 제사장이다. 열한 번째, 예수님은 레위 대제사장들처럼 자기 죄를 위해서 제사를 바쳐야할 필요가 없는 제사장, 곧 백성의 죄만을 위해서 단번에 자기 몸을 드려 제사를 바친 유일무이한 대제사장이다. 열두 번째, 약점을 가진 율법으로 세워진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의 말씀으로 된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 제사장이다.

8장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
유대민족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하나님인식은 언약의 하나님이다.[각주36]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눠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관련된 말씀이다.
구약성서의 언약은 유대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판가름하는 잣대였다. 왜 우리 민족이 이 엄청난 시련을 겪는가에 대한 해답을 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얼마큼 성실하게 지켰는가에서 찾았다.
하나님은 유대민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다.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 언약이다. 이 언약은 구약 39권을 구성하는 핵심내용이자, 예수님을 구세주 메시아가 되게 하고, 기독교를 탄생시킨 밑거름이다.
출애굽기 24장 1-11절에 언약이 체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1-3절은 예비단계로써 하나님이 이런 저런 내용으로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데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묻는 장면이고, 4-8절은 본 단계로써 언약식이 엄숙하게 진행되는 장면이다. 모세가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기록한 후, 언약식 당일 이른 아침에 단을 쌓고, 열두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번제와 소들을 잡아 화목제를 드리게 하였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태워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만 상징적으로 태우고, 살코기는 예배자의 몫으로 되돌려주어 언약체결식사에 사용되었다.
언약식의 주요단계 가운데 하나는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는 것이다. 모세가 소들의 피를 받아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린 다음 언약서(십계명과 율법)를 회중에게 읽어주었고, 회중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응답하였다. 그러자 모세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출애굽기 24장 9-11절에는 언약체결식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9절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하나님께 나아간 장면이고, 10절은 하나님의 임재를, 11절은 하나님께 나아간 자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는 설명이다. 이 장면을 교회에서 연출하고 있는 것이 ‘주의 만찬’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시내산 계약을 ‘옛 언약’(구약)이라고 말한다. 이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 회중은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이것을 ‘선민계약’이라 부른다.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조건이 바로 이 시내산 언약이고, 이 언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언약의 내용인 십계명과 율법을 언약대로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대인들은 언약을 잘 지키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 이 새 언약을 히브리서 저자는 8장에서 “더 좋은 언약”이라고 했고, 예수님이 바로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22) 또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히 8:6)라고 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되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의 피 흘림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침례(세례)를 통해서 성삼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거룩한 새 언약 공동체가 되었으며, 매주일 나누는 주의 만찬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다.

