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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12 07:17
예수님의 윤리적인 삶을 추종한 일곱인(1)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684  

예수님의 윤리적인 삶을 추종한 일곱인(1)
Seven Followers of Jesus Christ's Ethical Lives

소광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누가복음 4장 14-30절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의 핵심이 ‘희년’ 또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년선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다.

요한일서 4장 18-21절을 보면,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이 있다. 간디가 사랑(비폭력)을 최고의 가치인 진리로 보고, 신(神)에게로 가는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행전 20장 17-35절을 보면, 장로(목사)들은 “자기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는 말씀이 있다. 이에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다른 벼슬은 다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만큼 목민(牧民)의 일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목민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을 보면, 주님께서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는가라고 묻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말씀에 꽂혀 일생을 산 사람이 레오 톨스토이였다.

마태복음 8장 18-22절을 보면,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는 결단을 미루는 제자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 제자에게 예수님은 즉시 결단하는 참 제자의 길을 요구하셨다. 이 말씀에 꽂혀 주님의 참 제자의 길을 살다가 39살에 히틀러 정권에 처형된 사람이 디트리히 본회퍼였다.

이사야 40장 3-5절을 보면,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즐겨 사용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였다. 그도 역시 예수님처럼 차별받는 흑인들에게 ‘희년’ 또는 ‘주의 은혜의 해’를 위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다가 39살에 암살자의 저격을 받아 죽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다. 이 비유의 특징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업신여김을 받는 자가 되레 고통당하는 자를 돕는 이야기이다. 이 비유에 꽂혀 일생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산 사람이 도로시 데이였다.

요한복음 19장 28절을 보면, “내가 목이 마르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꽂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모시겠다고 결심했던 사람이 마더 테레사였다. “내가 목마르다”(I thirst). 테레사는 이 주님의 말씀, “목마르다”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뭇 영혼들 즉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갈망하신 것으로 가슴 속 깊이 인식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예수님의 윤리적인 삶을 비롯해서 그분의 삶을 추종했던 일곱 사람의 윤리적인 삶을 살펴보는데 있다.

1. 나사렛 예수(눅 4:14-30)

예수님의 경험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는 <예수 하버드에 오다>에서 “위대한 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학생들이 정말 찾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신뢰할 만한 윤리적 영웅들이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분명 가난한 자들 편에 서고, 힘센 자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그의 확신 때문에 치러야할 값을 즐겨 치르려고 한 힘 있는 윤리적 모법이었다.”고도 했다.

간디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가르치는 분이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인 로마의 황제나 헤롯 대왕 또는 대제사장이 윤리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진정한 윤리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확신을 도발적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예수님이 짧은 공생애 기간에 배척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사렛 회당의 청중들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17-19절, 즉 이사야 61장 1-2절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의미를 해설하셨을 때만 해도 목수의 아들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모두 감탄하였다. 그러나 23-27절의 말씀을 이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굉장한 반전이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께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의 혜택을 과연 누가 받을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때문이었다.

레위기 25장 8-12절과 신명기 15장 1-5절에 나오는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란 과격한 개혁 또는 총체적인 경제적 재분배를 말한다. 종들은 자유를 얻고, 모든 부채와 채무는 탕감되며, 저당 잡힌 토지는 본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경작지는 일 년간 쉬게 하는 제도이다.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갖지 못한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겨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갖지 못한 자들에게 50년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희년제도는 성경에나 있는 이상(理想)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실천되지 못한 죽은 제도였다. 그리고 가진 자들은 그것이 실행되지 않고 이상으로만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수의 아들인 주제에 무슨 권한으로 희년을 선포한단 말인가? 대제사장만이 할 수 권한인데, 자기가 누구기에 이런 혁명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분명 예수님을 향해서 분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쪼들리던 사람들, 자기 땅이 없는 농사꾼들, 노예와 같이 갖지 못한 자들은 희년을 실시하면 크게 혜택을 누릴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한 희년의 축복을 맞이할 자들이 유대인들이 아니고, 사렙다의 과부나 시리아의 나아만과 같은 이방인들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데 있다.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대로, 갖지 못한 자들은 갖지 못한 자들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가 치솟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로 볼 때, 희년 혹은 ‘주의 은혜의 해’를 맞이할 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는 자들이고, 삶 속에서 희년의 선포를 윤리강령으로써 실천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희년의 선포를 윤리강령으로써 실천하는 일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마치 그 때가 이미 온 것처럼 실천하면 ‘주의 은혜의 해’가 이미 그에게 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개혁(改革)과 실천

