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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7-15 20:57
목사직 및 여성 목사에 대한 소고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564  

개신교 목사직 및 여성 목사에 대한 소고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개신교의 목사직만큼 근거규명이 어려운 것도 없다. 신약성서가 감독직, 장로직, 집사직에 관해서 명시(明示)하고 있는 반면, 목사직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직을 붙박이 감독직과 장로직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떠돌이 전도자직에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첫째, 만일 목사직이 감독직 또는 장로직과 동일한 것이었다면, 즉 감독과 장로가 목사였다면, 목사는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한 회중에 소속된 회원, 즉 회중 안의 붙박이었을 것이고, 회중 밖에서 초빙되지 않았을 것이다. 목사는 한 회중의 다수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목양권, 감독권, 치리권을 모두 누렸을 것이다. 이 형태가 1-2세기경의 초기교회들의 모습이었다.

둘째, 만일 목사직이 전도자직과 동일한 것이었다면, 즉 전도자가 목사였다면, 목사는 한 회중의 장로들의 감독권 아래서 그들로부터 안수(임명)를 받고 파송되어 다른 지역에서 회중을 세우고, 장로를 세우고, 침례를 베풀고, 주의 만찬을 베푸는 교회개척자였을 것이며, 새로 세워진 교회들의 임명된 장로들에게 목양권과 감독권과 치리권을 넘긴 후에 다른 회중을 세우기 위해서 이동해야하는 순회 목회자였을 것이다. 순회 목회자들 가운데는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이 바울을 포함해서 다수 있었다. 이 형태 역시 1-2세기경의 초기교회들의 모습이다.

셋째, 개신교가 탄생한 16세기경까지는, 2세기경에 순회목회자들이 교회들에서 사라졌고, 지역교회의 붙박이 목회자들이었던 감독들과 장로들이 목양권과 감독권과 치리권을 담당하였으며,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후부터는 감독들, 장로들, 집사들이 사제계급으로 발전하였고, 주교좌교회들을 중심으로 한 교권화와 중앙집권화가 이뤄진 이후부터는 사제들이 교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형태는 붙박이 지역 사제들(장로들)이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순회 사제들로 바뀐 가톨릭교회의 모습이다. 그들은 결혼하지 아니한 사도 바울(고전 7:8)처럼, 한 아내의 남편이 되기를 포기하였다.

넷째, 종교개혁이후 개신교회들은 개신교 사제들(장로들)의 지도아래 있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부쳐(Martin Bucer/1491-1551)가 ‘장로사제’를 ‘목사’로, ‘미사’(제사예배)를 ‘주의 만찬’으로, ‘제단’을 ‘주의 만찬상’으로 바꿔놓았지만, 아직 오늘날과 같은 전문직 목사의 등장을 말할 시기는 아니었다.

다섯째, 17-19세기를 거치면서 개신교회들은 신앙고백(신조)주의, 경건주의, 대각성운동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양한 형태로 갈라졌다. 따라서 목사직에 대한 견해와 입장은 교단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여섯째, 19세기 스톤-캠벨운동권에서는 목사직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이슈들이 등장하였다. 첫째, 목사는 전도자인가, 혹은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인가? 둘째, 전도자 또는 목사(minister)를 회중 밖에서 초빙하는 것이 성서적인가? 셋째, 목회전담자에게 사례비를 주는 것이 성서적인가? 넷째, 전담 목회자의 안수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소속 회중의 장로들에게 있는가, 지방회나 총회에 있는가? 다섯째, 장로의 교회치리권이 목사에게도 있는가? 여섯째, 여성의 교회에서의 리더십은 성서적인가?

근본주의 노선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는 회중 밖에서 초빙되는 목사를 비성서적으로 보았다. 부득이 초빙된 경우에는 초빙한 회중의 장로들의 감독권 아래 놓였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치리권이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자요, 전도자이며, 선교사이다.” 침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침례를 베풀 수 있고, 주의 만찬을 집례할 수 있다. 안수권은 개 교회의 장로들에게 있지만, 피안수자가 장로들의 감독권 아래 놓이는 임명식 말고는 특별의미가 없다. 따라서 목사는 장로가 아니며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만인제사장의 일을 풀타임 전담하는 목회자이다. 감독과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연소한 자는 안 된다. 하지만, 목사는 젊어도 상관없다. 목사의 호칭으로는 ‘전도자’(evangelist)를 선호한다.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회중 밖에서 초빙되는 목사를 시대적 요청으로 받아드리며, 보통 초빙된 회중의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는 만인제사장의 일을 풀타임 전담하는 목회자이다. 감독과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고, 연소한 자는 안 된다. 하지만, 목사는 젊어도 상관없다. 목사의 호칭으로는 ‘섬기는 자’(minister)를 선호한다.

