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세가 난관을 헤쳐나간
방법(출 5:1-23)
하나님의 부름과 사명을
받았을 때 자신없어하며 극구 사양하던 모세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굳게 믿고 이집트로 달려간 모세는 용기를 내어 바로(Pharaoh)를 찾아갔다.
찾아가서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바로는 자신은
하나님이 누군지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 백성도 보내지
않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대제국의 바로는
노예족속에 불과한 모세의 존재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바로의 판단으로는
하잘것없는 히브리 노예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모세도 예상했던
일이지만,
바로는 과연
완악했다.
여기서 모세는 대제국
이집트의 바로의 벽에 막히게 되고 만다.
세상을 살다보면 때때로
이런 커다란 장벽에 막힐 때가 자주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모세의 정당한 요구가 바로의 입장에서는 하찮은 것이고,
귀담아 들어줘야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모세의 요구는
천지대군이신 하나님,
바로보다 높고 강하신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바로라는 거대한
벽은,
그 벽이 아무리 높고
튼튼하다고 하더라도,
여리고 성벽처럼 결국
무너져 내릴 운명이란 점이다.
모세의 당당한
요구는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매우 위험하고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설사 바로가 모세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고,
자신보다 혹은 이집트의
여러 신(神)들보다 더 위대한 신(神)의 명령이었다는 점을 알았다 해도 바로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놀리거나 해방시킬 의사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공사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고,
더욱이 노예들인 주제에
자기들의 신(神)에게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니,
이것 또한 이집트인들이
믿는 신들에 대한 모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는 말로 하나님과 모세를
멸시해버린다.
출애굽사건은
주전 1446년에 있었고,
이때의 이집트 바로는
투트모세 3세(Tuthmoses
III, 1464-31)였다.
광야시대의 이집트
바로는 아멘호텝 2세(Amemhotep
II, 1431-1406)였는데,
그들은 가나안땅
남부지역 가데스 바네아(Gadesh
Barnea)를 자주
침략했던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잦은 이집트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땅을 점령할 당시 가나안땅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바로는 강대국
이집트의 신들인 태양신 라(Ra)나 생명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비교해서 히브리노예들의
신(神)은 하찮고 열등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기 자신을
신의 아들로 생각했을 바로로서는 히브리노예들의 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상당수의
현대인들이 바로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그들에게
신(神)이 있다면,
재물의 신 또는 부의
신일 것이고,
그들에게 정신이
있다면,
배금주의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튼 바로는 모세를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바로가 우려한
것은 지금까지 고되고 힘든 일을 도맡아 했던 히브리인들이 도망할 경우 이집트 사회에 미칠 영향이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로서
이집트의 노동력을 생각할 때 도저히 모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앞길을
가로막는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이 벽에 막혔을 때
모세는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 탄원의 기도를
올렸다.
모세는 인간인 바로에게
매달리기보다는 천지대군이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의지했다.
이것이 모세가 어려움을
헤쳐나간 유익한 방법이었다.
모세가 부딪힌
또 다른 장벽은 자신의 정당한 요구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가중된 고통을 겪는 것이었다.
모세의 요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서 백성들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엄청난 것이었다.
재료를 제공받고서도
하루에 끝내야할 할당이 너무 가중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재료를 스스로
구해서 할당량을 채우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되니,
그 고통이 이루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족이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율리우스 시저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본다.
내버려뒀으면 그럭저럭
견딜만했을 텐데,
모세란 자가 나타나서
자기들을 해방시킨다고 하면서 바로를 만난 이후 오히려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으니,
모세를 향한 사람들의
원성은 대단했을 것이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려면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여야 했고,
민족정신으로 똘똘 뭉친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못했다.
여기에 모세의 고충이
있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무시를
당한데다가 자기를 믿고 따라줘야 할 백성들조차도 원망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21절에서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 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질타했다.
실로
사면초가였다.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했는가?
어떻게 이 큰 시련을
극복했는가?
모세는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는 바로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이 단순한 믿음의
행위가 쉬워보여도 믿음이 없이는 결코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모세는 엎드려
기도했다.
모세가 행한 기도를
분석해 보면 세 가지 특성이 드러난다.
첫째,
모세의 기도는
고난당하는 백성을 위한 사랑의 기도였다.
바로가 백성을 호되게
다룬 것은 모세와 백성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정략적인 술책이었다.
바로의 이 술책에
넘어간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인들이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의
이 같은 반응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바로의 이간책에 넘어간 히브리인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비난한 것이 아니었다.
모세의 기도는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22절)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세가 동족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왜곡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한다는 아린 아픔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믿음이
연약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못하는 동족의 고통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둘째,
모세의 기도는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기도였다.
모세는
22절에서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고 탄원한다.
이 탄원은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을 회피하려는 불평이 아니다.
오히려 이 탄원은
무력한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구하는 절규였던 것이다.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였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니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는 자신을 위한
기도였다.
셋째,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의
간섭을 요청하는 기도였다.
하나님의
시간,
곧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때가 속히 임하도록 간구하는 기도였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일지라도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23절)라고 한 기도는 강한 부정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항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이 혹독한
학대에서 속히 구원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탄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지만 우리 인간은 그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 갇혀 사는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고,
그 때까지 우리
성도들은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인내와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복을 주신다.
누가는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한 박해와
시련을 기도로써 극복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을 기도에 전념하신 분으로 소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출애굽기
5장에서 우리는 모세를 통해서 동일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난관에 봉착한 모세는
기도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는데,
모세를 염두에 둔
말이라고 본다.
기도의 용사들이 되도록
하자.