예수님은 정치 사회 종교의 개혁을 주장한 떠돌이 예언자였기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당하셨다. 북쪽지방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셨고, 중부지방 사마리아에서 배척을 당하셨으며, 남부지방 예루살렘에서조차 배척을 당하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완전 실패였다. 그러나 그분의 ‘실패’는 ‘성공’에 중독된 세속문화 속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들에게 성공이란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폭력의 선언이요, 모든 폭력과 착취와 전쟁과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의 죽음을 선포하는 조종(弔鐘)이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항상 준비하라는 엄중한 사이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동터오는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전령이었다. 정의와 평화가 물결치고 윤리와 도덕적 실천들이 범람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자유의 종소리였다. 그것은 다가올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고 체험하는 선취(先取)시대를 알리는 청첩장이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기대와 희망이 이뤄지고 성취될 마지막(종말 또는 희년)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웅장한 팡파르였다.

예수님의 개혁의 절정은 유월절 절기를 앞둔 마지막 한 주간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때 일어났다. 예수님은 비천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특권층의 성지요, 기득권 세력의 권좌요, 로마 점령군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돌진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비폭력 저항을 유감없이 발휘한 도전이었다. 이후 예수님은 일주일도 못 살고 사형에 처해졌다.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은 가진 자들과 세도가들의 눈에 조롱과 모욕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오히려 그들과 세속에서 최고의 권세를 가진 황제의 권위를 풍자하고 비웃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짐승 파는 일과 돈 바꾸는 일로 떼돈을 벌던 협잡꾼들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가셨다. 사실 이런 것들은 순례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위한 것이었다. 또 유대인 성인이면 누구나 다 어느 나라에 살든지 상관없이 로마황제의 화상(畵像)이 새겨지지 아니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돈을 바꿔주고 있었다. 이런 편의 시설이 있던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는데, 성전에서는 유일하게 이방인들도 제한 없이 출입할 수 있는 광장이었다. 유월절이면 이곳은 제물구입과 환전을 하려는 순례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성전 뜰에서 이뤄지는 모든 상업행위는 대제사장에게 비싼 자릿세를 내야했을 것이다. 따라서 제물로 바칠 동물이 매우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을 것이고, 환전수수료도 턱없이 높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가 성전에서 이뤄지는 이런 부당한 매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는 정직한 예배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짐승들을 성전 뜰에서 내어 쫓으셨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셨으며,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고함치셨다. 가히 혁명적이었다. 통수권자인 대제사장의 수입 또는 성전수입을 차단하는 행위는 반역행위였다. 그가 과연 누구기에 이런 일을 하는가라는 것이 그를 바라본 사람들의 시선 속에 담긴 질문이었다.

예수님의 이상(理想)

예수님의 화두(話頭)는 회개, 사랑, 용서, 천국이었다. 앞의 세 가지는 천국의 시작과 발전을 가져올 도덕률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3-48). 형제를 용서하라(마 18:21-35). 회개하라(마 4:17)는 우리의 삶속에 천국을 끌어드릴 원동력이다. 기도와 성령충만은 개인 구원에 필요하지만, 사랑과 용서는 사회구원에 필요하다. 심령천국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교회와 사회천국도 중요하다. 심령천국이 아무리 잘 이뤄졌다 해도 회개가 없고 사랑이 없으며 용서가 없다면, 진정한 천국이 이뤄질 수 없다.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따라서 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이뤄져야할 것이 천국이다.