진보주의 노선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한 회중 안에서 임명되는 감독과 장로와는 달리 목사는 회중 밖에서 부름을 받고 목회기능들을 전임하는 새로운 직책, 곧 섬기는 자(minister)의 직책을 가진 자로 보았다. 따라서 목사의 직책은 한 회중의 직책이 아니며, 캠벨이 말한 장로나 전도자가 아니라고 본다. 목사는 순회목회자이기 때문에 한 회중에 속하지 않고 전체 교회(the whole church, 총회)에 속한다. 그러므로 목사안수는 한 회중의 장로권아래 있지 않고, 지역(지방회)의 승인권과 지도권아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는 만인제사장의 일을 풀타임 전담하는 목회자이다. 목사의 호칭으로는 ‘섬기는 자’(minister)와 ‘목사’(pastor)를 겸용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교회들에서 초빙 목사와 사례비지급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성서적 문제를 떠나서 시대적 요청이요 관행이기 때문이다. 다만 목사들이 장로들의 감독권 아래 있는지, 혹은 지방회나 총회의 감독권 아래 있는지만 다를 뿐이다. 목사직책에 대한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언급된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와 5장 17절에 언급된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한 회중 안에서 임명되는 붙박이 감독들과 장로들에 관한 말씀이 되고, 1840년대 이후 회중 밖에서 초빙되기 시작한 전도자들 또는 목사들(섬기는 자들)에 관한 말씀은 아닌 게 된다. 따라서 목사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는가와 교회에서의 여성리더십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도 회중 밖에서 초빙된 목사들이 회중 안 붙박이 감독들과 장로들에게 요구된 한 아내의 남편들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찾고 있다. 순회(떠돌이) 목회자들(사도, 선지자, 전도자, 교사)은 바울처럼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이 다수였다.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상반절)는 권면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도록 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에 무질서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토라에 실린 613개의 계명에 여성 사제직에 관한 계명이 없다는 유대교인들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한 것이다.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 하반절)에서 바울이 율법을 거론한 것이나 주님의 명령이라고 한 것을 보아 추론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서의 표준관행은 회중의 회원들이 신임 목사, 신임 장로들과 집사들을 선출하며, 그들을 안수하는 것은 장로들의 권한 아래 있다. 그러나 설교 목사들이 초빙하는 회중에 의해서 항상 안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모 교회에서 안수를 받으면 다른 회중들이 다시 안수하지 않고 이를 인정해준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서는 공식적인 목회계급(order)을 결단코 인정한 일이 없으며, 오히려 성직자들과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행위를 온몸을 던져 거부해왔다.

스톤-캠벨운동의 특징은 만인제사장설에 있다. 회중 내의 감독과 장로들에게 주어진 회중 내의 리더십의 문제, 곧 감독과 목양과 치리(징계)의 문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목회들, 곧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침례를 베풀고 주의 만찬을 집례하는 문제들에 있어서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목사의 임무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는 것”(행 6:4)이다. 물론 목사가 감독이요 장로라는 입장에서는 회중 내의 리더십의 문제, 곧 감독과 목양과 치리(징계)권이 목사에게도 주어지지만, 감독이나 장로가 더 이상 사제나 성직자(clergy)가 아닌데도, 여전히 회중 내에서 여성의 리더십이 비성서적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고 있다.

목사가 장로들의 감시와 지배아래 있는 고용 전도자이든, 그 자신이 주도적인 장로이든, 19세기 후반이후 목사는 유급 고용 목회자이고, 풀타임 전담 목회자이며, 전문 목회자이다. 게다가 미국의 스톤-캠벨운동권에서는 목사의 호칭이 ‘섬기는 자’(minister)란 말로 자리를 잡았고, 캠벨의 사위로서, 베다니 대학의 학장을 지냈던 펜들톤과 진보신학에 맞서 싸운 보수신학의 보류였던 맥가비와 같은 석학들이 목사장립의 의미를 임직으로 보았으며, 안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기독교에는 제단도 없고, 예배가 제사도 아니다. 따라서 목사는 더 이상 사제(제사장)가 아니며,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는”(행 6:4) 전문 일군들이다. 목사가 하는 기능에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모든 장벽을 허무셨으며, 차별 없이 누구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사제(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나아갈 새롭고 산길을 열어놓으셨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들어갈 수 있었던 하나님의 보좌(법궤)앞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보충 내용

1. 신약성서에는 여성 목사가 있었다는 언급이 없지만, 여성이 목사가 되지 말라는 분명한 언급도 없다. 역사적으로 목사의 일을 수행해왔던 회중 내의 감독/장로들에게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분명한 언급이 있지만, 회중 밖에서 훈련된 개신교 목사들은 섬기는 회중의 감독/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 또는 주도적인 감독/장로일지라도, 그 성격이 한 아내의 남편이 아니어도 허락되었던 순회목회자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여성 목사는 여성 감독/장로가 없었던 당대의 제도상의 문제에서 비껴난다. 또 여성이 목사가 되지 말라는 분명한 언급도 없다는 점에서 여성리더십을 부정했던 과거의 제도가 절대적일 수 없다.

