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사랑(요일 4:18-20)
요한일서 4장 18-20절은 다음과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최근 러시아의 무력침공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기를 보면서, 영화 ‘명랑’에 나오는 이순신장군의 대사를 떠올려봤다. “싸움에 있어 반드시 살고자하면 죽고, 죽고자하면 살게 될 것이다.” “독버섯처럼 퍼진 두려움이 문제지.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배가되어 나타날 것이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물리친 비결이 바로 죽음을 불사한 용기였던 것이다.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용기를 보여주고 있어서 세계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이자 인도 독립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하트마 간디의 후계자 네루는 개인과 민족 전체에게 간디가 주고 간 최대의 선물은 공포심(아바야)을 갖지 말라는 것,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두려움을 극복한 인도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다음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완벽한 침묵 속에서 줄지어 걷던 간디의 사람들은 철조망에서 90여 미터(100야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선택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철조망 가까이 다가섰다. 갑자기 20여 명의 원주민 경찰들이 정지선을 넘어선 사람들에게 달려들며 강철을 입힌 곤봉으로 마구 머리를 쳐댔다. 그러나 시위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곤봉을 막으려고 팔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볼링 핀처럼 무너졌다.... 얻어맞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자세로 쓰러져 갔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 두개골이 깨진 사람, 부서진 어깨의 고통 때문에 몸을 비튼 채 쓰러진 사람....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키며 얻어맞고 쓰러질 때까지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 모두가 몇 분 후면 얻어맞아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망설임이나 두려움의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고개를 당당하게 든 채 휘청거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루이 피셔의 <마하트마 간디의 삶>, 1952]
군사력에서 세계 2위인 러시아가 22위인 우크라이나를 쉽게 이기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독재자 푸틴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나라 사랑과 용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기가 독재자 푸틴을 분노와 좌절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머지않아 그의 몸뚱이도 오만했던 니오베처럼 돌로 변할지 모른다. 이미 생각과 감성과 인성이 돌처럼 되었으니, 머지않아 그의 육신도 돌처럼 될 가능성이 크다.
마태복음 27장 11-14절에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의 인류의 행복을 위한 두려움 없는 사랑과 희생 때문에 또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다짐한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지옥 같은 캄캄한 세상에 아직도 사랑이 있고, 진리가 있고, 빛이 있고, 생명이 있다. 주의 만찬은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두려움 없는 사랑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