예수님의 이상세계는 천국(天國) 곧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였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이 도래하였음을 산상수훈을 비롯한 수많은 천국복음을 통해서 선포하셨다. 이 예수님의 천국복음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를 설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그때가 마치 이미 도달한 것처럼 윤리적으로 살라는 천국 삶에로의 초청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 훗날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조금씩이지만, 그것은 지금 여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무작정 기다리며 기도만할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윤리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레오 톨스토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런 내용(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주장하였고,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의 진리탐구(사티아그라하)를 위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로마인들의 귀에는 일종의 반역행위에 가까웠다. 로마제국의 명예와 합법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주장은 로마가 평화를 이루는 자라는 것이었다. 로마는 신성의 지배자 로마 황제의 대범한 후원 아래 ‘로마의 평화’(pax romana)유지하고 있었다. 신이라고 주장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공식 칭호들 가운데 하나는 ‘평화를 가져오는 자’였다. 로마 군대는 이 평화를 이루고 보장하는 집단으로써 제국의 신민들은 이를 지극히 고마워하고 이에 따라 엄청난 세금도 즐겨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평화(pax)는 전쟁과 죽임과 착취와 탄압의 대가로 얻어지는 잠정적인 평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pax)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샬롬(shalom)이었다. 이 샬롬은 하버드대의 하비 콕스 교수의 말대로, “황제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강제된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평화”였다. 이 평화는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얻어진 평화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천국복음은 거짓 평화에 대한 강력한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몸을 던져 천국운동을 펼쳤다. 예수님은 이 운동의 가치를 목숨보다 높게 평가하셨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소유할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운동의 가치를 짧지만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내 보이셨고, 그 보상으로 하나님의 우편보좌에 앉는 영광을 차지하셨다.

2. 마하트마 간디(요한일서 4:7-21)

간디의 경험

간디를 변화시킨 것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한 가지 사건이 안타깝게도 영국 기독교인의 편견이었다.

간디는 학생 시절에 신약성경을 진지하게 읽었고, 영향도 많이 받은 터라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한다. 간디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고약한 계급(카스트)제도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을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간디가 예배당에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자리에 안내하기를 거부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드릴 것을 권했다. 그러자 간디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민족과 신분의 차별이 있고, 남녀노소빈부의 차별이 있다면, 그냥 힌두교에 남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발길을 돌려 버렸다. 훗날 간디는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간디는 끝까지 힌두교에 남아 있으면서 남에게는 그 어떤 종교도 강권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자가 되었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서 사랑(비폭력)이야말로 최고의 가치인 진리이며, 신(神)에게로 가는 길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전을 고집하거나 전통을 맹목적 또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간디 자신은 오랜 역사 속에서 힌두교가 끌어들인 오류들과 폐해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힌두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자기 아내에 대한 감정에 비교해서 설명하였다. “내 아내는 이 세상의 어느 여자보다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렇다고 내 아내가 아무런 결함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내 눈에 띄는 것 이상의 결함을 내 아내는 가지고 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러나 아내와는 끊을 수 없는 연분을 느낀다. 그 온갖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느낀다.”고 말하였다.

간디를 변화시킨 또 다른 사건들은 간디가 변호사 개업을 막 시작한 무렵에 발생하였다. 어려움에 처한 형의 간청으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면(知面)이 있는 영국인 주재관을 찾아갔다. 그 주재관은 간디의 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하인을 시켜 간디를 밖으로 내쫓았다. 분개한 간디는 그 주재관을 고소하려고 했지만, 영국인을 고소해봤자 신세만 망친다는 뛰어난 변호사의 충고를 듣고 “마치 독배를 드는 듯이 괴로웠다”고 술회하였다.

간디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를 떠나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거기서 간디는 위촉받은 소송사건 때문에 기차를 타야 했다. 도중에 유색인종은 1등 칸에 탈 수 없다며 백인 차장이 간디를 외진 산간 역에 내동댕이쳤다. 지역은 남아프리카였지만 고지인데다가 겨울이어서 몹시 추었다. 등불도 없는 대합실에서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였다. 일련의 이런 사건들은 간디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의 인생행로를 인도인을 위한 비폭력운동의 독립운동가로 바꿔놓게 하였다. 간디가 겪었던 차별과 시련은 오히려 간디에게 자유와 해방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들을 쟁취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해주었다.

간디의 사상과 실천

간디는 인도의 독립과 복지향상을 위해서 한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실천적 인물이었다. 간디의 실천의 근거는 그가 진리와 사랑(비폭력)의 법이라 불렀던 도덕법칙에 일관되게 의존하였다.

