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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1-28 17:00
수갑찬 손에 콩밥 한줴기를 들고...(계 13:10))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3,357  
수갑찬 손에 콩밥 한줴기를 들고...(계 13:10))
[성만찬명상문]

1919년 3․1운동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양전백(1870-1933)은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 가운데 한분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서당훈장에 불과했으나 조사(助事) 김관근의 전도로 기독교를 접하고,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우수한 문명과 문화, 그 종교가 한국에서 하고 있는 의미 있는 사업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다음부터는 한문과 유교경전에다 한글과 성경도 함께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25살에 선교사 마펫에게 세례를 받은 후에는 재산을 처분하여 6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신시교회당을 세웠습니다. 이후 권서인과 조사로 활동하다가 32살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교인들과 협력하여 명신학교,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를 세워 유명인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37살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자로 활동하던 중에 신성중학교 교사와 학생 및 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했다는 105인 조작사건(1911)과 3․1운동 때 각각 옥고를 치렀습니다. 다음의 글은 그와 함께 감방에 있었던 선우훈의 증언입니다. 밤 9시경에 수갑찬 손에 콩밥 한줴기를 들고 다리를 절며 의복을 거두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방안에 들어서서 미친 사람같이 손바닥에 콩밥만 할터 잡수신다. 머리털 전부가 뽑히였고 한개 수염도 없었다. 내 곁에 앉었으되 반사(半死)상태로 된 그는 문안도 없고 대답도 없다(선우훈, 「민족의 수난ꡕ 독립정신보급회, 1955, pp. 102-103). 선생은 수년 뷔엿던 교단에 처음 올나서 가장 침중(沈重)한 태도로 “나는 이제 교직을 사(辭)하여야 되겠음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중(在監中) 통초(痛楚)에 익이지 못하야 하지 안은 일을 하엿다고 입으로 거즛말을 하엿으니 주(主)의 교단(敎壇)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엿음니다.” 목자없는 양과 같이 멀니 남천(南天)을 향하야 3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선생의 돌아오시기만 기다리던 수천의 군중들은 이 한마듸 말에 일시에 통곡의 바다가 되얏다(“追悼故梁甸伯牧師)”, 「신학지남ꡕ 15권 2호, 1933.3, p.31). 우리는 양전백 목사의 삶을 통해서 기독교 믿음이 평범했던 한 사람을 얼마나 큰 위인이 되게 했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성도님들의 삶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