9장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 예수
1세기경 유대인 기독교인들(Messianic Jews)[각주37]은 동족인 유대교공동체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복귀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히브리서 9장은 ‘옛 언약’인 구약을 ‘육체의 예법’(10절), ‘모형’(23절) 혹은 ‘그림자’(24절)로 표현하면서 신앙의 위기에 빠진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옛 언약의 예법에 따른 제사와 제물[각주38]과 대제사장은 장차 올 더 좋은 예배와 제물과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비해서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히브리서 9장은 첫 언약의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막이 갖는 제한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곧 법궤 위 속죄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휘장으로 막혀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분명하지도 않았고, 좀처럼 쉽지도 않았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 때만 백성의 속죄를 위해서 짐승의 피를 가지고 법궤 위 속죄소로 나아간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성막과 예법이 장차 나타날 더 좋은 것의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였다는 점이다. 모세를 통해서 지시한 옛 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성취와 실체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더 좋은 것으로써 완전하고 항구적인 것이다.
셋째, ‘옛 언약’에 따른 성막 제단에 드려진 희생제물과 봉헌물은 인간의 양심까지 온전케 할 수 없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어지는 구원은 법적인 속죄는 물론이고 양심까지 깨끗하고 온전하게 영구적으로 사하는 능력이 있다.
넷째, ‘옛 언약’에 따른 예법은 심령보다는 육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레위기 11장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고, 민수기 19장은 죽은 자와 접촉하는 데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으며, 레위기 12-15장은 문둥병과 유출병과 같은 질병으로 발생한 부정을 씻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의 제도는 육체에 관해서는 철저했지만, 영혼에 관해서는 약점을 지닌 것이어서 반드시 ‘새 언약’에 따른 예법으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0절에서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준 것이다”[각주39]고 하였던 것이다.
구약성서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영적세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각주40] 그들의 사고는 통합적이어서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영적세계를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이원론적인 인식이 약했다. 영적세계에 대한 관심과 강조는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시대에는 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이 매우 두드러진 때였다.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의 모형이나 그림자 혹은 예표로 강조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구약성서가 육적이고, 신약성서가 영적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육적인 ‘옛 언약’(구약)에 따른 예법은 영적인 ‘새 언약’(신약)에 따른 예법으로 개혁되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1-28절에는 예수님의 우월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첫째,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분이시다. 둘째,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성막을 섬기는 대제사장이시다. 셋째,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보혈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대제사장이시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효력이 발생되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셨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넷째, 레위 계열의 대제사장처럼 매년 한 차례씩 지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한 단번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완성하신 대제사장이시다. 참 성전인 하늘 성막에서는 모형으로 할 필요가 없고, 더 좋은 제물인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한 것이며, 대제사장이 해마다 짐승의 피로써 지성소에 들어간 것처럼 매년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나타내실 필요가 없이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다섯째,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의 피로 그를 믿는 자들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능력의 대제사장이시다. 여섯째,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부름을 입은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할 능력의 대제사장이시다. 일곱째, 믿는 자들을 구원하여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다시 오실 대제사장이시다. 이 때 세상을 향한 대심판이 있게 된다. 여덟째, 인간의 죄와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실 대제사장이시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막힌 담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각주41]에 나갈 수 있는 길과 오직 믿음과 은혜로 법적인 속죄는 물론, 양심까지 깨끗케 사함 받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육적인 복은 물론, 더 좋은 영적인 복까지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형제이시며, 참 안식을 주시며,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다시 나타나실 분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장래에 좋은 일들을 엮어 주시는 우리를 위한, 우리의 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10장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장차 더 좋은 것에 대한 그림자와 예표로 잠정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주셨고, 장차 이뤄질 더 좋은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군을 뽑아 이스라엘 민족을 섬기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봉사자로 세워 열방선교의 그릇으로 쓰시려 하였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하나님만으로, 그들 조상의 하나님만으로,[각주42] 그들 민족의 하나님만으로 독점해버렸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오해하여 안식일법과 정결법과 같은 터무니없이 많은 울타리법들[각주43]을 만들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였으며, 선교의 대상인 이방인들과는 접촉이나 식탁교제를 차단시켜버렸다.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한 노력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오류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킨다.”고 하셨으며,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열방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직접 보내셨던 것이고, ‘옛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2600여 년 전 유다왕국이 바벨론제국에 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회복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그들의 생각에다가 새겨 줄 것이며,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렘 31:33-34).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이루실 온 인류를 위한 큰 구원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예언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자기 민족을 위한 약속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이제는 죄와 불법이 용서되고 있기 때문에 죄를 사하는 제사가 더 이상 필요 없고,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의 은혜의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히브리서 10장 18-19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소휘장을 찢고 열어 놓으신 새로운 생명의 길이요, 그 휘장은 십자가가에 못 박혀 찢기신 예수님의 몸의 모형이다(히 10:20).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혈혈단신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 당신의 온몸이 찢기고 모든 피와 물이 다 쏟아질 때까지 싸우셨고, 결국에는 인류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우리 성도들은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죄를 씻고, 세례의 물로 몸을 씻은 사람들이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굳게 믿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며,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하고, 모임을 싫어하거나 폐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주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여야 한다(히 10:20-25).
히브리서와 계시록은 믿음과 인내에 관한 글이다. 성서는 성도들에게 신실한 믿음과 인내로 이미 얻은 구원을 끝까지 지켜내라고 권면한다. 또 이기는 자들에게 주실 축복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26-39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진리의 지식을 얻은 뒤에 일부러 죄를 지으면, 그 때에는 속죄 제사가 남아 있지 않다. 믿음과 인내를 보이지 못하고 배신했을 때, 남은 것은 무서운 심판과 그들을 삼킬 맹렬한 불뿐이다. 하나님을 처음 믿고, 구원의 빛을 받은 뒤에 그 숫한 고난의 싸움을 견디고 이긴 첫 사랑의 때를 회고해 보라. 그 시절에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고, 동일한 처지에 놓인 교우들의 동반자가 되며, 신앙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재산몰수를 당하고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일을 기쁨으로 당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동이다. 믿음이 있는 행동은 한번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참고 인내하며 용기 있게 전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나서, 약속하신 큰 상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수고를 마치고 인내의 결실을 맺을 때가 멀지 않다.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오실 날이 멀지 않다. 그분은 결코 지체치 않을 것이다.

11장 믿음의 실상과 증거이신 예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는 말씀에서 ‘바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하티크바’(희망)를 말하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랐고, 아직도 바라고 있는 ‘올람하바’(장차올 좋은 세상)를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연고로 얻지 못했고, 결국은 대다수가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이 대신 받게 된 하나님의 약속을 말한다.
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에서 ‘실상’은 ‘실체,’ ‘확신,’ ‘보장,’ ‘기초’를 뜻한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체가 되고, 실상이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 “장차올 것을 보장하는 보증금으로써”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것들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그들의 신분이 비록 천할지라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는 보장이 되고 실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며 ‘장차올 좋은 세상,’ ‘약속의 땅’을 전혀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진입한 것, ‘알리야’라 부르는 ‘오름’을 시행한 것을 말한다. 창세기를 보면, 유대인의 대표자로서 아브라함이 대가족을 이끌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것을 향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오른 것을 볼 수 있고,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에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이 ‘오름’에서 가장 큰 특징은 ‘순례자의 길’이다. 신약성서는 이 ‘오름’이 ‘장차올 더 좋은 것’을 향한 십자가의 길, 그러나 끝내 이기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의 길임을 말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 것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눈에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해서 오름의 행진을 펼친 후에 끝내는 이기고 그 약속의 증거로 바라고 소원했던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비록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르는 무모한 것일지라도, 끝내 이기고 약속의 증거를 손에 넣게 할 것이고, 바라던 것을 이루게 할 능력이고,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할 지혜이다. 신실한 믿음과 순종함으로 선배 신앙인들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증거물로 얻었다는 것이 히브리서 11장 1-2절의 대 선언이다. 그리고 나머지 11장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었는데도,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순종함으로 나아갔을 때, 그 약속의 실체와 실상을 증거로 확보했던 증인들의 이름들을 열거한 것이다.