간디는 종교인이었고, 그의 인생철학의 핵심도 종교였다. 그러나 그의 종교는 인습적이거나 전통적인 것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탐구와 정신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었다. 간디는 종교적인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이성과 실천을 통해서 검증하고, 또 그것을 정신적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서 재해석하였다. 그 결과 간디는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간디가 목적으로 삼고 추구한 것은 “신(神)을 눈앞에 보기 위한, 즉 구원을 얻기 위한 자기실현”이었다. 그러나 간디의 종교의식은 개인이 구원을 얻기 위한 신비적인 것이 아니라, 대중이 정의와 평화를 얻기 위한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동포를 위한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서 신(神)을 구했다. 그는 신이 진리라 믿던 것을 진리가 신이라고 바꿔 믿었다. 도덕을 종교생활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던 것을 종교의 본질이 도덕이라고 바꿔 믿었다. 진리(사티아)와 사랑(아힘사)은 꼰 새끼와도 같아서 나눌 수가 없어서 “진리 없는 사랑은 맹목이요, 사랑 없는 진리는 공허하다”고 하였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자기감정과 욕망을 억제시키고, 자신을 육신의 제약에서 해방시켜줄 어떤 힘이 필요하다. 이 힘을 간디는 사랑과 비폭력(아힘사) 속에서 발견하였다. 그것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어떤 힘으로써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의 힘’과 ‘성령의 법’에 가깝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는 순결(브라마차리아)과 비소유(아파리그라하)를 준수함으로써 일반적으로는 사나운 격정을 누르고, 특수하게는 성욕과 소유욕을 억제하기 위하여 사랑의 힘(기독교의 성령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결,’ ‘자제,’ ‘자기 정화’를 위해서 모든 감각기관과 말, 생각, 행위일체의 통제가 필요하고, 성욕의 억제와 미각의 통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성욕은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하는 수의 아기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만 써야한다면서 10대 초반에 결혼한 간디는 30대부터 부부생활을 단절하였다.

소유는 장래를 위해 필요한 것인데, 조물주는 그날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므로, 만일 우리 각자가 필요한 것만을 취하고 그 이상은 취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간디는 그가 깨달은 이후로 순결과 비소유를 주장했고 또 실천했지만, 그의 핵심사상과 실천은 사랑과 봉사였다. 사랑과 봉사만이 신(神)에게로 나아가는 즉 진리와 구원을 달성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신(神)의 실현인 만큼 인간의 온갖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활동은 신(神)을 본다는 궁극적인 목적에 의해서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온 인류에 대한 직접적인 봉사가 인간의 노력의 불가결의 임무가 된다. 그 이유는 신(神)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신(神)을 그의 피조물 속에서 보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온 인류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간디는 말하였다.

간디의 이상(理想)

간디의 이상세계를 '라므라자'(Ramraja)라 부르는데, 이는 신(神)이 다스리는 또는 순수한 도덕의 권위에 따르는 이상사회로써 종교적이다. 미국의 ‘아미쉬’ 그리스도인들처럼 자급자족에 기초한 단순하고 순수한 삶을 추구하며, 일체의 근대문명과 사유재산을 거부한다. 국가와 정부, 군대와 경찰, 철도와 기계, 병원과 의사, 법관과 변호사 등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간디가 추구한 이상세계는 비폭력에 기초한 무정부 농촌사회였다.

간디의 후계자 네루는 개인과 민족 전체에게 간디가 주고 간 최대의 선물은 공포심(아바야)을 갖지 말라는 것,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영국의 지배아래서 인도는 숨 막힐 것 같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침착하고 결의에 찬 말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다. 왜냐하면 공포심을 갖고서는 진리도 자유도 그 밖의 고귀한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포심을 버리자 인도 민중에게는 심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을 모욕하고 타락시킨 외국지배에 그토록 오랫동안 굴종해온 사실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굴종하지 않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두려움을 극복한 인도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다음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줄지어 걷던 간디의 사람들은 철조망에서 90여 미터(100야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선택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철조망 가까이 다가섰다. 갑자기 20여 명의 원주민 경찰들이 정지선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달려들며 강철을 입힌 곤봉으로 마구 머리를 쳐댔다. 그러나 시위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곤봉을 막으려고 팔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볼링 핀처럼 무너졌다.... 얻어맞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자세로 쓰러져 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 두개골이 깨진 사람, 부서진 어깨의 고통 때문에 몸을 비튼 채 쓰러진 사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며 얻어맞고 쓰러질 때까지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 모두가 몇 분 후면 얻어맞아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망설임이나 두려움의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당당하게 든 채 휘청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루이 피셔의 [마하트마 간디의 삶], 1952>

비록 종교는 달랐지만, 간디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리스도인이었던 톨스토이에게서 많은 지혜를 얻었다. 예수님이 묵묵히 지신 십자가가 얼마나 위대한 행위였는가를 안 사람이 간디였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인가를 안 사람이 간디였다. 그 하나님께 다가가는 길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과 봉사라고 믿었다. 순결과 비소유라고 믿었다.