2. 여성 목사가 있었다는 언급도 없고, 여성은 목사가 되지 말라는 지시도 없는 신약성서의 침묵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으로 근본주의 노선을 취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금지로 보았고, 복음주의 노선을 취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진보노선을 취한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유로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은 ‘본질에 일치, 비본질(침묵하는 것)에 자유, 모든 것에 사랑’이란 선교방법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비본질(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금지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3. 여기서 여성목사 안수가 과연 본질의 문제냐, 혹은 비본질의 문제냐를 결정해야한다는 점과 이 결정이 우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몫이란 지적에 대해서 100퍼센트 찬성한다. 다만 근본주의를 제외하고는 여성 목사를 본질의 문제로 생각지 않는다는 점과 구원의 문제와도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구원론의 관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큰 정신은 남녀노소불문하고 만인이 동일한 하나님의 일군이란 데 있다. 목사란 그저 판사나 변호사 혹은 의사처럼 전문직 일군일 뿐이다. 스톤-캠벨운동권에서 안수문제를 전통적으로 가볍게 취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하더라도, 목회하고 있을 때에 국한되고, 목회를 잠시 쉰다든지, 접은 경우에는 보통 집사나 장로에 출마하여 회중을 섬긴다.

4. 그러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백석대학교의 최갑종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자. 최교수는 2005년 5월 27일 논문발표 및 토론회에서 ‘초기 교회에서의 여성들의 역할과 위치'라는 주제의 발표를 통해 고린도전서 14장 33~35절 말씀은 그 당시 초대교회의 특수상황, 즉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여성도들, 특히 가정을 가진 여자들이 교회에서 일으킨 분쟁과 공적 예배시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예방하기 위함이다... '여성도 전체'에게 속한 보편적인 명령이 아니라, 교회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기혼여성 몇몇에게 내리는 ’특수한 명령'이기에 본 구절을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줄 수 없다는 결정적인 근거 구절로 드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일절 여자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35절)는 내용에 대해서 ”복음을 통해 자유를 얻은 여자들이 이 자유를 남자들을 주관하고 가르치는 데 쓰려했던 것을 바울이 지적한 것이다... 기혼여성이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시 '창녀'로 간주될 수 있었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규범에 비춰볼 때, 교회의 여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다른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물을 때 교회가 부도덕한 집단으로 비춰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자유의 사용을 일부 제한한 것이다... 그 당시 바울 당대의 여성들이 대체적으로 남자들보다 교육을 받지 못한 탓으로 남자들보다 이해력과 판단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점을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라고 부언했다.<http://crossmap.christiantoday.co.kr>

5. 바울이 반율법주의자란 인식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오해를 한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취한 부정적인 시각의 대부분은 토라의 613개의 미츠보트(계명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게자이라(울타리)법들이었다. 당대의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게자이라법들이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벌린 논쟁들은 계명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게자이라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조동호, 㰡”유대교와 기독교㰡• 참고). 바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그것이 부분적으로 계명에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던 유대교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6. 목사가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감독권, 목양권, 치리권이 있다는 입장이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의 입장이다. 목사가 단지 기도하고 말씀만 선포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감독권, 목양권, 치리권을 갖고 있다고 보아진 회중 내에서의 장로들과는 다른 별도의 보직, 그것이 성서적이든 아니든 회중 밖에서 훈련된 전문직 목회자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목사는 장로가 아니며, 치리권이 없다. 이런 모든 고려들을 떠나서 현대목회에서는 사이즈가 커질수록 미국의 스톤-캠벨운동권 내의 목사는 한 회중의 CEO의 성격을 띠어가고 있고, 장로들의 회중에 대한 치리권은 1984년 법정사건이후 극도로 약화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장로들의 임기가 많은 교회들에서 1년에 지나지 않으며, 매년 새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7. 목사가 사제직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여성 목사의 문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의 문제에서 볼 사항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여성에게 제사장을 계명으로 주신바가 없다는 점에서조차 차별로 인식하지 않는다. 목사가 사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 목사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여성 목사의 허용이 본질의 문제에서 비껴간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