12장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히브리서 12장 1-5절까지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한 경주에 관한 권면의 글이다. 1절에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란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동적인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를 확증하고 진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이다. 그들은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 삶 속에서 약속의 실체를 기다리며 증언한 자들이다. 여기서 “약속의 실체를 받지 못했지만”이란 뜻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곳 가나안 땅은 그림자와 모형일 뿐이고, 장차올 더 좋은 땅, 가나안 땅의 실체인 하늘 가나안 땅, 곧 영원한 나라의 땅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11장의 믿음의 조상들은 우리가 다 그 나라의 땅을 상속받기 위해서 동참할 때까지,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는 자들이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경주에 나가 달리는 자가 경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짐이나 거추장스런 것들을 말한다. 고대 헬라인들이 시합 중에 옷을 벗고 벌거벗은 채 경기를 했던 관습에서 나온 말이다.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추장스런 죄를 벗어버리자는 것이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는 먼 거리를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인내를 통해서 인내와 함께 낙오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자는 것이다.
2절에서는 또 다시 예수님을 본보기로 내세우고 있다. 11장에서는 구름떼같이 수많은 증인들을 내세웠는데, 12장 2-3절에서는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는 성도의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지속적으로 그분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 있는 예수님을 믿는데서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범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장차 받아 누리게 될 영광을 위해서 달게 받았던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 십자가를 지신 후에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보상을 받으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하셨고,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하셨다. 또 요한은 계시록 3장 21절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히브리서 12장 6-13절까지는 훈련과 인내에 관한 권면의 글이다. 부모가 자녀들을 훈련시키듯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이다. 그때 그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꾸지람을 듣더라도 낙심하지 말며, 그 훈련을 잘 참아 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14-17절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주를 뵙는 길에 대해서 말한다.
14절은 주님을 뵙는 길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평은 인간끼리의 정의로운 화평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과 더불어 먼저 화평하지 않고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주를 뵙지 못한다.
15절은 주님을 뵙는 길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가족과 동족의 탄압을 이기지 못해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명기 29장 18절에 근거해서 의심과 배교행위를 ‘쓴 뿌리’에 비교하였다.
16-17절은 주님을 뵙는 길이 ‘우상숭배하지 않고, 경박하고 속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한을 팔아넘긴 에서가 늦게 깨닫고 후회하면서 이삭의 축복을 눈물로서 간구하였지만 거절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으므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18-24절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하늘나라임을 말해준다. 저자는 여기서 두 장소와 두 인물을 비교한다. 시내산과 모세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땅의 것의 상징이고, 하늘 시온 산과 예수님은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의 것의 상징이다. 시내산과 모세는 장차올 좋은 하늘 시온산과 예수님의 모형이자 그림자이고, 장차올 좋은 시온산과 예수님은 이미 나타난 시내산과 모세의 실체란 점을 밝힌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나아가서 도달한 곳은, 유한한 땅의 것이 아니고,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또 성도들이 도달한 곳은 성도들을 축하하려고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이 나와서 도열한 곳이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가 있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보좌하는 네 케루빔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과 24장로들과 천군천사들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도열하여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을(계 9:12) 쉼 없이 돌려보내는 곳이다. 또 그곳은 헤라클레스가 죽어서 신들의 전에 오른 후에 신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불가사의한 과업으로 인해서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던 헤라클레스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모든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낸 후에 천상에 올랐을 때, 올륌포스의 신들이 그를 맞으러 제우스의 대전으로 모였다는 그리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히브리서 12장 18-24절은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하늘 시온산에 오르는 날,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군천사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최후의 승리자로서 월계관을 받아쓰게 될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25-29절은 ‘흔들리는 것들’과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구별하고 있다. ‘흔들리는 것들’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피조물을 말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무한하고 영원한 천상의 것들을 말한다. 최후심판 때에 대격변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것들’은 사라지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만 남게 되는데, 구원받은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에 속하여 남게 되고,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게 된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흔들리는 것들’에 속하여 소멸의 불이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심판과 경고에 관한 말씀은 계시록을 비롯해서 성서 66권에서 고르게 다루고 있다. 특히 히브리서 12장 14-29절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과 문제들에 던지는 경고의 말씀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상속자들이다. 이 영원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기쁘시게 섬기자는 것이 히브리서 12장의 권면이다.

====== Part II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