요한일서 4장 18-21절은 다음과 말한다.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3. 다산 정약용(행 20:17-35)

정약용의 경험

정약용은 22세(1783, 1762년생)에 과거에 합격하여 냉혹한 정치세계에 입문하였다. 다음해인 23세(1784, 매형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해)에 큰 형님의 처남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와 서학에 관하여 듣고 그해 음력 9월에 매형 이승훈으로부터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 때 둘째 형인 약전도 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진산사람 외사촌 윤지충에게 권고하여 신앙을 갖게 하였다. 24세 때인 1785년 봄에 중인 김범우의 집(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신앙집회를 갖던 중에 발각되어 훈방조치를 당한 바가 있고, 26세 때인 1787년에는 매형 이승훈과 함께 반촌(泮村)에서 공부를 핑계로 천주학을 강습하다가 이기경에게 발각되어 문제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친구 이기경은 목만중 홍낙안과 함께 원수로 변하였다.

29세(1790)에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로마가톨릭교회에 제사금지령을 내렸고,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은 자신의 외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신주를 불살랐으며, 다음해(1791)에 어머니 권(權)씨가 죽자 위패를 폐하고 제사를 금한 것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에서 참수되어 조선천주교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정약용, 정약전보다 2년 늦게(1786) 전도를 받은 셋째 정약종(순교자)을 제외한 약용과 약전 두 형제는 물론 상당수의 양반학자들이 제사를 금하라는 북경주교의 금지령과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아 천주교를 떠났다. 정약용은 배교하기 직전(1790-1795)에 금정(金井)으로 좌천되어 임금의 의도대로 금정의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였으나 정적(政敵)들의 비방과 상소가 끊이지 않자, 36세(1797)에 자기의 배교를 명백히 밝히는 상소, 일명 자명소(自明疏)를 써서 임금에게 바쳤다. 이 글에서 자신은 진산사건(1791) 이후에 천주교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밝혔다. 이로 보건데 정약용은 정적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짧게는 8년, 길게는 11년까지 가톨릭신자로 남아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정약용의 직접적인 배교의 동기를 자신을 두텁게 신임하고 총애했던 임금을 배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천지대군 하나님을 버리고 작은 조선의 임금을 택했던 것이다.

정약용과 남인세력을 견제하고 질투하던 집권세력 북인벽파는 1800년에 정조가 죽자 다음해에 가톨릭신자가 많았던 남인시파를 향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약용을 죽이기 위한 숙청의 칼을 뽑아들었다. 1801년 초봄에 시작된 박해 때에 상당수의 남인 정치인들이 천주학도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는데, 40세의 정약용과 형들인 약전과 약종, 매형인 이승훈 등이 포함되었다. 정약용이 제기할 수 없도록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킨 정약종에게 극형을 추가하였고, 이승훈을 처형하였다. 정약용은 약전과 함께 유배를 당하였으나 동년 겨울에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백서사건으로 체포됨으로써 약용과 약전을 황사영과 함께 엮어서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다. 이때에도 극한의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살아남아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정약용은 자기를 기어코 죽이려한 서용보 일당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학문에 정진하였고, 유배지에 머문 18년 동안 <목민심서> 48권을 비롯해서 무려 492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오늘날의 책으로도 십 수권에 이른다. 유배지에서 보낸 한가로운 시간들이 없었다면 성취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위기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정약용의 개혁(改革) 이상(理想)과 실천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첫 절에서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牧民)의 벼슬은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돌보는 것이지만, 교회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목회(牧會)를 뜻한다. 따라서 목민관과 목회자는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목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감독자와 목자라 하였다. 그러면서 장로(목사)들에게 자기 자신과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하였다. ‘삼가다’는 말은 ‘조심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다,’ ‘자신을 살피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목민의 벼슬을 구하지 말라’는 바울의 ‘자신을 살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유배지에 묶인 죄수로서 “목민(牧民)할 마음은 있지만,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心書)라 제목을 붙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청렴, 절용(절약), 근면을 강조하였고, 무당, 귀신붙이, 불교의 미신행위들을 배척하였다. 그는 정선의 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은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뭇 가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요, 하나님은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귀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뭇 천한 자들을 그에게 부탁하려 함이라”고 하였고, “제 힘으로 먹고 살면서 제 일을 경영하고 제 피땀으로 얻은 것을 받아쓰는 빈천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보살핌이 너그러울 테지만, 벼슬을 갖고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만민의 피땀을 받아쓰는 부귀한 자는 하나님이 그 허물을 엄중이 따질 것이라”고 하였다.

또 정약용은 고아, 홀아비, 과부, 부양가족이 없는 노인, 노처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그 방법까지 적고 있고, 실천하였으며, 호적(戶籍)을 바르게 하여 부역과 세금을 균등히 하였다.

정약용은 대학자였지만, 사변에 머물지 않고 실천을 앞세운 실천적인 개혁가였다. 그는 시론(詩論)에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몰락보다도 시대의 몰락을 더 슬퍼하였다. 그러면서 몰락을 막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거의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었다. 그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부자의 것을 덜어내어 가난한 사람에게 보태 주어 그 재산을 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지는 소수 양반지주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두에게 내린 공물(公物)이라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지배층이 백성들을 엄한 법과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백성들에게 살 곳과 일할 곳을 선택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근대적인 신분차별과 지역차별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그는 사대부라는 특수신분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반이나 국가 권력자를 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전문가를 우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분과 지역차별을 없애고 재능이 있는 자를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역차별과 신분차별은 국가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라고 믿었다. 정약용은 자기가 개혁하는 정의로운 일들이 불의하고 욕심 많은 관리들로부터 원망과 미움을 산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임지에 부임하면 즉시로 그간에 저질러진 모든 불의하고 불평등한 일들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백성이 있고 나라가 있지,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신앙(信仰)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간이나 조선 땅에 숨어 지내며 선교했던 다블뤼는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참고하여 <조선순교사비망기>를 편찬하였는데, 정약용은 비록 배교하였지만, 내적(마음)으로는 신자였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묵상과 단식과 속죄를 위한 고행으로 믿음생활에 전념하였고, 죽기 일 년 전 74세(1835) 때에 중국인 유방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참된 참회자로서 선종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의 아들 학연도 처음에는 가문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천주교라며 배척하고 원수로까지 여겼지만, 만년에 회개하고 영세를 받았으며, 정약용의 누이도 노년에 신앙을 갖고 조선인 최초의 신부 중 한 사람인 최양업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이 신유년 봄 옥중에 있을 때 하루는 근심하고 걱정하다 잠이 들었는데, 꿈결에 어떤 노인이 꾸짖기를, “소무(蘇武, 중국 한나라의 충신)는 19년도 참고 견디었는데, 지금 그대는 19일의 괴로움도 참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출옥하여 날짜를 따져보니, 꼭 19일 만이었고,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햇수를 따져보니, 1800년 관직에서 물려난 때로부터 꼭 19년만이었다고 한다. 이에 정약용은 인생의 화복(禍福)이 신의 뜻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술회하였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책들을 받아본 형 약전은 동생 약용이 이룬 저술과 깊은 깨달음이 정약용이 스스로 알지 못했고, 혼자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닌, 하나님(상제)이 내려주신 복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61세인 회갑년에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자찬 묘지명>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회갑의 의미를 죄를 회개하고 수습하여 한 평생을 되돌리고자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정밀하게 몸을 닦고 실천하여 하나님(하늘)이 준 밝은 명을 살펴서 여생을 끝마치려 하였다.

정약용의 인간론은 근본이 착하며 선악의 선택권이 있다는 성선설과 자유의지설이다. 그는 <심경밀험>(心經密驗, 1815)에서 인간의 마음은 신령하고 밝은(靈明) 하나님(上帝天)이 성령(道心)으로 내재(內在)하는 장소(所在處)이며, 하나님(상제천)의 성령(道心) 곁에 탐욕적인 인심(人心)이 병존하지만, 성령(道心)으로 인심의 잘못을 막고, 성령(道心)을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天命)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영(神)과 육(形)으로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고, 몸(身)과 자기(己)가 있으며, 인간내면에는 신령이 거하는 곳(處靈)과 지각(知覺)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는 않지만, 인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신령하고 밝음(靈明)이 직통(直通)하고 마음을 비춘다(天之靈明 直通人心.... 照臨此室)고 하였다<중용자잠>(中庸自箴).

따라서 다산은 <중용>(中庸)의 머리글(首章)에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바에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신독론(愼獨論)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목회자들에게 자기와 양들을 위해서 조심하라한 것처럼, 정약용은 인간관계(對神對人關係)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심으로 늘 조심하여 삼가야 하며, 성령(道心)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경청할 것을 가르쳤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서도 우리 자신을 늘 점검하고 성찰하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4. 레오 톨스토이(마 25:31-46)

톨스토이의 경험

톨스토이는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1828.9.9)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소년시절 감수성이 예민했고, 공평치 못한 일에 공분했으며, 도덕적 완성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20살에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지주로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그의 이상주의는 실패로 끝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졌다가 24살에 군에 들어가 포병대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이름을 내기 시작하였다.

한편 조정원(調停員)으로서 농민과 지주와의 분쟁을 중재하거나, 노동현장에 내몰린 농민의 자녀들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혹은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의 발행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어느 것에서도 본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30대 초반에(1857~62) 두 차례 외국 여행을 하였으나 발달한 도시문명에 환멸을 느끼고 귀국하였다. 이 무렵에 결혼(1862)하여 가정생활과 창작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후 42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1869)의 연재를 끝냈고, 이어 49세에 <안나 카레니나>(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無常)으로 심하게 정신적인 동요를 일으켜, 과학ㆍ철학ㆍ예술에서 해답을 구하려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轉向期)로써 53세에 <교의신학비판(敎義神學批判)>(1880), 54세에 <요약복음서>(1881), 55세에 <참회록>과 <교회와 국가>(1882), 57세에 <나의 신앙>(1884) 등 신학과 믿음에 관련된 글들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톨스토이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한편 그는 자신의 톨스토이주의와 동일한 신념을 18세기 중엽부터 실천하고 있던 ‘두호보르’ 기독교 교단이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자 그들(4천여 명)의 캐나다 이주비용을 조달할 목적으로 72세에 그 유명한 <부활>(1899)을 발표하였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에서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며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하였으므로 74세 때인 1901년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破門)을 당하였다.

톨스토이는 당대의 러시아정교회가 민중에 무관심 한데 실망한 나머지 원시(사도행전) 기독교에 환원하여 동포주의와 인도주의를 표방하였고, 노동, 채식, 금주, 금연을 통해서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또 비폭력 무저항주의와 사랑과 관용(용서)의 정신으로 세계평화와 복지에 기여하려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온갖 허위와 부패를 배격하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제도와 도덕생활 양식에 도전하여 이를 남김없이 부정하고, 끝내는 자신의 모든 특권들까지도 포기하였다. 55세 때인 1882년에 모스크바의 한 빈민굴을 시찰한 이후부터는 그의 생각이 종교와 윤리문제에 뿐 아니라, 사회제도에까지 미쳤다. 그러나 58세 때인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함으로써 부인과 충돌이 잦았고, 가정생활이 원만치 못하였으며, 그의 저작권 일체를 16살 아래의 부인이 관리하였다. 톨스토이는 가정생활의 모순을 해결할 한 가지 방법으로 83세(만 82) 때인 191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장녀와 주치의를 데리고 집을 떠나 방랑자의 길에 올랐으나 11월 7일 폐렴에 걸려 아스타포보(현 톨스토이역)의 역장 관사에서 11월 20일 숨을 거둠으로써 고뇌와 파란의 생애를 마쳤다.

톨스토이의 개혁사상과 실천

톨스토이는 젊어서 영지 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는 이상을 품었고, 노동현장에 내몰린 농민의 자녀들을 모아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교육 잡지의 발행을 시도한바 있다. 50대에 접어들어 러시아정교회를 비판하였고, 원시 기독교 정신에 환원하여 평화주의, 동포주의, 인도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노동, 채식, 금주, 금연을 통해서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였다. 또 비폭력 무저항주의와 사랑과 관용(용서)을 주장하였으며, 모든 공권력을 부정하는 기독교적 무정부주의를 표방하였다. 톨스토이는 또 당대의 사회제도와 도덕생활에 도전하였고, 모스크바의 빈민굴을 시찰한 이후로는 사회제도 개선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사유재산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과 개혁사상들은 번번히 현실문제에 막혀서 제대로 실행되지를 못하였다. 이로써 그를 위선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자기모순을 해결할 한 가지 방법으로 가출했다가 객사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이었으나 러시아 봉건사회의 현실을 농민의 눈으로 묘사한 작가였다. 러시아의 변혁을 그 누구보다 열망하였으며, 농노교육과 농노해방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는 역사의 참 주인공이 야망이나 자기주장과는 거리가 먼 겸허한 민중임을 입증하려 했고, 귀족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서 대다수 민중들이 가난하다고 비판함으로써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출판되지 못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에게 인생은 선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선의 실천은 인생의 목적이며, 모든 사람이 달려가야 할 목표였다. 그리고 이것을 달성하게 할 수단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또 사랑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이므로 지금 당장 실천하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무가치한 것이며, 미래의 행복도 없다고 하였다.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 된다고 하였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이 자기행복만을 생각하게 되면, 그 희망이 다른 사람의 희망과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였다.

톨스토이의 사랑은 소설 <부활>과 여러 민화들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로 나타났다. "어느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수백 번이고 용서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설 <부활>의 남자 주인공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는다. 산상수훈대로만 실천한다면, 폭력은 사라지고,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톨스토이는 질서유지를 위한 경찰과 전쟁수행을 위한 군대의 공권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에 반대하였다. 정부나 공권력 없이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모든 폭력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태도는 “남들이 내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청교도적 금욕주의를 실천하려고 애썼던 인생의 교사로서, 일생을 사람은 왜 사는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와 씨름하였고, 그 해답을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찾았다.

톨스토이의 신념

톨스토이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을 사랑하라는 것이 복음서의 가르침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반대로 미움은 더 큰 미움을 불러올 뿐, 미움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믿었다. 이 사랑과 용서가 톨스토이가 쓴 민화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대자(代子)>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와 <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에 나타난 메시지이다.

톨스토이는 총 23개의 민화를 썼다. 이들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있다. 톨스토이는 이 글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은 사랑이고, 주지 아니하신 것은 내일 일어날 일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유는 알지 못하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주어진 사랑을 오늘 당장 여기서 실천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톨스토이는 <대자>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악은 악 때문에 눈덩이처럼 커지고, 악은 책망하면 할수록 더욱 크게 번진다는 것이다. 악은 악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사랑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신념이었다. <대자>에 등장하는 곰 사냥이야기는 ‘악은 악 때문에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숲 속 넓은 초원 큰 소나무에 무거운 통나무를 가지에 매달아 늘어뜨려 놓고 통나무 밑에다 꿀통을 놓아둔다. 그러면 곰들이 나타나 코를 벌름거리며 꿀통으로 다가가 코끝을 처박고 꿀을 핥는다. 그러다 보면, 소나무에 매달려 있던 통나무가 곰들의 몸에 닿아서 조금씩 움직이게 되고, 곰들을 성가시게 한다. 그래서 곰이 통나무를 멀찌감치 밀쳐버리게 되면 사태는 악화된다. 곰에게서 멀어졌던 통나무는 여지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곰의 머리나 등을 때리기 때문이다. 통나무에 얻어맞고 물러섰던 곰은 화가 나서 이번엔 통나무를 더 힘껏 더 멀리 밀쳐버리게 되고, 그네처럼 멀리 밀려갔던 통나무는 더 큰 힘으로 되돌아와서는 그 순간에 꿀통에 다가선 곰을 전보다 더 세게 쳐서 쓰러뜨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한 놈이 통나무에 맞아 죽게 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격이다.

톨스토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에서 가난하고 또 혼자되어 외롭게 살지만 정직하고 성실하며 신앙심이 깊은 구두 수선공 마르틴이 가난한 노인에게 따뜻한 차를 여러 잔 대접한 일, 배고파 우는 아이를 안고 추위에 떠는 애기 엄마에게 빵과 수프를 대접한 일, 할머니에게서 사과를 훔친 사내아이를 달래서 용서를 구하게 하고 화해를 시킨 일이 마르틴에게 그날 나타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주님께 행한 일들이었다고 말한다. 주님께서 마르틴에게 나타나서 말씀한다. “마르틴,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누구를요?” “날 말이다. 아까 네가 만났던 노인은 바로 나였어.” “추위에 떨고 섰던 애기와 엄마도 나였어.” “싸우고 있던 할머니와 사내아이도 나였어.” 마르틴은 성경을 펼친 후 다음의 성구를 읽는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김상현 11-05-1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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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샬롬
최미옥 11-06-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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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말처럼 "예수는 좋아하지만 예수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는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좀더 예수 닮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겠네요!!
고맙습니다.교수님! 늘 주안에서 승리하시고 건강하세요!!
신성숙 12-06-1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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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둘이 13-05-22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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